[2016.10.09] 두아디라 교회- 이세벨을 무너뜨려라(1)(요한계시록2:18-29)

[2016.10.09] 두아디라 교회- 이세벨을 무너뜨려라(1) (요한계시록2:18-29)   

설교: 장원규 목사

두아디라는 소아시아의 일곱 도시 중 가장 작은 도시이지만 군사적 요충지요. 염색업의 발달로 인한 의류사업으로 인한 상업이 번성한 곳입니다. 그래서 두아디라도 황제숭배와 경제의 번영을 위한 신전을 두어 우상숭배로 가득한 도시였습니다. 이런 영적인 토대 위에 두아디라 교회는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인 사업, 사랑, 믿음, 섬김 그리고 인내한 교회였습니다. 문제는 이런 훌륭한 신앙을 갖춘 두아디라 교회도 한 순간 무너질 만큼 위험스런 신앙의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 문제에 대한 주님의 책망은 이러했습니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계2:20)

주님께서 두아디라 교회 안에 이세벨의 가르침을 좇아 행음을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는 자들이 있었다는 책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세벨을 용납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세벨은 북이스라엘의 왕 중에서 하나님을 가장 대적한 악한 왕 아합의 아내입니다. 이세벨은 바알 신을 가지고 이스라엘에 들어와 바알 신앙을 열심히 전파하고 가르친 바알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세벨이 가르친 것이 무엇인지는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 산에서 싸웠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 850명과 영적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바알의 선지자들이 보인 신앙관을 보면 그게 뭔지 알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18장26-29절에서 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먼저 이세벨의 가르침을 받은 선지자들은 ‘단 주위에서 뛰놀았다’고 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제사장들은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라는 말은 제사를 드리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사를 받으시는 주인이 누구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알의 제사장들이 드리는 제사는 자신의 기쁨과 유익을 위한 제사였습니다. 예배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의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회중이 되고 말았습니다. 회중에 비위를 맞추기 위해 예배의 변질이 되게 만든 것이 이세벨의 가르침입니다.

두 번째로 이세벨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은 ‘큰 소리로 그들의 신을 불렀다.’‘자신의 요구를 위해 자해를 했다.’고 합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이 큰 소리로 부른다는 것과 자신의 요구를 위해 자해를 했다는 것은 바알에게 간구하는 기도의 모습입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이 큰 소리로 부른 다는 것은 그 신에 대한 살아있다는 믿음이 없어 조바심으로 소리를 지르는 모습입니다.

또 하나는 자신들의 요구를 위해 자해를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신을 협박하여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려는 모습입니다. 이교신앙의 특징 중 하나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사상입니다. 인간의 수고와 열심히 신을 감동시키면 소원을 들어주신다는 자기 바램과 자기 최면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바르고 아름답게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기도는 사랑하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위한 통로입니다. 이런 기도의 본질이 배제된 채 하나님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수단으로 기도가 전락했다면 이것은 바로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른 것입니다. 이세벨의 가르침은 신앙의 본질인 예배와 기도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세벨의 교훈과 사상에 오염되지 않고 건강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과 우리 교회가 어떤 신앙 위에 서야 할까요? 그것은 바알의 선지자와 엘리야가 쌓았던 제단에서 그 답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엘리야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같은 제단에서 제사를 드렸는데 바알의 제사장들은 큰소리로 부르짖었고, 자해를 하며 간구했지만 응답을 받지 못했고, 엘리야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여 그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무슨 차이가 이런 결과를 낳았을까요? 엘리야의 제단의 주인은 하나님이셨고 엘리야가 쌓은 제단에는 각을 뜬 송아지가 제물로 드려졌습니다. 엘리야의 제단 위에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의 제물인 예수 그리스도가 드려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지 않는 예배,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지 않는 예배와 삶은 이세벨이 가르친 바알을 숭배하는 우상숭배일 뿐인 것입니다.

사탄이 교회에 이세벨의 사상을 침투시키는 근본적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예배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주되지 않는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가 되고 신앙생활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두아디라교회는 이런 위험성에 노출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날마다 내 모든 삶의 영역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主가 되신 믿음에 바르게 서 있는지를 점검하고 확증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이 선한 싸움을 힘써 하지 않는다면 어느 순간에 우리들은 이세벨의 교훈을 따르는 자가 될 것입니다.

 

 

ティアティラ教会 - イゼベルを倒しなさい(1

 

ティアティラという小アジアの七つの都市の中の一都市は、小さいながらも軍事的な要衝の地であり、また染物業の発達に伴った衣料商業が盛んになったところです。そのため、ティアティラも皇帝の崇拝と経済繁栄のための神殿をつくり、偶像崇拝に満ち溢れた都市でした。このような霊的な土台の上にティアティラ教会はキリスト教で一番大事な価値である愛、信仰、仕え、そして耐え忍びを行った教会でした。しかし問題はこのような立派な信仰の姿を持ったティアティラの教会であっても一瞬にして倒れるような危機的な信仰の問題を抱いていました。その問題に対する神様の叱責は次のようなものでした。

しかし、あなたには 非難すべきことがある。あなたは、イゼベルという女をなすがままにさせている。この女は、 預言者だと自稱しているが、わたしのしもべたちを敎えて誤りに導き、不品行を行なわせ、偶像の神にささげた物を食べさせている。(ヨハネ黙示録220

神様はティアティラ教会内でイゼベルの教えを請い行い、また偶像の祭壇へ捧げられたものを食べるものがいるという叱責でした。であれば、イゼベルを受け入れたものが何であるかについての正確な理解が必要であります。イゼベルは北イスラエルの王の中でも神様に最も対敵した悪しき王、アハブ王の妻です。イゼベルはバアルの偶像をイスラエルに持ち込みバアルの信仰を一生懸命に伝播し教えたバアルの宣教師でした。

イゼベルが教えたものが何であるかは預言者エリヤがカルメル山にて戦ったバアルとアシェラの預言者たち850人との霊的な戦いを行う過程で、バアルの預言者たちが見せた信仰観から伺うことができます。歴王記上18章26-29節でその中身を扱ってきます。

一つ目はまず、イゼベルの教えを得た預言者たちが「自分たちの造った祭壇のあたりを、踊り 回った」としています。

バアルとアシェラを崇拝する祭司たちが祭壇のあたりで踊りまわったということは祭事を捧げている様子を現しているものです。祭事、つまり礼拝の主が誰であるかを語っています。バアルの祭司たちが捧げた礼拝は単に自分の喜びと有益のためでした。礼拝の主はただ一人、神様でなければなりません。しかし礼拝の主人が入れ替わってしまいました。神様ではなく捧げている会衆となってしまったのです。捧げる者たちの利益のために、礼拝の本質を変えてしまったのがイゼベルの教えでした。

二つ目としては、イゼベルの教えを得たものたちは「大きな聲で呼ばわり」また「劍や槍で血を 流すまで自分たちの身を傷つけた」としています。

バアルの預言者が大きな声で呼んだということ、そして自分の要求のために自害をしたということはバアルに対して願いを請う祈りの様子です。これは神を脅迫して自分の要求を突き通そうとする姿です。異教の信仰の特徴の一つは誠を尽くせば天も感動するという考え方です。人間の苦労と熱心をもって神を感動させれば願いをかなえてくれるという人間の利己的な願いと思い違いなのです。

祈りは神様が私たちに下さった特権です。人間にして神様の栄光のために正しく美しく生かせるためのものです。祈りは愛する神様と人格的な出会いのための通路です。このような祈りの本質が排除されたまま、神様から何かを得るための手段として祈りが用いられるのであれば、これはまさにイゼベルの教えに沿ったものなのです。イゼベルの教えは信仰の本質である礼拝と祈りに深く関連していることを伺えます。私たちがイゼベルの教えと思想に染まらず、健康な教会をたてていくためには私たち自身と私たちの教会がどのような信仰をもとに立たなければならないでしょうか。それはバアルの預言者たちが積み上げた祭壇でその答えを探ることができます。

エリヤとバアルとアシェラの預言者たちは同じ祭壇の前で礼拝を捧げましたが、バアルの祭司たちは大きな声で叫び、自害をしながらも応答を得ることができず、エリヤの礼拝には神様が臨まれ、その礼拝を受けられました。何がこのような違いを生じさせたのでしょうか。エリヤの祭壇の主人は神様であり、エリヤの祭壇には分割させた子牛が祭物として捧げられました。エリヤの祭壇には神様が受け取られる礼拝の際物であるイエスキリストが捧げられたのです。神様が主とならない礼拝、またイエスキリストが中心とならない礼拝と人生はイゼベルが教えたバアルを崇拝する偶像崇拝であるのみです。

サタンが教会にイゼベルの思想をしみこませる根本的な理由はイエスキリストのいない礼拝になり、イエスキリストが主とならない人生を歩ませるためです。イエスキリストがいない教会となりそのような信仰生活にさせることです。ティアティラ教会はこのような危機に露わにされたのです。そのために私たちも毎日のように私の人生のすべての領域で、ただイエスキリストが主となる信仰に正しく立っているかを確認し、確証する人生を歩まなければなりません。このような善なる戦いに挑まなければ、私たちはいつの間にかイゼベルの教えをしたってしまう者となりかねないのです。

 

「み言葉きる」ロゴスライフ教会

 

Posted in 主日説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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