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2.26] 나는 세상의 빛이니라 わたしは世の光である

나는 세상의 빛이니라    

 

예수님은 자신을 “나는 세상의 빛이니라.”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자신을 빛으로 소개하고 있는지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선 요한복음7장2절과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왜 예수님은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을 맞아 자신을 빛으로 소개하고 있을 것일까요? 여기에는 예수님께서 초막절이라는 절기가 되면 유대인들이 두 가지 중요한 의식을 행하였는데 그 의식이 이미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초막절이 되면 마지막 여덟 번째 날을 제외하고는 칠일 내내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길어다가 제단에 물을 붓는 의식을 행하는 것과 또 하나는 유대인들은 초막절 저녁이면 높이가 46미터나 되는 커다란 촛대를 두 개를 세우고 예루살렘 시내를 밝힙니다. 그 촛대는 성소 안의 금 촛대를 확대한 모형으로, 가지가 일곱 개나 되는 웅장한 촛대였습니다. 그리고 성전 안 구석구석에도 촛대들을 세워 놓고 성전을 대낮같이 밝힙니다.

그것은 출애굽 당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고 지켜주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함과 동시에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유대인들에게만 친히 율법 즉 말씀을 주셔서 광야의 어둠을 빛으로 인도하심에 대한 의미를 기억하며 명절을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초막절이 되면 그렇게 자기들만을 선민으로 택하셔서 풍성한 수확마저 허락하신 하나님께 더 큰 수확과 보호하심을 간구하며 그러한 행사들을 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관심은 이 세상의 것들이었으며 세상의 많은 소유를 얻어 지금 더 잘 먹고, 잘 사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힘을 소유하여 성공하고 그 힘으로 자신들을 괴롭히는 주변 나라들을 무너뜨리는 강한 나라를 세우는 그런 세상 것들을 얻어내는 데에 이런 행사를 잘 준비하여 치성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감탄하여 한몫을 톡톡히 챙겨주실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 주신 율법과 이스라엘이 지켜야 하는 모든 절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절기를 통해 신앙의 본질을 잊지 않고 살아가도록 하기 위한 장치였는데 그 본질적 의미와 정신을 다 사라져 버리고 이상한 형식만 남겨진 절기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소개하시는 그 배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요한복음8장1절 이하에 유대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 앞에 데리고 나와 송사한 사건을 잠시 떠 올려보시기 바랍니다. 간음한 자는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반드시 돌로 처 죽이도록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그 율법을 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였고 빛 되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자신 속에 숨겨져 있는 어둠의 죄들이 밝히 들어나자 그들이 도망 가버렸습니다.

누가 빛이고 누가 어두움입니까? 그들의 죄를 밝히 드러내신 주님이 빛이시고 그 빛에 의해 자신의 추한 것이 발각되자 순식간에 모두 자취를 감춰버린 유대인들이 어두움입니다.

그러니까 어두움은 자기들의 가능성과 자존심을 여전히 붙들고 율법을 지켜 의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 모든 사고와 행동들을 가리켜 어두움이라 하는 것이고 그와 반대로 원수들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죽음의 길을 걸으신 주님이 곧 세상의 빛이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빛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세상의 어둠 속에서 진리의 빛, 생명의 빛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 빛 가운데 거하는 한, 더 이상 죄의 어둠 속을 헤맬 필요가 없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 빛을 따르지 않고서는 아무리 결단하고 작심해도 죄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길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그분의 빛을 따르는 것이며, 주님을 사랑함은 이 빛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이 빛 안에 거하는 것이며, 주님을 본받아 산다는 것은 이 빛을 좇아 사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오직 이 빛 속에서만 죄의 삶, 어둠의 삶을 청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는 참 빛 속에서만 모든 만물의 본질을 바로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빛 속에 거하는 자만 자기 자신을 바르게 판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둠 속에서는 만물을 제대로 식별할 수가 없습니다. 동시에 자신을 제대로 살필 수도 없습니다. 이 세상 만물의 본질과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탁월한 재능을 지닌 자라도 자기 자신을 바르게 살피지 못하면 잘못된 삶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자기 눈 속에 들보를 보지 못하고서야 세상을 바르게 볼 재간은 없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진리의 빛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광야 길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사지로 떨어질 수 있기에 진리의 생명의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던 것입니다. 인간은 어두운 세상에서 생명을 유지하며 끝까지 영생의 나라에 안전하게 이룰 수 있는 길은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항상 따라가야만 안전하게 영생의 나라에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진리의 빛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스스로가 하나님이기 되는 것이기 그 교만의 길은 사망이 종착점이 되는 것입니다. 흑암으로 덮여 어디로 가야 할지를 분별할 수 없는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광야의 어둠을 환히 비추어 가나안까지 인도하셨던 그 말씀의 빛 안에 우리 또한 온전히 거해야만이 죄의 어둠으로 덮힌 광야 같은 세상에서 더 이상 사망의 구렁텅이로 추락하지 않고 오히려 영원한 천국까지 안전하게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과 삶이 어우러지는 로고스라이프 교회

 

 

わたしは世の光である

イエスはご自分を「私は世(よ)光(ひかり)である」と紹介されています。イエスがなぜご自分を光として紹介されているか、その意味を正確に理解するためにはヨハネによる福音書7章2節との繋(つな)がりをみなければなりません。「さて、仮庵(かりいお)の祭りというユダヤ人の祝いが近づいていた。」

なぜイエスはユダヤ人の祝祭日である仮庵の祭りをむかえ、ご自分を光として紹介されているのでしょうか?それは、仮庵の祭りという節目になると、ユダヤ人たちは二つの大切な儀式を行うのですが、その儀式がすでに信仰の本質を失ってしまったためです。ユダヤ人は仮庵の祭りになると最後の八日目の日を除いては七日間中、シロアムの池の水を汲(く)んでは祭壇に注ぐ儀式を行いました。またもう一つ、ユダヤ人は仮庵の祭りの夕方になると高さが46メートルにもなる大きなろうそく立てを立てて、エルサレムの市内に光を照らします。その燭(しょく)台(だい)は聖所(せいじょ)の中の金の燭台を拡大した模型として、枝が七つもある壮大な燭台でした。そして聖所の中隅々にその燭台をたて、真昼のように明るく照らしました。

それはエジプトから脱するとき、火の柱と雲の柱で導き、守ってくださった主(しゅ)の御恵みを記憶すると同時に、シナイ山でモーセを通してユダヤ人にのみ自ら律法、つまり御言葉を下さって、荒れ地の暗闇から光へ導かれた意味を記憶した節目を送ったのです。そのため彼らは仮庵の祭りの日になると、自分たちのみを善なる民として選ばれ、豊かな収穫を授けてくださった主に、より大きな収穫と保護を求め、そのような行事を行ったのです。ユダヤ人の関心はこの世のものであり、多くの世の所有を得て、いまより優(すぐ)れたなものを食べ、より優(すぐ)れた者として生きることでした。世の力を得て、成功し、その力で自分たちに危害を加える周辺の国々を滅ぼす強い国家をつくる、そのような世俗のものを得るために、このような行事をしっかりと準備して誠をささげれば、主がそれに感動され、何か一つ取り分を下さるのではないのかと考えたのです。

主(しゅ)がユダヤ人たちに下さった律法とイスラエルが守らなければならないすべての節目はイエスキリストの模型です。主はイスラエルの民がその節目を通して信仰の本質を忘れずに生きていくようにする装置として設けたのですが、その本質的な意味と精神は廃(すた)れ、いびつな形式だけが残された節目となってしまったのです。

イエスがご自分を世の光として紹介されるその背景に対する理解が必要です。ヨハネによる福音書8章1節以下にユダヤ人が姦淫(かんいん)した女性をイエスの前に連れ出し、訴えた事件を少し思い出してみてください。姦淫(かんいん)した者はモーセの律法によると必ず石で打ち殺さなければなりません。ユダヤ人はイエスにその律法を手に取って突き付けたのです。そうするとイエスは“あなたがたのうちで罪のない者が、最初に彼女に石を投げなさい”とおっしゃいました。光である主によって自分の中に隠れていた暗闇(くらやみ)の罪が明かされると、彼らは逃げてしまいました。

誰が光であり、誰が暗闇でなのでしょうか。彼らの罪を明かした主(しゅ)が光であり、その光によって自分の醜(みにく)い部分が剥(む)き出されると瞬時に身を隠してしまったユダヤ人が暗闇なのです。

 つまり、暗闇は自分たちの可能性と自尊心を依然として手に握り、律法を遵守(じゅんしゅ)することで義(ぎ)に達することができると信じるすべての考えと行動のことを指しています。それとは反対に敵(てき)救(すく)いのために十字架(じゅうじか)の死への道を歩まれたイエスがまさにこの世の光であるのです。

主は光として私たちと共にしてくださいます。世の暗闇の中で真理の光、生命の光として私たちを導いておられます。そのためにその光の中にいる限りは、それ以上罪(つみ)の暗闇(くらやみ)をさまよう必要がありません。いいかえると、この光についていかなければ、どんなに決断し、決心をしても罪の影響力から脱する道はありません。

イエス・キリストに従うということは、その方(かた)の光に従うことであり、主(しゅ)を愛することはこの光を愛することを意味します。イエス・キリストの中に留(とど)まるということは、その光の中にいることであり、主を見習って生きるということはその光を追って生きるということを意味します。ただこの光の中でのみ、罪にある道、暗闇にある道を清算す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その理由は何でしょうか。

一つ目は、真(しん)の光の中でのみ、万物(ばんぶつ)本質(ほんしつ)をしっかりと分別(ふんべつ)できるためです。

 二つ目は、光の中にいる者のみ、自分自身を正しく判断(はんだん)できるためです。

暗闇の中では万物を正しく識別することができません。同時に自分をしっかりと見つめることもできません。この世の万物の本質と是非(ぜひ)をわきまえる卓越(たくえつ)した才能を持っていたとしても、自分自身を正しく察(さっ)することができなければ、あやまった道から脱することはできません。自分自身の中の悪しきものを見つけることができなければ、この世を正しく見つめることはできません。

人間を創造(そうぞう)された主(しゅ)が真理の光をもって導いてくださることなしには、荒野(あらの)で彷徨(さまよ)い死の地へと落ちることになるかもしれないため、真理の光、生命(いのち)の光であるイエス・キリストを私たちに送ってくださったのです。人間が暗い世の中で生命(いのち)を維持し、最後まで永遠の国に安全にたどり着く道は、世の光であるイエス・キリストに従い、ついていくことなのです。それによって永遠の国へとたどり着くことができるのです。それをないがしろにしてしまうのなら、それは自分自身が真理の光であると主張しているため、と言えるでしょう。自らが主(あるじ)となるその自己欺瞞の道は、死(し)こそがその終着点となるのです。暗闇に覆(おお)われ、どこに向かえばよいか判断できない荒れ地にいるイスラエルの民を雲の柱と火の柱で照(て)らし、カナンの地まで導かれたその御言葉(みことば)の光の中に、私たちも完全に留(とど)まることで、罪(つみ)と闇(やみ)に覆われた荒れ地のような世界で、これ以上死のどん底へと落ちず、むしろ永遠の御国(みくに)に行きつく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

 

 

「み言葉に生きる」ロゴスライフ教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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