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3.2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5) わたしが道(みち)であり、真理(しんり)であり、いのちなのです(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5)

세상은 길로 통합니다. 세상의 그 어떤 목적지도 다 길을 통해 이르게 됩니다. 하늘에도, 바다에도, 땅에도 다 길이 있고 그 길로 세상 그 어떤 곳이든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인생도 어떤 목적지를 이르기 위해 반드시 걸어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영생이라는 목적지에 이르려면 영생에 이르게 하는 그 길만을 따라가야만 합니다. 역사 이레 모든 인간은 바로 이 길을 찾으려고 수고를 해왔습니다. 문제는 인간은 그 어느 누구도 행복과 영생에 이를 수 있는 그 길을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길을 아는 분은 오직 창조주이신 하나님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는 그 길이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인간이 더 이상의 죄의 종노릇 하면 헛된 인생의 길을 걷다가 멸망이라는 목적지에 이르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멸망의 길을 걷고 있는 죄인들에게 영생으로 인도하시는 인생의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자신을 향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곧 길이며 진리라고 명백히 밝히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일한 길과 절대 진리에 의해 주어지는 유일한 생명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교회가 묵상하고 있는 민수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스스로 길이 되셔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신 것을 잘 아실 겁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길을 내시고 그 길로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과 은혜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 내셨지만 그 건져낸 백성들을 구름에 태워 가나안에 이르게 하신 것이 아니라 광야 길을 스스로 걷게 하여 가나안으로 이끌어 가셨는데 그 길이 전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덮여 있는 길입니다.

한 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 광야 길을 걸어가기에 앞서 1년여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 아래에서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성막과 법궤 구름기둥과 불기둥 그리고 나팔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광야의 길을 걸어갈 때 그 길에서 공급한 것이 만나, 반석의 물입니다. 그것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 것들이었습니다. 즉 광야 길을 걸어간 이스라엘은 그렇게 예수를 길로 삼아 가나안 땅에 이른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 만나는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10:3-4) 신령한 생수를 뿜어낸 그 반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라는 길을 직접 경험하며 걸어야 했던 광야 길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광야 길은 불평과 불만이 수시로 터져 나오는 그런 힘겨운 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일 세대들은 광야에서 자신들의 추악함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라는 사실을 다 들어내고 모두 죽었습니다. 광야는 그런 길입니다. 그렇게 예수라는 길을 따라가는 것은 녹록한 길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영생에 도달하게 하는 길인 예수를 따르는 길을 좁고 협착한 길이라고 한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7:13~14)

주님을 믿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입니다. 이렇게 예수라는 길은 좁고, 협착하고, 자기 부인의 삶이며, 십자가의 지는 삶입니다. 그런데 요즘 주님을 믿고 따르는 그 길을 화려한 길로 착각하여 그 길을 걸어가겠다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목사나 선교사가 되려고 하고 장로, 권사가 되겠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모든 소원이 다 이루어지고 질병도 안 걸린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자식들이 공부를 안 해도 좋은 대학에 다 붙는다고도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모든 일에 만사형통의 길이 열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으면 그런 넓은 길을 보장해준다고 성경 어디에도 약속한 적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참된 행복은 예수라는 길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영생이라는 구원을 받을 때 비로소 행복과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너무나 많은 다른 길들이 들어와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외에 다른 모든 길을 악한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예수 외에 모든 길은 다 버려야 할 악한 길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처럼 신을 이용하여 자신의 만족을 채우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떠나 사망의 길에서 방황하던 인간이 하나님이 내어주신 예수라는 길을 따라 하나님께로 회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이 땅에서의 힘과 업적을 그 목표지로 삼지 않습니다. 그냥 나는 얼마나 무능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그렇게 구제불능인 나에게 쏟아 부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배우며, 그 은혜가 내게 부어지기 위해 하나님이 치르신 희생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확인하여 오직 하나님의 품 안에 온전히 거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모든 말씀에 앞에 예수님처럼 온전한 순종의 자녀로 날마다 지어져 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게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모든 인생길이 되게 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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わたしが道(みち)であり、真理(しんり)であり、いのちなのです(5) 

私たちが神様(かみさま)を信じるという時、その信仰は初(はじ)めに神が天と地を創造した”という創造主の神様を信じることです。それでは神様なる主(しゅ)はなぜこの世界をお創りになったのでしょうか。創造の目的は何で、創造の中心とは何なのでしょうか。それはアダム、つまり人(ひと)です。主(しゅ)はあなたのために世界を創られたのではなく、人のために世界を創られました。そのような祝福された世界で、永遠の幸福をもって生きられるように、主(しゅ)が人間に提案した条件は善悪(ぜんあく)の知識(ちしき)の木(き)の実(み)を食(た)べてはいけない”ことでした。

サタンはアダムとイヴに与えられたその祝福された生活を奪う方法を正確に知っていました。主(しゅ)が人間に要求したただ一つの条件である善悪の知識の木の実を食べさせ、人間が自ら神になるようにするということでした。その点でサタンはイヴをしつこく誘惑し、結局その罠にかかってしまったアダムとイヴは善悪の木の実を食べてしまいました。善悪の木のみを食べた瞬間、人間は生の目的と中心が主(しゅ)から自分へと変わってしまいました。主(しゅ)の意を叶(かな)えることを人生の意味と目的とせず、自分(じぶん)の志(こころざし)を遂げ、満たす欲を人生の意味と目的としてしまいました。

ここより、人間のすべての不幸が始まりました。その不幸の苦しみは私たちの欲望が満たされることは決してないということにあります。人間の欲は限りなく、私たちを飢えさせ乾かせる刑罰のようなものです。そこには満足はなく、すべてが乏しいものとなってしまいました。

幸せは私たちの意を遂げ、私たちの欲を満たすためにあるのではなく、主(しゅ)の善い御心(みこころ)にかなうようにそれを満たすことにあります。自分を捨て、欲を捨て、主(しゅ)こそ主(しゅ)なのだと、主(しゅ)こそ自分自身とこの世すべてを助(たす)け治(おさ)める方として認め、主(しゅ)の意(い)に沿って生き始めると、世界はますます美しく、ますます欠けることのない満たされた世になるのです。それを経験した人こそ詩編の23編を記したダビデです。ダビデは主(しゅ)こそ自分の牧者、つまり己の神とし歩んだ時に欠けることのなかったと告白しています。たとえ彼が生きる世界が罪によって壊され、死の陰の谷のようになってしまった世界であったとしても、主(しゅ)をこそ己の羊飼いとした人は乏しいことのない、不安のない、恐れのない道を生きていくという御言葉です。

今日の本文はイエス様自身を次のように紹介しています。私(わたし)は良(よ)い牧者(ぼくしゃ)です”。何よりも私たちに向かって良い牧者であると語られるその意味は、主(しゅ)を信じ従えば、荒れ野のようなこの世界で乏しいことのないようになることと、永遠の安らぎがある主(しゅ)の御国(みくに)にまで私たちを安全に導かれるという約束が含まれているのです。

特に今日の本文を通じて主がご自分を良い牧者であると紹介されたのは、羊である私たちがなぜ主(しゅ)であるイエスを良い牧者として信じ従わなければならないのかについて、その根拠を語られています。

一つ目に、良(よ)い牧者(ぼくしゃ)は羊(ひつじ)である私たちの各々の名(な)を呼ばれるためです。

良い牧者は私たちの中にある羊の名の一つ一つを呼び、導かれます。この言葉の意味は良い牧者は多くの羊の中の一匹としてでなく、羊の一匹一匹を大事な存在としてみなし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羊は自分の所有物であるのですが、自分の満足と利益のための手段などでなく、その目的それ自体として見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そのため、ある神学者は“万一、この世で主(しゅ)の民が私一人のみであったとしても、主(しゅ)は私一人を救われるためにあなたの息子を十字架につけられたであろう”と語ったこともあります。

二つ目に、良(よ)い牧者(ぼくしゃ)は羊(ひつじ)である私たちの人生を最後まで祝福(しゅくふく)された所に導(みちび)かれるためです。

羊の名を一つ一つ呼ばれた良い牧者はその群れの先で羊を導いていきます。良い牧者は羊の前ですべての危険を先に迎え、羊を保護します。その方は私たちの弱さに寄り添われます。 寄り添うと訳された言葉の原語は‘単純に味見するだけでなく、自分がすべてをもっていく’という意味を持つ言葉です。つまり、イエス様がハンセン病を治癒されたとき、そのハンセン病がイエス様に移ったのです。イエス様が出血の止まらない病気を患っていた女性を治癒されたときも、その病気がイエス様のものになったのです。良い牧者はこのように私たちの先で私たちのすべての疾病と弱さを持ち行かれ、私たちの未熟さと失敗と間違えをイエス様が完成させ、私たちに渡してくださる方なのです。主がまさにこのような方であるために、私たちはどんな疑いもなく、主を良い牧者として信じ、私たちの人生すべてをゆだね従うだけで良いのです。

三つ目に、良(よ)い牧者(ぼくしゃ)は羊(ひつじ)である私たちのためにそのいのちをも捨(す)てられるためです。

良い牧者である主は、“私は良い牧者です。良い牧者は羊のために命を捨てます。”良い牧者は羊のために危険な目にあってまで“守る”のではなく、“捨てる”といっています。羊たちを助けるために必要なものが自らのいのちを犠牲にすることであるということを知り、自分から先に捨てるという意味です。それでも惜しむことなく、むしろ喜ばれる牧者であります。そのために私たちは良い牧者がどこに私を導いていっても、喜びをもってついていかねばなりません。その牧者を通じてのみ、救いを得、草をはむことができるためです。この世の何かではなく、ただイエス様を通じてのみ、創造時にエデンの園で下さった創造の生命を今一度回復することができるためです。私のために命さえも下さった牧者に自分をゆだねる時、父(ちち)なる主(しゅ)と御子(みこ)のイエス様の深い知と愛の交わりに私たちも参す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

そのときになって初めて、この世を治癒し、回復させる祭司(さいし)としての生を全うすることができます。そのときになって初めて、私たちはこの世を義によって統治する王のような者にな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そのときになって初めて、私たちは暗闇の世界を真理の光へと導く預言者の使命を全うすることができます。

 

「み言葉(ことば)に生(い)きる」ロゴスライフ教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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