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4.09] 나는 참 포도나무다 (7) わたしはまことのぶどうの木です (7)

나는 참 포도나무다 (7)

세상에 존재하는 종교는 크게 인간 스스로 자신을 구원해야 한다는 자력종교와 인간은 죄인으로 스스로 구원할 수 없고 절대자의 은혜로 구원에 이룰 수 있다는 타력종교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타력종교는 기독교만이 이에 속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자기 주도적인 인생을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인생의 주관자 되심을 믿고 자신의 인생 전부를 하나님께 전적으로 위탁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살지 않는다면 세상 종교가 말하는 자기 힘으로 구원에 이르는 자력종교를 믿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고난주일 예배로 드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사는 존재임을 각인시키는 기독교 본질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만을 붙드는 삶이어야 하고 십자가만이 우리의 자랑이자 삶의 목적이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곧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믿음만이 참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참 포도나무의 비유’는 통해 성경이 이 점을 얼마나 깊이 교훈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레미야2장21절을 통해 우리의 존재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

여기서 귀한 포도나무는 하나님께 선택 받은 이스라엘입니다. 농부이신 하나님께서 귀한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한 그 가지는 다 불살라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마땅히 죽어야만 하는 유대백성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 날에 너희는 아름다운 포도원을 두고 노래를 부를지어다. 나 여호와는 포도원지기가 됨이여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이를 해치지 못하게 하리로다. 후일에는 야곱의 뿌리가 박히며 이스라엘의 움이 돋고 꽃이 필 것이라 그들이 그 결실로 지면을 채우리로다.(사27:2-3,6)

갑자기 하나님께서 포도원을 노래하라 하십니다. 하나님이 포도원을 다 불살라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 포도원에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이를 해치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움이 돋고 꽃이 피어 지면에 열매로 가득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 이유는 ‘참 포도나무’때문입니다. 에스겔서17장22-23절입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또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취하여 심으리라.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빼어난 산에 심되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을 이룰 것이요 각양 새가 그 아래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거할지라.

여기에서 백향목은 다윗 왕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 다윗 왕가의 꼭대기, 높고 연한 가지는 누구를 가리키겠습니까? 연한 순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연한 가지, 꼭대기의 가장 높은 가지가 꺾여 가장 낮은 곳으로 심겨집니다. 그런데 그 가지에 무성한 열매가 맺히고 각양 새가 그 아래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거하게 될 거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악한 포도나무들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좋은 열매를 풍성히 맺는 좋은 포도나무가 될까요? 창세기49장8절,11절로 가보겠습니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야곱이 열 두 아들에게 유언을 합니다. 그 중 유다에게 유언을 하는데 유다의 후손에서 메시아가 올 것이라고 예언을 합니다. 그런데 그 메시아는 암 나귀 새끼를 타고 그 옷을 포도주에 빨게 될 것이라고 예언을 합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수난’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메시아는 포도주 즉 예수님의 피에 자신의 옷을 빨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피로 자신의 옷을 빤다는 것은 곧 십자가에서 모든 인간의 죄의 저주를 받아 죄의 값을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 피 한 방울도 남김없이 쏟으시고 죽으실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밟혀 멸망의 자리로 갔어야 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 밟히심’에 의해 우리는 참 포도나무인 예수님께 접붙임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예수라는 참 포도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아무 공로나 자격이 없는, 면목 없는 가지들일 뿐입니다.

우리는 참 포도나무로서의 우리의 신분을 자각하고 들 포도나무와 같이 자신의 뜻과 소원을 위해 자신이 들고 있는 힘과 세상의 힘을 의지하여 행복과 만족에 도달하려 하는 모든 시도를 멈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흐르는 가장 낮은 곳 십자가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 자리만이 자신을 부인하여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존재임을 인식할 수 있고 그 은혜로만 세상을 살도록 힘을 주시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극상품의 포도열매를 맺는 참 포도나무에 꼭 붙어 있는 가지가 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길은 십자가 앞에 낮아지고 겸손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포도나무에 꼭 붙어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십자가 앞에 서야 합니다. 십자가를 붙드는 삶은 바로 말씀과 기도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말씀과 삶이 어우러지는 로고스라이프 교회

 

 

 

わたしはまことのぶどうの木です (7)

世の宗教は大きく二つに区分することができます。一つは、自分の力で救うという自力宗教です。もう一つは、人間は罪人で自らは救えない存在であるため、絶対者の恵みで救われるという他力宗教です。キリスト教は後者です。ですから、主(しゅ)の恵みで救われたキリスト者(しゃ)は自分の力よりただ主が中心になり全てを主にゆだねるようになります。キリスト者が主の恵みで生きるからこそ、自力宗教である他の宗教と区別されます。

本日、私たちは受難主日を迎えて礼拝をささげています。イエスが私たちの罪のため、十字架で死なれたのはただ主の恵みで生きる存在であることを明らかにするキリスト教の本質です。私たちは十字架を掴(つか)み、十字架だけが誇りであり目的である道を歩みます。 十字架は主の恵みです。これを信ずる信仰が主に喜ばれます。‘まことのぶどうの木’のたとえを通して聖書はこの点を深く諭(さと)しています。

聖書ではエレミヤ2章21節を通して私たちの存在をこのように述べられています。

「わたしは、あなたをことごとく純良種(じゅんりょうしゅ)のよいぶどうとして植えた(う)のに、どうしてあなたは、わたしにとって、質(しつ)の悪い(わる)雑種(ざっしゅ)のぶどうに変わった(か)のか。」

この箇所で良いぶどうは主に選ばれたのはイスラエルです。農夫である主が良いぶどうを植えられたのに、実を結べない質の悪い雑種のぶどうに変わったのです。

では、良い実を結べない枝は全て切り捨てなければなりませんか。いいえ、主は死なざるをえないユダヤの民たちにこのようにおっしゃいます。

「その日(ひ)、麗しい(うるわ)ぶどう畑(ばたけ)、これについて歌え(うた)。わたし、主(しゅ)は、それを見守る(みまも)者(もの)。絶えず(た)これに水(みず)を注ぎ(そそ)、だれも、それをそこなわないように、夜(よる)も昼(ひる)もこれを見守って(みまも)いる。時(とき)が来れば(く)、ヤコブ(やこぶ)は根(ね)を張り(は)、イスラエル(いすらえる)は芽(め)を出し(だ)、花(はな)を咲かせ(さ)、世界(せかい)の面(おもて)に実(み)を満た(み)す。」(イザヤ書27:2-3、6)

とつぜん、主はぶどう畑を歌えとおっしゃいます。ぶどう畑を捨てる代わりに水を注ぎ昼夜に見守り、だれも損なわないようにします。そして、芽を出し、花を咲かせ、世界の面に実を満たすようにすると言われます。なぜ、このようになさるのでしょうか。それは‘まことのぶどうの木’のためです。エゼキエル書17章22-23節です。

「主(しゅ)である主(しゅ)はこう仰せられる(おお)。「わたしは、高い(たか)杉(すぎ)のこずえを取り(と)、そのうちから、柔らかい(やわ)若枝(わかえだ)の先(さき)を摘み取り(つ)、わたしはみずからそれを、高くて(たか)りっぱな山(やま)に植える(う)。わたしがそれをイスラエルの高い(たか)山(やま)に植える(う)と、それは枝(えだ)を伸ばし(の)、実(み)を結び(むす)、みごとな杉(すぎ)の木(き)となり、

その下(した)にはあらゆる種類(しゅるい)の鳥(とり)が住み(す)つき、その枝(えだ)の陰に(かげ)宿る(やど)。」

ここで、高い杉はダビデの王家を例えています。ダビデの王家のこずえ、柔らかい若枝は誰を指しているのでしょうか。柔らかい芽として来られたイエス・キリストのことです。柔らかい若枝、杉のこずえの最も高い枝を摘み取って最も低いところに植えられます。ところが、その枝に実が結ばれ、あらゆる種類の鳥が住みつき、その枝の陰に宿るようになると言います。

それでは、どうすれば悪いぶどうの木が主に喜ばれる良い実を結ぶ良いぶどうの木になるのでしょうか。創世記49章8、11節です。

「ユダよ。兄弟(きょうだい)たちはあなたをたたえ、あなたの手(て)は敵(てき)のうなじの上(うえ)にあり、あなたの父(ちち)の子(こ)らはあなたを伏し拝む。彼(かれ)はそのろばをぶどうの木(き)につなぎ、その雌(めす)ろばの子(こ)を、良い(よ)ぶどうの木(き)につなぐ。彼(かれ)はその着物(きもの)を、ぶどう酒(しゅ)で洗い(あら)、その衣(ころも)をぶどうの血(ち)で洗う(あら)。」

ヤコブが十二の子たちに遺言を述べます。その中、ユダに彼の子孫の中でメシヤが来られると預言をします。このメシヤは雌ろばの子に乗り、着物をぶどう酒で洗うのだと言います。これは‘キリストの受難’を予言しているのです。

ですから、メシヤはぶどう酒、すなわち、キリストの血潮でご自分の着物を洗われるということです。イエスが血で着物を洗うというのは全ての人間の罪ののろいを一身に受け、罪(つみ)を贖(あがな)うために十字架の上で全ての血を流して死なれるという預言です。主に捨てられ滅亡へと行かざるを得なかった私たちの身代わりに、イエス・キリストが捨てられ、私たちはまことのぶどうの木であるイエスに繋がれるという出来事が起こったのです。これが救いです。私たちはまことのぶどうの木であるイエスに繋がれる資格、もしくは名目はない枝です。私たちはまことのぶどうの木としての身分に目覚め、酸いぶどうのように自分の望みや欲のために自分の力と世の力にすがり、幸せと満足を得ようとする、すべての試みを止め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して、私たちはただ主の恵みが流れる最も低いところ、十字架の前にひれ伏します。十字架の前こそ、自分を否認し、主の恵みで生きる存在であることに気づき、その恵めで生きられる力が与えられる場です。

 

主に喜ばれる良い実を結ぶまことのぶどうの木にくっついている枝になりませんか。そうであるならば、その道は十字架の前で腰を屈めへりくだることです。私たちが常にぶどうの木にくっついている存在になるためには、十字架の前に立つのが大切です。十字架(じゅうじか)を掴む(つか)というのは、みことばと祈りをもって生きることです。

 

「み言葉に生きる」ロゴスライフ教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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