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4.16] 나는 부활이다 (8) わたしはよみがえりです (8)

나는 부활이다 (8)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람들조차도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거나, 부활을 단순 지식에 머무는 삶을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대제사장들의 주장처럼 주님의 시체를 숨긴 제자들의 거짓말에 불과했다면 그 거짓을 숨길 수 있었을까요? 당시 주님의 부활을 증거 할 때 생명의 위협을 받아야 했고 사자 굴에 던져졌습니다. 그런 생명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부활의 증언이 철회되기는커녕, 그들은 죽는 순간까지 주님의 부활을 외쳤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부활 하셨고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났기 때문입니다.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 역사 가운데 세상과 많은 나라들은 부활의 증거를 허물어뜨리기 위한 숱한 시도가 있었습니다. 아예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성경을 불태워 성경에 담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증언을 지구상에서 사라지도록 시도한 적도 있었지만 단 한 번도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이것보다 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확실한 증거는 없을 것입니다.

부활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며 진리임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온전히 믿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인간이 이미 세상으로부터 형성하고 있는 그 틀을 버리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자신이 살아온 방식, 세상으로 얻은 지식, 삶의 경험으로 형성된 자기기준의 가치관을 부정하고 다 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다.라고 자신의 존재를 밝히신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점을 우리에게 정확히 일깨워 부활의 참된 신앙을 갖기 위함입니다.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가 죽은 지 나흘째 되는 날 예수님께서 그곳을 친히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동생 마르다를 향해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러자 마르다의 반응은 이러했습니다.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24절)

마르다는 안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비록 오라비가 죽었지만 이 세상의 종말이 임하는 그날 다시 살아날 줄을 믿는다는 말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시오,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곧 성자 하나님이시기에 주님을 믿는 자의 죽음은 마지막 때 다시 살아난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얼마나 분명한 믿음의 고백이며 확신에 찬 믿음입니까? 그리고 나서 주님은 곧장 나사로의 무덤으로 향하셨고 그곳에 도착하시자 마르다를 향해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자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요11:39)

지금 예수님께서는 죽은 나사로의 육체를 일으키시기 위해 무덤 문을 열라 하시는데 마르다는 이미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어 시체가 심하게 썩었으므로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반응인 것입니다. 마르다는 조금 전까지 주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믿나이다.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그 고백이 얼마나 지났습니까? 주님께서 죽은 나사로의 육체를 살리신다고 무덤의 입구를 막고 있는 돌을 옮기라는 말씀에 대해 마르다는 불가능하다며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르다가 하나님과 주님을 다 아노라고 호언장담했던 그 앎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마르다가 믿는다고 그토록 힘주어 강조했던 그의 믿음의 내용은 또 무엇입니까? 참으로 쓸모 없는 앎이요. 허망한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믿음의 대상에 대한 인식이나 내용의 옳고 그름은 우리 자신이 형성하고 있는 믿음의 강도에 의해 판가름되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마르다는 죽은 자도 살리시는 부활의 주님임을 믿는다면 바로 돌문을 옮기는 믿음의 태도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믿음은 바른 앎에서 비롯된 믿음이 아닌 자신의 상식과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한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이미 형성하고 있는 그 모든 틀을 깨뜨리지 않고는 결코 주님이 말씀하신 돌문을 옮길 수 없는 것입니다. 돌문이 옮겨지지 않는 한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오는 모습 즉 믿음에 따른 실상을 결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주님께서 나에게 ‘돌을 옮기라’고 하신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혹시 마르다처럼 돌을 옮기라는 그 말씀 앞에 자신 안에 기반하고 있는 지식을 근거로 주저하면서 나름대로 여러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하며 주님을 설득하시는 쪽입니까? 아니면 주님을 믿기에 그 말씀에 순종하여 돌을 옮기시는 쪽입니까? 전자 쪽에 서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마르다처럼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고정된 틀 즉 자신의 기준으로 자신이 정한 믿음의 근거가 자신의 모든 생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 일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알고 계십니까? 지금 무엇을 확신하고 있습니까? 혹시 그 앎이, 그 믿음이 자신이 경험한 그 기반이라면, 세상으로부터 주어진 그 지식을 기반으로 한 것이라면 부활하신 주님을 맞는 이 아침에 그 앎과 그 믿음을 겸손히 내려놓으십시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반을 삼지 않고 자신을 그 기반으로 한 그 모든 앎과 믿음을 부인하여 버리지 않는다면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우리를 친히 찾아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경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 되어 세상을 이기고 변화시키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은 될 수 없습니다. 부활을 믿는 신앙생활이란 더 이상 자기를 삶의 기반으로 삼지 않고 나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부활의 주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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わたしはよみがえりです (8)

キリスト教の中心は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での死とよみがえりです。ところが、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ているという人たちの中でさえイエスのよみがえりを信じ難い、もしくはただよみがえりを知識としてもっている人たちがいるようです。イエスのよみがえりが大祭司たちの主張のように主の亡骸(なきがら)を隠した弟子たちの嘘(うそ)に過ぎないならば、その嘘をずっと突き通すことは果たして可能なのでしょうか。当時、主のよみがえりを証すというは命がけで、獅子の洞窟に投げられることもありました。 このような命の危機があるにもかかわらず、よみがえりの証言が撤回されることはおろか、弟子たちは命が絶える最後の時まで主のよみがえりを唱えました。その理由は、イエスはよみがえられ、弟子たちはよみがえられた主と直接、出会ったからです。

二千年のキリスト教の歴史の中、世の多くの国でよみがえりの証拠を傷つけようと様々な方法での試みがありました。その試みの中では、世にあるすべての聖書を焼き尽くして聖書に秘めてある十字架の死とよみがえりの証言を地球上で消し去ろうとすることもありました。ところが、一回もこのような試みが通じたことはありません。これこそイエス・キリストのよみがえりの確実な証拠だと言え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よみがえりは明らかな歴史の事実であり、真理であるのにもかかわらず、今もなお多くの人たちは十字架の死とよみがえりを信じるのを戸惑っています。それはどうしてでしょうか。人間は世で作られた型を変えることが決してたやすくはありません。今までの生き方、知識、人生の経験から築いてきた自分の価値観を変え難いからです。

こういうところを私たちがしっかりと気づいて、まことのよみがえりの信仰を持つようにイエスは“わたしはよみがえりです。”とご自身の存在を明かされました。

ベダニヤに住んでいるラザロが死にました。彼が死んでから四日が経った日、イエスがベダニヤに来られました。そして、ラザロの妹であるマルタに、“あなたの兄弟はよみがえります”とおっしゃいます。そうすると、マルタはこう反応します。

“マルタはイエスに言った。「私は、終わりの日のよみがえりの時に、彼がよみがえることを知っております。」”(24節)

マルタは知っていると言っています。それは、兄は死にましたが、世の終わりの日にはよみがえるのを信じているという意味です。イエスが世に来られる父なる主の子キリストである、すなわち子なる主であるので、イエスを信じる者は終わりの日によみがえられるのを信じるということでした。これは確かに素晴らしい信仰の告白です。

ところが、イエスはすぐラザロの墓に向かわれて着くと、マルタに言われます。

“イエスは言われた。「その石を取りのけなさい。」死んだ人の姉妹マルタは言った。「主よ。もう臭くなっておりましょう。四日になりますから。」(ヨハネ11:39)

今、イエスが死んだラザロをよみがえらせるために墓の石を取りのけなさいとおっしゃったのに、マルタは死んで四日になってもう腐敗が進んでいるので生きられるのは無理だと言わんばかりの反応を見せています。マルタは先ほどイエスを信じる者は死んでも生きるのであるのを“信じております”と言いました。そうであったのに、主であるイエスがラザロをよみがえらせるために墓の石を取りのけなさいとおっっしゃったら、マルタは無理だとイエスの御業を妨げようとするかのようです。

では、マルタが父なる主とイエスを知っていると言ったのはどういう意味だったのでしょうか。マルタが信じていたのは何だったのでしょうか。このままなら、まことの信仰とは言い難いのはないでしょうか。

マルタが死んだ者も生きられるというよみがえりの主を信じていたならば、すぐ墓の石を取りのける行動に移ったと思います。ところが、マルタはそのような行動はしませんでした。彼女の信仰は自分の常識と知識や経験を土台にした信仰だったかもしれません。自分自身にすでに構築されている枠(わく)を砕(くだ)かない限り、決してイエスの言葉に従って墓の石を取りのけることはできません。墓の石を取りのけないと、死んだラザロがよみがえられる姿、すなわち信仰に伴う実証を見ることができません。

では、今、主が私に‘墓の石を取りのけなさい‘とおっしゃるなら、どうしますか。

マルタのように持っている知識を根拠に、戸惑いを見せてしまうのでしょうか。そうではない。主を信じ、みことばに従って墓の石を取りのけるのでしょうか。もし前者なら、これはマルタのように既に持っている固定された枠、すなわち自分の基準で自分が定めた信仰の根拠がすべての考えを支配してい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信徒の皆様、父(ちち)なる主(しゅ)を知っていますか。今何を確信していますか。もしその知識、もしくはその信仰が自分の経験に基づいているならば、よみがえりの主を迎える本日、復活祭主日に主の前で静かにそれをおろしてみませんか。ただ、父(ちち)なる主(しゅ)の御言葉(みことば)に基(もと)づいて、自分を基盤にしていた知識と信仰を主に委(ゆだ)ねてみるのはどうでしょうか。そうすれば、十字架の死とよみがえりで私たちに御自ら来られた父(ちち)なる主(しゅ)の愛(あい)を真に経験し、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ことと知ることが一つになって、世を変える力あるキリスト者になるでしょう。よみがえりを信じる信仰は、もはや私自身が生きるのはなく、よみがえられたキリストが私のうちに生きておられることです。

「み言葉(ことば)に生(い)きる」ロゴスライフ教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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