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4.23] 나는 부활이다 (9) わたしはよみがえりです (9)

나는 부활이다 (9)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행복한 인생을 살고, 평강의 삶을 살며, 일상의 삶이 형통하기를 바라는 것은 어느 누구이든 모두의 바램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삶과 그렇게 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바램을 넘어 바램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의 삶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만 합니다.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은 오직 한 분만을 집중하는 삶입니다. 그 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한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려주셨습니다. 요한복음을 잘 묵상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가장 정확히 알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부분은 예수님께서 일곱 개의 표적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예수님이 속죄양으로 오실 수밖에 없는 이유가 설명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부분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한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의 일곱 표적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인자 위의 하늘이 열리고 하늘의 생명력이 부어지는 ‘복음’을 설명하기 위한 말씀입니다. 특히 요한복음의 표적들의 마지막 일곱번째 표적인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은 구약의 종결과 완성의 표적입니다. 표적들의 실체이신 진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일이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다’라는 사실을 근거로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고 싶으셨습니다. 요한복음11장4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나사로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인 것이며 그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그림자인 것입니다. 그렇게 완전히 죽어서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교회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죽음에 사로잡혀 있던 교회를 살려내는 것임을 선명하게 그려준 것이 나사로의 부활사건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사로가 병이 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하신 것이고 그 일로 아들이 영광을 얻는 일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것과 하늘의 것들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가시적으로 역사와 공간속에 드러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에 의해 하나님의 성품이 계시되는 상태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즉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와 오래 참으심과 섬김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곳이 어디입니까? 십자가입니다. 그러니까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사건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극명하게 드러난 십자가 사건을 예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불가능한 시체들이었던 우리가 전적으로 아들의 공로에 의해 살아나게 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때 그것이 아들이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사로는 예수님이 그러했듯이 완전히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사로의 와병 소식을 듣고도 이틀을 더 유하다 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나사로의 무덤으로 들어가십니다. 왜 굳이 무덤을 여시고 그 무덤 속에서 썩어가는 시체를 폭로하십니까? 그게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어떤 가능성도 없는 모습, 자신의 의를 기반으로 하려는 그 인간의 죄 된 모습이 얼마나 흉측한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싶으신 것 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무덤 속에서 죄와 허물로 죽어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아니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지금도 우리는 때때로 무덤 속에서 죽음을 경험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지경에서 구원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하나님의 배려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기적으로 보여주신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교훈하시려고 했던 가장 핵심은 죄로 인해 죽었던 인간의 실상입니다.

첫째는 우리는 자신에게 그 어떤 가능성을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지독스럽게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것이 자신의 의를 가지고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나는 부활이다.그 이후에 자신을 소개하는 마지막이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자신을 ‘참 포도나무의 비유’로 마무리하고 있는 것일까요? 참 포도나무와 가지와 관계에 있어서 가지의 가치는 오직 포도나무에게 붙어 있을 때만 의미와 가치를 가질 수 있습니다.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있는 가지는 오직 불에 던져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죽은 가지인데 농부이신 하나님께서 그 가지를 가져다가 참 포도나무인 주님께 접붙여 살려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가지의 가치는 존재의미는 오직 포도나무에 잘 붙어 있을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정확히 인식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은 나는 부활이다 이후 참 포도나무로 모든 결론을 지은 것입니다.

둘째로 부활은 인생의 끝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인생의 끝을 아는 자는 눈앞에 문제로 요동하거나 흔들려 무너지는 일이 없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인생의 절대 절망인 죽음이 우리 인생을 덮는다 해도 우리의 인생의 끝은 더 이상, 눈물도 괴롬도, 고통도 없는 다만 사랑과 생명만이 넘치는 천국에서 영원토록 하나님 아버지와 살게 되는 그 위대한 승리의 날을 맞이하게 된다는 분명한 약속입니다. 그래서 현재 우리는 이 위대한 승리의 날을 기억하며 일상에서 부활의 주님과 항상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어떤 문제 앞에서 견디고, 담대하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믿음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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わたしはよみがえりです (9)

誰しも、この世を生きながら、幸福で、平安な人生を生き、日常が常に安泰であることを願うのは、同じだと思います。しかし、必ず覚えておくべき事は、我々が願う人生と、そのように生きることは別物だということです。 その願いが現実のものになるためには、必ず我々の人生の治める方、主の御言葉どおりに生きて行か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御言葉どおりに生きる事は、ただお一人だけに集中して生きる事です。そのお一人は、イエスキリストであります。

そこで、主はヨハネの福音書をとおして、主の御子である聖者イエスキリストがどんな方であられるか、明確に教えてくださいました。ヨハネの福音書を深く黙想すると、イエスキリストがどんな方なのか悟ることができます。

ヨハネの福音書は、大きく二つに分けることができます。その一番目は、イエス様の七つのしるしを通して、イエスキリストが、どんな方で、この世に献げ物の羊として来られたワケを述べられております。二番目はイエスキリストの死とよみがえりについてです。

ヨハネの福音書の七つのしるしは、イエスキリストにより天が開き、天の生命力が注がれる「福音」を説明するためのものです。特にヨハネの福音書のしるしの内、最後の七つ目のしるしである「ラザロの死とよみがえり」は、旧約の終結と完成のしるしであります。しるしの実現であるイエス様が十字架に亡くなられよみがえることで、すべてが完成されるのです。

「わたしはよみがえりであり、命である。わたしを信じる者は、たとい死んでも生きる。また、生きていて、わたしを信じる者は、いつまでも死なない。あなたはこれを信じるか」。

(25-26節)

イエス様は「わたしはよみがえりである」事実の根拠として、我々にとても大事な御言葉をおっしゃられました。ヨハネの福音書11章4節です。

「この病気は死ぬほどのものではない。それは神の栄光のため、また、神の子がそれによって栄光を受けるためのものである」

ラザロの死は、イエスキリストの死であり、彼のよみがえりは、イエスキリストの陰(かげ)なのです。完全にお亡くなりになり、葬られた後によみがえられ、教会の最初の実りになられたイエスキリスト。その出来事こそが死に囚われていた教会をよみがえらせる、イエス様の働きであることを鮮明に象徴したのがラザロのよみがえりなのです。だから主は、ラザロの病気が、神の栄光のためであり、神の子がそれによって栄光を受けるとおっしゃったのです。

主の栄光とは、主のものと天のものが、主の意思により、歴史と空間上に目に見えて現れることを意味します。つまり、主の意思により主の面持ちが掲示される状態が「主の栄光」なのです。では、主が主たること、即ち、主の愛と許しと忍耐と自己犠牲が一番鮮明に表れる所は、どこでしょうか。それは十字架です。なので、死んだラザロがよみがえった出来事は、即ち、主の

栄光が明確に表れた十字架を予兆しているのです。そして、不可能と思われた屍(しかばね)であった我々が、御子の功により生き返られた事を認める時こそ、御子が栄光を受けられるのです。

だから、ラザロは、イエス様がそうであったように、完全に死な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のです。それでイエス様は、ラザロの病気の知らせをお聞きになってからも二日間留まっておられたのです。そして主は、ラザロのお墓に入られました。なぜわざわざお墓の石を取り除き、お墓の中で腐っていく屍を暴露されたのでしょう。それはわたし達の姿、何の可能性もなく自分の義を基(もとい)とする罪深き姿が、どんなに醜いものなのかを生々しく目にしてくださったのです。

我々は皆、お墓の中で罪と過ちで死んでいた者でした。すでに救われたと思っている者も、時々お墓の中の死を経験しながら生きております。我々がどんな境遇から救われた者なのかを忘れないようにする、主の心配りなのです。

イエス様が最後の奇跡として見せてくださったラザロの死とよみがえりにより、我々に伝えてくださるメッセージの核心は、罪によって死んだ人間たちの実状です。

一つ目は、我々は、自分自身からどんな可能性も探しては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す。

人間にしつように影響力を行使しようとするのは、自分の義を基(もとい)に生きようとすることです。そこで主は「わたしはよみがえり」とおっしゃり、その後に「わたしはまことのぶどうの木である」と御自身を紹介しておられます。なぜイエス様はご自身を最後に「まことのぶどうの木」と例えられたのでしょうか。まことのぶどうの木と枝の関係において、枝は、ぶどうの木とくっついている時だけに意味と価値があるのです。ぶどうの木から離れては、火の中に放り投げられる以外、なにもないのです。我々は、死んだ枝であり、農夫の主がその枝を用いて、まことのぶどうの木である主に繋いで生き返らせたのです。なので、枝はぶどうの木にくっついている時だけ存在価値があるのです。この事実を確かに認識させるため、主はご自身がよみがえりであり、その後、まことのぶどうの木であると結論付けたのです。

二つ目に、よみがえりは人生の末が何なのかを教えてくれます。

人生の末を知る者は、目の前の問題に揺さぶられたり崩れたりすることはありません。主のよみがえりは、人生の絶対絶望の死が我々を襲いかかっても、我々の人生の末は、涙も苦しみも苦痛もなく、ただ愛と命だけが溢れる天国で、永遠に父なる主と共に生きる、偉大な勝利の日を迎えるという確かな約束なのです。だから、現在の我々はこの偉大な勝利の日を心待ちしながら、日常の日々を、よみがえりの主が共におられることを信じ、どんな苦難も耐えて、妥協しない信仰の道を歩ま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み言葉(ことば)に生(い)きる」ロゴスライフ教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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