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10] 나는 누구인가? 今は祈る時です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해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거울에 비치는 자기 모습을 보면서 그것이 자기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각자 자기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부르면 돌아다보고 대답합니다. 불러지는 이름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자기의 소유를 가지고 삽니다. 재산, 명예, 가족, 학벌 등등의 소유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도 이 비슷한 경험을 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모세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 곧 애굽 사람의 노예로 태어납니다. 그러나 어려서 공주의 양자가 됩니다. 그리고 40세가 될 때까지 왕자로 자라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살인자가 되어 도망하여 그는 40년 동안 들에서 양을 치는 목자로 삽니다. 그가 다시 나머지 40년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보내게 됩니다. 모세는 왕자로 자라는 그 과정 속에 왕자가 곧 자신인줄 알았을 것입니다. 40년 동안 양을 치면서 그 모습 곧 자신이 누구인지를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이런 환경의 변화에 따라 자신의 존재를 판단하며 살았기에 혼란과 방황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80년의 세월을 보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은 모세에게 찾아오셨고 그를 부르십니다. 하나님을 대면한 모세가 하나님께 질문을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3:11)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의 그 질문에 대해 “네가 누구이다.”라고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누구냐“는 인간 스스로 찾을 수 없는 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인간을 지으신 창조주만이 주실 수 있는 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대답은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3:12)

동문서답처럼 들리는 대답입니다. 그러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라는 자의식, 하나님이 내 안에 살아계신 존재라는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만이 진정한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함께 다시 산 자가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항상 하나님이 산 자로의 인생을 살게 되자 볼 잘 것 없었던 80세 노인의 인생은 온전히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도구, 하나님의 사람으로 생명의 거룩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사도바울도 그리스도를 다메섹 선상에서 만나기 전까지는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자신의 손에 쥐고 있는 세상의 근거들이 곧 자신을 말해주는 것인지 알았습니다. 그를 찾아오신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이젠 그리스도만 사시는 자가 즉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자가 되었다는 이 놀라운 비밀을 깨닫고 믿음을 갖게 되는 순간 삶의 중요한 변화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의에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라.”( 6:11).

바울은 자신 안에는 그리스도가 사셨고 그의 생명이 넘치는 자임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 그리스도는 내 밖의 어떤 존재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내 속에 들어왔고 내 속에서 살아계시는 주이심을 날마다 인정하며 항상 주님이 함께 하시는 자로, 주님이 전부인 자로 살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 때 바울은 주님을 닮은 주님의 인격을 닮은 자가 되었고, 성령 충만한 바울의 삶은 어느 덧 원수까지도 용납하고 사랑하는 진정한 그리스도가 산 자의 인생을 산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성경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은 자“라고 말씀합니다. 죽은 사람은 모든 것이 그칩니다. 나쁜 성질이 그치고, 나쁜 습관도 그칩니다. 병도 그칩니다. 죄도 그칩니다. 모든 저주도 그칩니다. 이것이 성도의 정체성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노력하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성경의 이어진 또 하나의 대답은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오직 내 안에 계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인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것은 세상의 경험도 지식도, 세상으로 연결된 그 어떤 것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전부인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고 함께 할 뿐입니다. 모든 삶이 주님과 항상 함께 보고 느끼고 교제하면 일상의 모든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다“에서 “내 안에 그리스도가 하신다.”라고 인생의 진정한 주인이 나에서 그리스도로 바뀌는 것입니다.

대림절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가 누구인지 그 정체성을 정확히 일깨워주기 위함입니다. 더 나아가 내가 그리스도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 자”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어떤 인생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친히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사랑의 열매를 맺는 삶이며, 그의 능력으로 세상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사탄의 역사를 무너뜨리고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생명의 도구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삶의 열매를 맺는 것이 참 나의 모습입니다.

今は祈る時です

人間が作ったものは、どのようなものであれ、限界があり、弱点があります。ですから、私たちはこのような事実を常に認識して主の前で自分を低くしてへりくだり、主の恵みで生きる存在です。主の前でへりくだって恵みを求めるのは、ひざまずいて祈ることです。多くの信徒が怠って若しくは時間がなくて祈ることができないと言います。私はこの言葉に同意できません。私たちが祈らない理由は驕り高ぶっているからではないでしょうか。

私たちが一瞬も主の恵みがなくては生きられない存在だと信じていれば、祈りは選択の問題ではなく生存の問題であることを知っているため、決して祈ることを諦めたりはしません。私たちが祈らない理由は、意識であれ無意識であれ、主以外に頼れるものがあるからです。だからこそ、へりくだっているキリスト者は祈りの場を決して離れません。ジャン・バニヤンは“祈りは魂の盾です。祈りは主に捧げる宝物です。祈りはサタンに振り回す鞭です。”と言い、祈りの生活を営みました。

主を信じている民にとって祈りは呼吸に値して命と直ちにつながる最も重要な問題です。祈りは信徒がこの世で味わう最高の祝福であり、力です。何故なら、主は祈る者を通して歴史を率いられ、主の御業に必要なすべてを与えてくださるからです。

最近、本教会ではエステル記を黙想しています。エステル記は主の巨大な歴史の中で、個人の歴史と共同体の歴史をどのように治めてくださるかをドラマチックに見せてくれます。何が一人の人生をあんなにドラマチックにして偉大にしてくださるのか、そして、死の前に立っているユダの共同体を再び生かしてペルシヤ人が捕虜であったユダヤ人が信じている主を信じるようになる驚くべきことがどのように可能であったかを教えてくれます。

イスラエルは歴史的に主の救いの恵みを二回経験しました。一つはイスラエルの歴史の中で最も大切な日である過越しの祭りであり、もう一つはエステル記に記録されているプリムの日です。面白いことは、プリムの日と過越しの祭りの時期がアビブの月の十四日で同じ日に定められたということです。歴史を治める主が二つの大切な日をこのように絶妙に同じ時期に繋がれた理由は何でしょうか。過越しの祭りはイスラエルの民たちが出エジプトする過程で行われた救いです。この過程においてイスラエルはどのような労苦も努力もしていません。ただ主の絶対主権の下で対価なし恵みで与えられたことです。これを記念してイスラエルは毎年アビブの月の十四日を過越しの祭りに定められて守っているのです。

イスラエルの歴史の過程でもう一回与えられた救いの恵みがプリムの日です。このプリムの日は主の民たちの人生はただ全能である主が治められていることを信じ、ただ主だけが救い主であり、すべてを担って下さる方であるのを信じてただ御言葉に聞き従う道を歩む者であることを示します。

 

 

 

 

 

 

 

 

 

 

エステル記の歴史の背景は、当時ペルシヤの総理になったハマンがイスラエル民を滅ぼす計画を立てて王の許しを得て全国にその事実を布告し、ユダヤ人たちが滅ぼされる危機に陥ったところです。その時、ユダヤ人を救われる主の歴史が記録されています。この過程において主は二人の人物に注目されて、彼らを通して救いの歴史を成し遂げられます。

 “モルデカイは、なされたすべてのことを知った。すると、モルデカイは着物を引き裂き、荒布をまとい、灰をかぶり、大声でひどくわめき叫びながら町の真ん中に出て行き、”(エステル記4:1)
ここで、モルデカイは祈っているのです。そして、モルデカイの下で育てられたエステルは当時王妃でした。エステルはモルデカイからユダヤ人が陥った状況を聞いてこのような態度をとります。

“行って、シュシャンにいるユダヤ人をみな集め、私のために断食をしてください。三日三晩、食べたり飲んだりしないように。私も、私の侍女たちも、同じように断食をしましょう。たとい法令にそむいても私は王のところへまいります。私は、死な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したら、死にます。”(エステル記4:16)

エステルも主に祈るのです。この二人が民族の危機の前で取った選択は、主を求めて祈ることでした。彼らには利己主義も理性的な判断も自分の幸せを追う気持ちもありません。ただ、自分を棄ててすべての歴史を治められる方である主を仰いで頼るという信仰だけがあるのです。

彼らが断食しながら叫ぶ祈りは、主以外に他のものを頼ることはしないという徹底した自己否認です。モルデカイとエステルがこのような道を歩むことができたのは、主だけを人生の中心としたからです。モルデカイとエステルがこのような道を歩むことができたのは、祈りを通して聖霊に満たされていたからです。だからこそ、モルデカイとエステルは当時捕虜であった身分にもかかわらず、ユダヤ人の危機を自分の問題にして命を懸けた祈りをすることができました。このような信仰は、異邦の地で主の恵みと力の管になり、主の救いの聖なる道具になり、生きておられる主が歴史のあるじであることを現す証人になるようにしたのです。

今の時代を生きている私たちが是非覚えてほしいのは、義人は私のために死なれ、再びよみがえられた天の父なる主の御子イエス・キリストだけを信じる信仰によって生きる者です。私たちは、イエス・キリストだけが私たちを救われる唯一の方であることをこの歴史の舞台で、この日本の地で、そして、今生活している場で証しする証人です。このような素晴らしい人生を生きることを願います。モルデカイとエステルのように十字架だけが誇りと力になる人生を主がどのように救いの働きを起こしてくださるか経験する主人公になることを願います。

Posted in 主日説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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