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7.2]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아는 길 (5) 流れ来る主の計画にあずかる道(5)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아는 길 (5)

하나님의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의 공통점은 모든 사람에게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 복된 자로 서도록 하기 위해 반드시 고난 가운데 두시며 그 고난 가운데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며, 하나님의 모든 말씀 가운데 순종하는 믿음을 갖게 합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는 과정을 잘 살펴보면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오직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믿음이 가장 우선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되는 한 가지가 총리는 반드시 그의 주인이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요셉의 총리 본능을 분석해보면 아주 중요한 한 요소로 압축됩니다. 그것은 주인 앞에 충성됨입니다.

사람은 반드시 이 땅에 사는 동안 누군가를 위해 충성하는 삶을 삽니다. 그 충성의 대상이 자신이냐, 하나님이냐로 구분될 뿐입니다. 모든 인생은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평가를 받게 됩니다. 그 평가의 기준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 얼마나 많은 업적을 남겼느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충성된 자였는가가 그 기준이 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시101:6)

여러분! 지금 이 일본에서 살고 있는 것은 우연도 아니며 어쩔 수 없이 사는 현장이 아닌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그 계획을 이루시기 위한 현장으로 주신 곳임을 꼭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 하나가 우리 모두는 다 하늘나라의 총리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 땅에서 우리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요셉과 다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위해 우리의 부르심에는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7-28)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심어놓은 영적DNA를 말씀해 주신 것인데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총리의 본능입니다. 이 점은 우리도 요셉처럼 우리 마음에 각인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총리의 본능은 반드시 주인으로부터 신뢰를 받아야만 하는데 그 신뢰는 충성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노예가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형성하는 근성이 보신주의입니다. 노예가 일 잘 하고 열심히 한다고 더 나은 미래가 있습니까? 인센티브가 있습니까? 잘하면 본전입니다. 그러나 못하면 죽도록 맞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노예가 자연스럽게 형성하는 태도가 눈치껏 하면 되는 것입니다. 노예들에게 결코 찾기 힘든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충성됨”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노예로 간 보디발 집에서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심지어 감옥에 죄수로 투옥해서는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아무도 인정받을 수 없는 그 현장에서, 아무런 소망이 없는 그런 곳에서 요셉은 마치 자신이 그 집의 주인처럼, 그 감옥의 간수장처럼 즉 총리의 자세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요셉을 진짜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게 한 비결입니다. 지금 현재 주어진 그 일에 대해, 지금 현재 주어진 그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이것이 충성입니다. 크고 위대한 일 앞에서 충성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일이니까, 큰일이니깐 충성하지 말라고 해도 충성을 다합니다. 문제는 애굽의 총리 같은 큰일이 아닌,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 있을 때, 감옥에서 죄수로 있을 때 그 작고 허접한 일 앞에서 충성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나라의 총리에 서지 못하고 하나님의 큰 계획은 마음의 품었지만 그 비전을 성취하지 못하고 실패로 끝나는데 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총리를 맡기시는 그 기준 또한 동일한 관점입니다.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시101:6)

지금의 삶의 현장을 주목하십시오. 지금 나에게 주어진 그 일은 무엇입니까? 그곳이 보디발의 집이고 그곳이 감옥입니다. 직장 상사의 눈치에 따라 움직이지 말고 하늘 총리답게 충성을 다하십시오.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맡으셨습니까? 그곳이 여러분의 보디발의 집입니다.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 움직이지 말고 하늘 총리답게 섬기십시오. 이것이 하늘 총리의 당연한 자세입니다. 지금 삶의 터전에서 주어진 크고 작은 모든 일에 대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이 나를 부르심이라고 믿는다면 아무도 봐 주는 사람 없어도, 그것이 해도 별 티도 나지 않는 일일지라도, 그 일을 잘 해도 번전의 일이라도 거기서부터 총리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충성을 다하십시오. 하나님나라의 총리가 되는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는 점을 항상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流れ来る主の計画にあずかる道(5) 

 

主の人たちに対する主のご計画の共通点は、すべての人が幸いになることです。この幸いな者として立つためには、必ず苦難があり、苦難の中で忍耐を、忍耐は練られた品性を、練られた品性はどのような状況に置かれても主の前で考え、主のみこころに従い、主のすべてのみことばに聞き従う信仰を持たせます。

ヨセフがエジプトの総理になる過程をよく見てみると、どのような状況でもただ主だけを絶対に信頼する信仰が優先されます。ここで注意してみてほしいのは、総理には必ず主人がいることです。ですから、ヨセフの総理としての本能を分析してみると、最も重要な点は一つに圧縮されます。それは、主人の前で真実であることです。

人は、この世で生きる間、誰かのために真実を尽くします。この真実の対象が自分か、主か区分されるだけです。すべての人生は、造られた創造主の前で必ず評価されます。評価の基準は、この世でどれほど働いたか、どれほど業績を残したかではなく、主の前でどれほど真実な人であったかです。

私(わたし)の目(め)は、国(くに)の中(なか)の真実(しんじつ)な人(ひと)たちに注がれます(そそ)。彼ら(かれ)がわたしとともに住む(す)ために。全(まった)き道(みち)を歩む(あゆ)者(もの)は、私(わたし)に仕えま(つかえ)す。”(詩篇101:6).

皆様、今この日本で生活しているのは、偶然でも、致し方ないことでもない、主の計画を成し遂げる場として与えられたところであるのを覚えましょう。ここで逃さないでほしいのは、私たち皆は、主の国の総理として召されたという事実です。無論、この世で私たち各自にある主の計画はヨセフとは異なります。ところが、主の国のために、私たちが召されたことには共通分母があります。

 “神(かみ)は人(ひと)をご自身(じしん)のかたちとして創造(そうぞう)された。神(かみ)のかたちとして彼(かれ)を創造(そうぞう)し、男(おとこ)と女(おんな)とに彼ら(かれ)を創造(そうぞう)された。神(かみ)は彼ら(かれ)を祝福(しゅくふく)された。神(かみ)は彼ら(かれ)に仰せられた(おおせ)。「生め(う)よ。ふえよ。地(ち)を満たせ(み)。地(ち)を従えよ(したが)。海(うみ)の魚(うお)、空(そら)の鳥(とり)、地(ち)をはうすべての生き物(いきもの)を支配(しはい)せよ。」”(創世記1:27-28)

このみことばは主が人を創造されるとき、すべての人に同一に与えられた霊的DNAを示してくださる箇所ですが、“生めよ。ふえよ。地を満たせ。すべての生き物を支配せよ。”というのは総理の本能です。この点を私たちもヨセフのように心に刻んで生きるのが大切です。総理の本能は必ず主人から信頼が大切ですが、その信頼は真実の実を結ばせます。

ヨセフがポティファルの家の奴隷であったとき、自然に形成されるのが保身主義です。奴隷がうまく仕事をして頑張ったらもっと良い未来が保障されますか。インセンティブがありますか。変わりはありません。ただ言われるとおりにしないと叩かれるだけです。このような状況で奴隷がすることは主人の機嫌をとることです。奴隷たちに真実を求めるのは難しいことかもしれません。ところが、ヨセフはポティファルの家の奴隷にいる間、どのように生きましたか。また、監獄で囚人であったときはどうでしたか。誰から認められることも、どのような希望もないところで、ヨセフはまるで自分がその家の主人のように、その監獄の頭のように、すなわち総理の姿勢で最善を尽くして生きました。これこそヨセフが本物のエジプトの総理になられた秘訣です。今現在に与えられた仕事、今現在に与えられた場で最善を尽くすことが、真実です。誰がみても素晴らしい大いなることを行うときは、誰でも真実で行おうとします。重要なことだから、大いなることだから、最善を尽くそうとします。問題はエジプトの総理のような仕事ではなく、ポティファルの家の奴隷であったときと監獄で囚人であったときのように小さくてくだらないように見えることにも真実に行うことができるかです。

人たちが主の国の総理として立てず、そして、主の大きな計画は心に抱きましたがそれを全うすることができずに失敗で終わる最も重要な原因がここにあります。ですから、主が主の国の総理を任されるその基準も同一の観点です。

私(わたし)の目(め)は、国(くに)の中(なか)の真実(しんじつ)な人(ひと)たちに注がれます(そそ)。彼ら(かれ)がわたしとともに住む(す)ために。全(まった)き道(みち)を歩む(あゆ)者(もの)は、私(わたし)に仕えま(つかえ)す。”(詩篇101:6).

今、生活の場を注目しましょう。今私に与えられた仕事は何でしょうか。あそこが皆様のポティファルの家であり、あそこが監獄です。職場の上司の機嫌をとるために働くのではなく、天の総理らしく真実をつくしてください。教会でどのような務めを任されましたか。あそこが皆様のポティファルの家です。人たちの反応によって動くのではなく、天の総理らしく仕えてください。これが天の総理の当然な姿勢です。今生活の場で与えられたことが大きいことであれ、小さいことであれ、それが私に対する主のお召しだと信ずるならば、見る人がいなくても、やり遂げてもあまり目立たないことだとしても、ただ元をとるようなことであったとしても、その場で総理としてのアイデンティティをもって真実に行ってください。主の国の総理である皆様に対する主のご計画はその時点から始まるということを常に覚えましょ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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