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7.15]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 [16] (로마서 4:1-8) 장원규목사, 동경성결교회, 로고스라이프교회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 (16)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세상을 보는 안경을 쓰게 됩니다. 부모로부터, 유치원이나 학교로부터, 친구들로부터, 다양한 책들로부터 등등의 여러 경로를 통해 세상을 보는 안경을 쓰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쓴 안경은 좀처럼 벗기가 힘든 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지금까지 써 왔던 안경을 벗고 하나님께서 씌워주시는 말씀의 안경, 예수 그리스도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우리 믿음의 삶을 보면 자신이 썼던 안경을 벗지 않고 그 위에 말씀의 안경을 덧쓰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두 개의 안경을 끼고 있어 인생의 초점이 두 개로 보여 삶의 포커스가 정확하지 않아 혼란스런 삶을 살게 됩니다. 이런 상태의 삶은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신앙생활을 오래해도 근본적인 생각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생각의 초점이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어 있기에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을 다시 자기생각의 안경을 통해 보게 되니 말씀이 말씀답게 내 안에서 역사할 수가 없습니다. 생각의 근본이 바뀌지 않으니 조금 변화된 삶을 볼 수 있지만 근본적인 변화는 아닌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만 있지 경건의 능력은 전혀 없는 세상 사람과 다를 것이 없는 무늬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 얻는다는 안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말하는 율법은 성경이 말하는 율법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장로들의 유전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장로들의 유전과 하나님의 율법을 동일시합니다. 그러면서 그 기준에 맞는 사람의 모델로 아브라함을 꼽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기준으로 볼 때 아브라함은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모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확신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의 확신이 얼마나 잘못된 안경을 쓰고 성경을 본 것인가를 설명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 또한 유대인들과 같지 않지만 우리 나름대로 안경을 끼고 성경을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선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착한 행실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삶에 감사가 넘치고, 선행을 행하며, 자신만을 위한 삶에서 이웃을 향한 이타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착한 행실에 이행여부가 구원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착한 행실로 삶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대표주자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떻게 비롯된 그것을 오늘 본문이 말씀하려는 핵심입니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롬4:1-2)

아브라함이 의롭다 칭함 받은 것이 행위로 된 것이라면 그 행위를 자랑할 수 있을 터이지만 행위로 된 것이 아니므로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선한 행위가 하나도 없었다든지 아니면 예수 믿는 사람에게 행위가 전혀 필요 없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으므로 그의 행위는 선한 행위를 행합니다. 이런 선한 행위에 대해 아브라함 입장에서 얼마든지 자랑할 수 있겠지만 그 행위를 가능케 한 원동력에 대해 성경은 다른 차원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3절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아브라함이 의로운 행위를 한 것은 그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태어나 자란 곳은 하란이라는 곳이었습니다. 그 하란에 있을 때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무엇으로 드러났느냐 이것을 말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었다는 것이 단순히 믿음의 고백으로 끝나지 않고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는 순종으로 그 행위를 드러낸 것입니다. 당시 하란은 화려한 문명의 도시입니다. 살기가 너무 편한 도시이며 경제적으로 부요한 도시입니다. 그러나 가나안은 황무지와 다를 바 없는 도시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그 동안 영위해 온 안전하고 편안한 삶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황무지로 떠났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 믿음이 어떻게 주어진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도 행위도 인간 차원에선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정말 주님을 믿는다면 세상이 씌어준 안경을 벗어버리고 이젠 복음의 안경을 써야 합니다. 이젠 하란에서 가나안을 향해 말씀을 따라 삶의 방향을 돌려야 합니다. 매일 하나님의 의이신 주님으로 충만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날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는 한 우리의 자아가 역사한 옛사람은 날마다 죽고 또한 날마다 그리스도가 주가 되셔서 주장하시는 삶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그 유업이 나의 유업이 되는 그 영광스런 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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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書は何と言っているのか (16)

 

人はこの世に生まれる瞬間から、自分の意図とは関係なく、世を見る眼鏡を掛けるようになります。親から、幼稚園や学校から、友人から、様々な本などから、いくつかの経路を通して世を見る眼鏡を掛けるわけです。そのように掛けられた眼鏡をなかなか外せられないのが人間です。

神を信じるというのは、今まで掛けられた眼鏡を外し神様が掛けてくださるみ言葉の眼鏡、イエス・キリストの眼鏡を掛けて世を見て生きていくことを意味します。ところが、意外と私たちの信仰の生活を見ると、自分が掛けた眼鏡を外さず、その上にみ言葉の眼鏡を重ねて生きていく人が多いです。このような人々は、二つの眼鏡を掛けており、人生の焦点が二つになり人生のフォーカスが正確ではなく、混乱の生活を送るようになるでしょう。

このような状態の人は、いくら聖書をたくさん読み信仰生活を長くしても、根本的な考えを変えることができません。考えの焦点が自分から始まっているのでみ言葉を聞いても、そのみ言葉を再び自分の考えの眼鏡を通して見るので、み言葉がみ言葉らしく自分の中で作用することができません。考えの根本が変わらないので、ある程度変わった姿は見られるが、根本的な変化はないのです。見えるところは敬虔であってもその実を否定する、敬虔の力は全くない世の人と異なることのない、形だけのクリスチャンに生きるのです。

ユダヤ人たちは、律法を守って救いを得るという眼鏡を掛けていました。もちろん、彼らが言う律法は、聖書が言っている律法ではありません。人々が作った長老たちの遺伝です。それにも関らず彼らは長老たちの遺伝と神の律法を同様にしています。それなのに、その基準に合うモデルとして、アブラハムを挙げていたのです。つまり彼らの基準で見ると、アブラハムは、律法を守って義と認められたモデルとなったわけです。このような彼らの確信は大したものでした。それで使徒パウロは、彼らの確信がいかに誤った眼鏡を掛けて聖書を見ていたのか、説明したがっていたのです。私たちはユダヤ人とは異なりますが、自分なりに眼鏡を掛けて聖書を見られるという点では同じであることを知るべきです。

 

私たちが、善行を行うことは、神のみ恵みによって救われ神の子とみなされたからです。それで、生活の中で感謝が満ち、善行を行い、自己中心の生活から隣人に向けた利他的な生活を送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このような善行の行いが救いを決定する可否ではありません。善き神の子となったので、生活の中で善行の実を結ぶのです。

アブラハムは信仰の代表的な者です。アブラハムの信仰がどのように始まったのか、それが今日のみ言葉の核心です。

 

 

「それでは、肉による私たちの父祖アブラハムの場合は、どうでしょうか。もしアブラハムが行い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のなら、彼は誇ることができます。しかし、神の御前では、そうではありません。」(ローマ4:1-2

 

アブラハムが義と認められたのが行いによったものであれば、その行いを誇ることができるはずですが、行いによったものではないので、誇ること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この部分で、私たちが注意すべき点があります。アブラハムに善い行いが一つもなかったとか、または、イエスを信じる人に善い行いは全く必要ないと誤解してはならないところです。アブラハムは神を信じたので、彼は善い行いをしたのです。このような善い行いについて、アブラハムの立場からいくらでも自慢できると思いますが、その行いを可能にした原動力に対して聖書は、別の視点から語っています。 3節です。

「聖書は何と言っていますか。「それでアブラハムは神を信じた。それが彼の義とみなされた」とあります。」

 

アブラハムが義のみなされたのは、彼が神を信じていたからだと言っています。アブラハムが生まれ育った所はハランという所でした。そのハランにいるとき、アブラハムに神のみ恵みが臨みました。その時、アブラハムは神を信じました。ところが、その信仰が何で明らかになったのか、それを言いたいのです。アブラハムの信仰は、単純に、信仰の告白で終わらずハランを去ってカナンに行く従順で、その行為を表わしたのです。

当時ハランは、華麗な文明の都市でした。とても暮らしやすい都市であり、経済的に豊かな都市でした。しかし、カナンは荒れ地と変わらない街でした。アブラハムは、自分がその街で営んできた安全で快適な生活を捨てて、神が命じられた荒地にたちました。どうすればそのように出来るのでしょうか。アブラハムは神を信じていたからです。アブラハムにこのような信仰がどのように与えられたのでしょうか。のみみによってえられたものです。ですので、信仰も行いも人間の立場では何も誇ることが出来ないものなのです。

 

私たちが本当に主を信じるならば、世から掛けられた眼鏡を外して、福音の眼鏡を掛けるべきです。もうハランからカナンにい、み言葉沿って生活方向変えるべきです。毎日神の義である主に満ちた生活を送ることです。そのように、日々主と共に生きる限り、私たちの自我が基準になる古い人は日々死なれ、キリストが主となられ導かれる生活により、アブラハムの相続が自分の相続になる、栄光の日を迎えることになるでしょう。

 

 

 

言葉(ことば)生(い)きる」ロゴスライフ教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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