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31] 우리가 본 받아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닌 오직 예수입니다 見(み)つめ倣(なら)う方(かた)は主(しゅ)です

우리가 본 받아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닌 오직 예수입니다

인생에는 길이 있습니다. 인생에도 길이 있다는 것은 곧 인생이 반드시 도달해야만 하는 목적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생이 도달해야 할 목적지를 찾고 그 목적지에 이르기 위한 길을 찾으려고 많은 수고와 노력을 기울이며 삽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건 수고를 하지만 인생의 목적지와 그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마침내 허무한 인생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목적지와 길을 찾기 위해 목숨을 건 수고가 있지만 찾지 못하는 이유는 인생의 목적지와 그 목적지에 이르는 길은 피조물인 인간이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만드신 분이 인생의 목적지와 그 목적지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알려주어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이 인생의 길이라고 외치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누구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요14:6)

예수님은 자신이 모든 인생의 길이 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길인 자신을 통해 모든 인간들이 도달해야 하는 그 목적지가 어디인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인생의 길 되신 예수님은 자신을 통해 모든 인간들이 도달해야만 하는 그 목적지가 바로 창조주 하나님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이유는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구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떠나 불행하게 살던 인간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인간을 지으신 분임을 믿고 오직 하나님 의 뜻과 목적을 이루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인생의 길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것은 곧 인생의 목적지인 하나님께 갈 수 있는 약도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개 그 길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길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세상을 더 신뢰하여 세상이 말하는 그 길을 따라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만 예수님과 하나님은 그 세상 길을 통해 세상이 말하는 그 목적지에 남보다 더 빨리 도달하는데 수단 정도로 이용하는 것뿐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불행의 악순환은 눈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보단 눈에 보이는 물질의 소유가 더 매력적이고 더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착각에 빠지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대부분을 더 많이 소유하려는 온 힘을 다 쏟고 삽니다. 부자가 되고, 성공하고, 출세하는 것에 모든 힘을 집중하다 보니 정작 중요한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로 연결시켜 주는 기도와 말씀묵상 그리고 예배에 시간을 드리는 것에는 인색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로마서12장2절의 핵심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뜻은 세상 따라 살지 말고, 세상에 끌려 다니지 말고, 세상으로 목적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과 세대를 본받으면 정말 불행하게 됩니다. 절대로 잘 살 수 없고, 구원 얻을 수 없고, 천국에 갈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2017년 한 해를 살았습니다. 어떠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그 길과 방법을 따라 사셨습니까? 아니면 이 세대를 본받아 욕심과 세상의 방식으로 사셨습니까? 오늘 로마서12장2절에 핵심 키워드는 ‘변화’입니다. 우리는 생각을 바꾸고 사는 방식을 과감하게 바꾸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라고 하시는 것은 ‘이제까지 목적으로 삼고 살던 것을 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산 제물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세상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입니다. 돈이 아니고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뜻과 욕심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의입니다. 그 동안 우리가 목적으로 삼고 살았던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위한 도구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목적으로 삼았던 세상의 모든 것도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 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은 2017년 마지막 주일예배이자 마지막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지나면 우리는 새해를 맞아 한 해를 살게 될 것입니다. 살아온 지난 인생에는 항상 후회가 남길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 해 이렇게 매듭을 짓게 하시는 중요한 이유는 지난 과거를 돌아보고 왜 후회만 남는 삶이었는지 돌이켜 회개하며 결단하고 새 출발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인생의 목적이자 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을힘을 다해 한 해 달려가야 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인생의 길 되신 예수님을 따라 사는 길만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며,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만을 삶의 길과 방식을 삼겠다는 결단이 있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이제는 내 안에 사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목적도 그 목적지까지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만을 인생의 목적과 인생의 길로 삼고, 예수가 삶의 모든 방식이 되는 삶이 될 때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영적 예배를 드리는 인생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이렇게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예배자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을 따라 사는 참 행복한 인생이 되고 가치 있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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見(み)つめ倣(なら)う方(かた)は主(しゅ)です

人生を道にたとえた時、そこには目的地があります。その目的地を定め、その目的地に至るために力と思いとが注がれます。いのちをかけてまで定め求めた先が何もないところであり、探しあぐねて終わってしまった先人の例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その理由を私たちは、人が探し出せる類のものではなく、その人をお造りになった方に尋ねてこそ見出すと告白します。イエスは言いました。イエス は彼に言われた.

「わたしが道であり…」(ヨハネによる福音書14章6節)

ご自身こそ人の道とされたイエスさまは、その道の目的地もまたご自身であるとおっしゃいました。

「わたしを通してでなければ, だれひとり父のみもとに来ることはありません」(ヨハネによる福音書14章6節)

イエスは人としてこられました。あらゆる人を救うためです。救いとは何かと問うならば、それは主より離れた人が主に立ち返ることです。主こそ人をお造りになった方、ただ主の心と目的にあって生きる道が本来であったのです。人の道の地図そのものがイエスなのです。そこには目的地も道も記されています。

しかし、得てして私たちはその道を知れど歩もうとしない悲しい性(さが)をもまた持っています。この世とは比類(ひるい)なき方イエスを告白しつつも、この世と比べてしまい、より信頼しようかしまいか迷うのです。イエスという道が、ある目的を達成するためのあるひとつの有用な何かとしてしますのです。この悪循環は、ある錯覚に起因しています。主との関係から、主と所有できる何かとを同じ線上においてしまうことです。そうしてどちらがより魅力的か、より幸福をもたらすかを見出そうとします。どちらが、より我を富ませ、成功をもたらし、出世街道を驀進させしめるかを問うのです。ここには祈りの不在とみことばにある黙想との不在がおのずと伴ってきます。人は、そのようにして実に吝嗇極まりない存在に陥ってしまいます。

 

 

ローマ人への手紙12章2節の中心には、「この世と調子を合わせてはいけません」があります。世にあわせて生きることなかれ、引きずられることなかれ、この世のどこかに目的地を定めるなかれ、です。そこには救いも天の御国もないのですから。

2017年一年間を振り返ります。主を見つめ歩まれたでしょうか。主とこの世とを比べ、そのものさしに己の何らかの方式や欲望が見えていたでしょうか。革新(かくしん)をキーワードとして捉えましょう。思考方式の革新です。後者の己の方式や思いを、主に捧ぐいけにえとしてしまえ、です。私たちが見つめる先には主の御国があります。銭ではなく主です。己の方式や思いにあって築いてきたものがあるのならば、それはむしろ主に捧ぐ道具と化し得ます。その実現の暁には実に美しいものが待っています。

信徒の皆さん、2017年最後の礼拝の時、新年を迎えますが、過ぎし道を思えば後ろ髪引かれることしばしの人生、しかれど前を向き新たに出発を切るときです。イエスキリストにある幸いなことよ. そのそむきを 赦され, 罪をおおわれた 人は信仰です。このスタート地点であり、道であり、目的地であるこの方にあって、死力を尽くして、ふたたび漕ぎ出します。私たちのすべてはキリスト共に十字架につけられたのですから。そして、その目的地を目指すもだたキリスト故なのです。その唯一無二の道をくださった父なる神の独り子をくださったのは、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ている故です。主へのこの霊的礼拝をささげ始める時、即ち、その道に価値が生まれるのです。

「み言葉(ことば)に生(い)きる」ロゴスライフ教会

 

 

 

[2017.1224] 하나님 아들의 오심은 세상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主なる御子は世を救うために来られました

하나님 아들의 오심은 세상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전쟁은 인류를 죽음으로 몰아간 살상의 역사입니다.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죽음의 세력은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끝임 없이 전쟁과 굶주림과 질병 등으로 생명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본래 죽음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지만 요사이 인간의 죽음은 자연사보다 인간들의 탐욕에서 비롯된 전쟁, 테러, 살인 등으로 죽는 죽음이 온 세상을 덮고 있습니다. 인간의 탐욕에 의한 죽음이 난무하는 이런 세상에 생명의 번성을 소망하는 길은 없는 것일까요? 그 길은 생명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우리가 간절히 소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주님의 오심은 죽이고 멸망시키는 죄의 세력을 멸하고 세상을 살리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통하여 죽음으로 치닫는 세상을 생명으로 풍성케 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세상을 살리셨습니다. 죽음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 어떻게 생명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그 생명의 번성이 누구에 의해 확산되고 성취되는지 알려주셨습니다.

2017년 특새 기간 동안 묵상한 말씀이 갈라디아서2장20절입니다. 이 한 절은 성경 전체를 요약한 복음 중에 복음입니다. 오늘 성탄을 맞아 전하려는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14장6절을 통해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이 말씀은 오직 생명은 예수님께만 있고 그 생명을 몸에 담아 예수만 사시는 자만이 생명을 잉태하고 생명을 풍성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자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탄절은 이 생명의 주가 오셔서 죽음의 고통 속에 신음하는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날을 기념하면서 생명의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생명의 역사를 어떻게 일으키셨는지, 그리고 그 생명의 역사가 세상 가운데 어떻게 풍성하게 역사할 수 있는지 되새기는 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성탄예배를 드리는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한 사람이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변방에 작은 마을에 사는 아주 평범한 한 여인입니다. 그런데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마리아의 몸을 통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마리아의 몸을 통해 잉태한 예수님이 세상을 살리는 출발점이 될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메시아 오심을 기다리는 여인이었고 그 메시아가 오시면 어떤 일들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그녀는 이런 믿음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눅1:51)

예수의 오심은 분명 마리아가 이해한 것처럼, 가난하고 곤고한 백성들, 버림받아 소외되었던 사람들을 들어 올려 존귀하게 하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성탄은 교만하여 세상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그 모든 자들을 부서 버리고 죽음의 고통 속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소망의 날이 되었기에 온 인류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날입니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상을 예수의 생명으로 풍성하게 만드는 그 시발점이 비천한 여인 마리아였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리아가 자신의 몸에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기 위해서는 율법에 따라 죽음을 당할 수 있는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자신의 몸을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지는 도구로 하나님께 드립니다. 마리아는 하나님께 자신의 몸을 주기 위해서는 자기죽음이라는 희생을 대가로 지불해야만 했습니다.

그 선택은 마리아로 하여금 이 세상에 생명의 주가 오시는 통로가 되었고 그의 몸을 통해 잉태된 예수생명은 온 세상으로 확산되었고 더 풍성하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이 세상 모든 그리스도인을 상징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마리아의 태에 잉태하셨다는 것은 곧 이 세상 온 인류 가운데 잉태하셨다는 뜻입니다. 마리아 한 사람만이 아니다. 모든 인류가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온 인류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오신 사람의 아들입니다. 은혜를 입은 마리아의 태는 온 인류의 태입니다. 하나님이 온 인류와 함께 하시는 것이요, 성령이 온 인류에게 임하신 것이며,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세상을 덮으신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이제는 내 안에 예수가 사셨다는 것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잉태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몸은 마리아처럼 예수의 생명이 역사할 수 있는 자궁이 된 것입니다. 마리아처럼 우리도 어떤 환경 앞에서도, 죽음 앞에서도 그 어떤 희생을 감수하며 생명의 주를 모시는 거룩한 몸으로 산다면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 내 삶과 일본과 열방으로 확산되어 더 풍성케 될 것입니다.

 

말씀과 삶이 어우러지는 로고스라이프 교회

 

主なる御子は世を救うために来られました

人類の歴史は戦争の歴史だと言っても過言ではありません。その戦争は人類を死に追い込んだ殺戮(さつりく)の歴史です。人を死に追い込む死の勢力は、たった一度も休むことなく絶えず戦争ばかりか飢えと病いなどもあり、つねに人のいのちを脅かしています。

本来、死とは人間が避けられない運命なのですが、最近人間の死は自然死より人間の貪欲から始まった戦争、テロ、殺人などで死ぬ死の方が上回り、世を覆っています。では、人間の貪欲による死が溢れているこの世において、果たしていのちの繁栄を望める道はないのでしょうか。その道はいのちの主であるイエス・キリストがこの世に来られることです。イエスの臨在を私たちが切に望む理由は何でしょうか。

 “わたしが来たのは、羊がいのちを得、またそれを豊かに持つためです。”(ヨハネによる福音書10:10)

主が来られたのは死なせて滅亡させる罪の勢力を絶ち、世を救うためです。そして、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ている人たちを通して死に走っていく世をいのちで満たすためです。主はこの世に来られ、十字架で死なれ、世を救われました。死に支配されているこの世にどのようにいのちの働きを起こすことが出来るか、そして、これからいのちの繁栄がだれによって広がって成し遂げられるかを示してくださいました。

2017年特別早天祈祷会の期間中、黙想したみ言葉がガラテヤ人への手紙2章20節でした。この一節は聖書全体を要約したと言える福音(ふくいん)の精髄(せいずい)です。本日、クリスマスを迎へ、お分かちするみ言葉は“主の御子を信じる信仰”です。イエスはヨハネの福音書14章6節を通してご自身をこのように紹介されます。

“わたしが道であり、真理であり、だれひとり父のみもとに来ることはありません。”

このみ言葉である主に、ただいのちがあり、そのいのちを持って主だけが生きている者のみいのちを授かり、いのちを豊かにす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このように主の御子を信じる信仰で生きる者のみ主に向かって進めることが出来るとおっしゃいました。

クリスマスはこのいのちの主が来られて死の苦痛で嘆く世を救うために来られた日であり。それを記念していのちの主が世に来られていのちの働きをどのように起こられたか、そして、そのいのちの働きが世の中でどのように豊かに働かれたか、それを覚える日です。

そのような意味で本日クリスマス礼拝を捧げる私たちが注目すべき人はマリヤです。マリヤはガリラヤのナザレという地方の小さい町に住んでいた平凡な一人の女性でした。ところが、いのちの根源である主なる御子がマリヤの身を通して世に来られたのです。マリヤの身体に身ごもられたのが、イエスが世を救われる出発点に成れたのです。

 

マリヤはメシヤの臨在を待っていた女性であり、そのメシヤが来られたらどのようなことがこの世に行われるか彼女はこのように信仰の告白をしました。

“主(しゅ)は、御腕(みうで)をもって力強い(ちからづよ)わざをなし、心(こころ)の思い(おも)の高ぶって(たか)いる者(もの)を追い散らし、権力(けんりょく)ある者(もの)を王位(おうい)から引き降ろされます。低い(ひく)者(もの)を高く(たか)引き上げ、飢えた(う)者(もの)を良い(よ)もので満ち足らせ、富む(と)者(もの)を何(なに)も持たせないで(も)追い返されました。”(ルカの福音書1:51-53)

イエスの降臨は確かにマリヤが理解したように、乏しくて困り苦しむ民たち、捨てられてのけ者にされている人たちを引き上げて尊くしてくださった出来事です。ですから、クリスマスは高ぶって世を死に追い込んだすべての者たちを追い散らして、死の苦痛の中にいるすべての者たちに新しいいのちを与える希望の日になったので、人類が喜んで楽しむ日なのです。

ここで、大切なのは、世をイエスのいのちを通して豊かにするその出発点が卑しい女性であるマリヤだったということです。マリヤが自分の身に主の御子を身ごもるためには、律法による死が待ち構え、それへの恐れがある、決して容易くはない選択が伴っていました。ところが、マリヤは自分の身を主のみ言葉が成し遂げられる道具として主に捧げます。マリヤは主に自分の身を捧げるためには、死という犠牲を代価として払わ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この選択はマリヤによってこの世にいのちの主が来られる管になり、彼女の身を通して身ごもられたイエスのいのちは世に広がって豊かになりました。

マリヤはこの世ですべてのキリスト者を象徴する存在です。主の御子がマリヤの母胎に身ごもられたというのは、即ちこの世のすべての人類の中に身ごもられたということです。マリヤ一人だけではない、すべての人類が恵みを受けたのです。言いかえば、すべての人類が主の恵みの中でイエス・キリストを身ごもったのです。イエス・キリストはすべての人たちのために来られた人の子です。恵みを受けたマリヤの母胎は人類の母胎です。主がすべての人類とともにおられ、聖霊がすべての人類に臨まれ、いと高き方の力が世を覆われたことです。インマヌエルの歴史が始まったのです。

私たちがキリストと共に十字架で死に、もはや私のうちにイエスが生きておられるということは、私たちの内にキリストが身ごもられたということです私たちがキリスト者なら、私たちの身はマリヤのようにイエスのいのちが働く子宮になったのです。マリヤのように私たちもどのような環境にあっても、死の前でも、どのような犠牲があっても、いのちの主を迎える聖なる身で生きているなら、主の御子のいのちが私の人生と日本、そしてあらゆるところに広がってもっと豊かになるでしょう。

 

「み言葉(ことば)に生(い)きる」ロゴスライフ教会

[2017.1217] 인생의 수고와 짐은 주님만이 해결자입니다 主こそが人生の苦労と重荷の解決者です

인생의 수고와 짐은 주님만이 해결자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빈부격차를 떠나 모든 사람들에게 붙일 수 있는 보편적인 별명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일 것입니다. 그만큼 인생을 살면서 피할 수 없는 것 하나가 수고이며, 무거운 짐입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삶의 모든 수고와 피곤함이 환경의 문제라고 보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환경의 문제가 아닌 믿음의 문제라는데 있습니다. 세상의 수고스러움과 무거움은 믿음이 있는 자나 없는 자나 별 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하는 세상은 똑 같지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그것을 느끼는 우리의 마음이 전혀 달라집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을 때 세상은 우리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를 않습니다. 그 좋은 예가 다윗이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진심으로 믿었을 때 다윗 앞에 골리앗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은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을 사는 우리들에게 똑같이 적용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굳게 서 있으면 골리앗 같은 세상이 전혀 두렵지 않지만 그 믿음이 없으면 세상을 살면서 겪어야 하는 삶의 무게는 공포요 두려움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서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 수고와 무거운 짐이 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수고와 무거운 짐의 문제는 다분히 영적인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수고와 인생의 무거운 짐의 문제를 육신적인 수준에서 덜어 보거나 해결하려고 애를 쓴다는 데 있습니다. 인생의 수고와 무거운 짐의 문제는 세상과 사람이 해결할 수준의 것이 아닙니다. 삶의 수고와 고단함은 오직 하나님만이 해결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육체의 쉼을 진정한 쉼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근본적인 쉼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짓 쉼과 안식에 속아 열심히 쫓아다니지만 우리 삶의 수고는 그와 같은 쉼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은 한 우리의 고단한 삶의 순례는 절대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하나님이 인생의 수고와 짐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에게 쉼과 평안을 주시기 위하여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든 세상에서 참 평안과 안식을 얻으려면 세상과 씨름하지 말고 하나님과 씨름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인생의 고단함과 피곤함의 문제를 경제와 과학과 또는 환경을 개선하는 것으로 풀려고 합니다. 삶의 무게는 그와 같은 경제와 과학으로는 줄어들지도 해결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인생의 모든 짐을 해결자시기에 우리가 진정 힘써야 할 것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면 언제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과 평안이 삶에 넘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언제나 생명과 능력과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을 늘 가까이 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 법에 순종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기도의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는 참으로 쉽지 않고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원죄로 인해 말씀의 순종과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부담스러워 하고 말씀의 순종을 멍에로 생각하게끔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치명적인 착각이며 사탄의 속임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거운 짐이 아니며 부담스러움이 아닌 참 평안과 안식과 생명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은 무거 운 것이 아니로다.(요한일서5:3)

이 말씀을 꼭 믿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를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나를 죄에서 구원하여 참 자유를 주시고 영생과 평안을 주신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나의 계명을 지키라는 것은 곧 그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참된 쉼과 평안과 기쁨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지금 우리는 대림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대림절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며 고단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을 찾아오신 하나님의 긍휼이며, 사랑입니다.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며 그 순종은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그 길이 오히려 우리의 인생의 모든 짐을 가볍게 하는 생명의 길임을 믿고 더욱 주님을 찾고 구하는 자리로 더 깊이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主こそが人生の苦労と重荷の解決者です

 

世の中のすべての人に、地位や貧富の差を問わず、どんな人にも普遍的にみられる特徴は「苦労と重荷(おもに)を背負った者」であると考えます。それぐらい、人生の中で避けられないのが「苦労」であり、「重荷」ではないでしょうか。問題は、多くの人々がすべての苦労と重荷が環境のせいだと考えることです。しかし、人生の苦労と重荷は、環境ではなく、信仰の問題です。世の中の苦労や重荷は、信仰がある人と無い人で、差があるようには見えません。

しかし、我々を苦しめる世の中が同じでも、主に対する信仰の有無によって、それを感じる我々の心は、全く異なるのです。全能なる主の信仰がある時、世の中の問題は我々を苦しませるものではなくなります。その良い例がダビデです。全能なる主が共におられることを真心から信じた時、ダビデの前のゴリアテは、何の問題ではなくなりました。これは、世の中を生きる我々に、同様に用いられます。全能なる主への信仰が揺るぎないものになると、ゴリアテのような世の中も恐れるものはないです。しかし、信仰がない人にとって世の中を生きる重みは、恐怖と恐れ以外、何物でもないのです。

イエス様は「すべて重荷を負って苦労している者は、わたしのもとにきなさい。」 とおっしゃいます。ここでまず考えるべき事は、そもそも人生の苦労と重荷になった原因が何であるのかを探ることです。それは、人間の罪から始まります。ですから、人間の苦労と重荷の問題は、多分に霊的な問題である事がわかります。しかし、人々は、苦労と人生の重荷を自分自身(肉身のレベル)で減らそうとしたり、解決しようと試みます。人生の苦労と重荷の問題は、世間や人が解決できるものではないのです。それは、主のみが解決できます。大体の人々は、肉体の休ませることを「休み」と考えます。それは主が人間に与えてくださった元々の「休み」ではありません。多くの人が、偽りの休みと安息に騙されて、一生懸命求めても、私達の苦労は、それによって報われることはないのです。主に向かって、主の下に帰える事以外に我々の苦難は終える解決策がないのです。主は、人生の苦労と重荷を自らの力では解決することができない我々を憐れみ、我々に安息と平安を与えるために、人間の体をもってこの世に訪れてくださいました。なので、我々がこの厳しい世の中で真の安息と平安を得るためには、世の中で悩むのではなく、主の前で悩まなければなりません。

 

 

 

 

 

 

 

 

人々は、人生の苦労と疲れの問題を経済的に、科学的に、もしくは環境を改善することで、解決しようとします。しかし、人生の重荷は、このような経済的、科学的に減らすことはあっても、解決はできないのです。主のみ、人生のすべての重荷を解決できるため、我々が真に心得るべき事は、主と共にいることです。主が共におられると、いつも我々の人生が喜びと平安に満ち溢れるものになります。即ち、常に我々に命と能力と希望をくださる主と共にい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は、主と共にいるとはどんな事でしょうか。

それは、主の御言葉(おことば)とみ旨(むね)と戒め(いまし)に聞き従い生きることを意味します。主の御前で自分自身を伏せしめる事、主だけを頼りお祈りする事を意味します。

しかしそれは、我々にとって容易い事ではありません。なぜなら、我々は罪によって、御言葉を従い主に頼る事を心苦しく思い、御言葉に聞き従うことを「重り(おも)」と考えるようになったからです。しかし、それは我々の致命的な錯覚であり、サタンのまどわしであります。主の御言葉は、決して重荷ではなく、負担になるようなものではありません。それは、真の平安と安息であり、命なのです。

「神(かみ)を愛(あい)するとは、すなわち、その戒(いまし)めを守(まも)ることである。そして、その戒(いまし)めはむずかしいものではない」 (ヨハネへの第一の手紙5章3節)

この御言葉を、必ず心得てください。主は、我々を愛する方です。独り子を惜しまず、与えてくださっただけでなく、彼を十字架につけられ、私を罪から救ってくださり、真の自由と永遠の命と、平安をくださったのです。その主が、戒めを守るようにおっしゃるのは、その御言葉によって我々が真の安息と平安と喜びを抱くことを望まれるからです。

今私たちは、待降節を迎えております。待降節は、苦労と重荷を背負って苦しい人生を生きる人間を訪れてくださった、主の憐れみであり、愛です。その主の愛の道が、主の御言葉に聞き従うことであり、その聞き従いとは、決して重荷ではありません。かえって、私達の人生のすべての荷を軽くする、命の道であることを信じ、もっと主を求める場に、もっと深く進まれることを望み祝福します。

[2017.1210] 나는 누구인가? 今は祈る時です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해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거울에 비치는 자기 모습을 보면서 그것이 자기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각자 자기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부르면 돌아다보고 대답합니다. 불러지는 이름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자기의 소유를 가지고 삽니다. 재산, 명예, 가족, 학벌 등등의 소유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도 이 비슷한 경험을 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모세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 곧 애굽 사람의 노예로 태어납니다. 그러나 어려서 공주의 양자가 됩니다. 그리고 40세가 될 때까지 왕자로 자라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살인자가 되어 도망하여 그는 40년 동안 들에서 양을 치는 목자로 삽니다. 그가 다시 나머지 40년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보내게 됩니다. 모세는 왕자로 자라는 그 과정 속에 왕자가 곧 자신인줄 알았을 것입니다. 40년 동안 양을 치면서 그 모습 곧 자신이 누구인지를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이런 환경의 변화에 따라 자신의 존재를 판단하며 살았기에 혼란과 방황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80년의 세월을 보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은 모세에게 찾아오셨고 그를 부르십니다. 하나님을 대면한 모세가 하나님께 질문을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3:11)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의 그 질문에 대해 “네가 누구이다.”라고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누구냐“는 인간 스스로 찾을 수 없는 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인간을 지으신 창조주만이 주실 수 있는 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대답은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3:12)

동문서답처럼 들리는 대답입니다. 그러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라는 자의식, 하나님이 내 안에 살아계신 존재라는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만이 진정한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함께 다시 산 자가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항상 하나님이 산 자로의 인생을 살게 되자 볼 잘 것 없었던 80세 노인의 인생은 온전히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도구, 하나님의 사람으로 생명의 거룩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사도바울도 그리스도를 다메섹 선상에서 만나기 전까지는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자신의 손에 쥐고 있는 세상의 근거들이 곧 자신을 말해주는 것인지 알았습니다. 그를 찾아오신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이젠 그리스도만 사시는 자가 즉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자가 되었다는 이 놀라운 비밀을 깨닫고 믿음을 갖게 되는 순간 삶의 중요한 변화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의에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라.”( 6:11).

바울은 자신 안에는 그리스도가 사셨고 그의 생명이 넘치는 자임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 그리스도는 내 밖의 어떤 존재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내 속에 들어왔고 내 속에서 살아계시는 주이심을 날마다 인정하며 항상 주님이 함께 하시는 자로, 주님이 전부인 자로 살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 때 바울은 주님을 닮은 주님의 인격을 닮은 자가 되었고, 성령 충만한 바울의 삶은 어느 덧 원수까지도 용납하고 사랑하는 진정한 그리스도가 산 자의 인생을 산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성경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은 자“라고 말씀합니다. 죽은 사람은 모든 것이 그칩니다. 나쁜 성질이 그치고, 나쁜 습관도 그칩니다. 병도 그칩니다. 죄도 그칩니다. 모든 저주도 그칩니다. 이것이 성도의 정체성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노력하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성경의 이어진 또 하나의 대답은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오직 내 안에 계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인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것은 세상의 경험도 지식도, 세상으로 연결된 그 어떤 것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전부인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고 함께 할 뿐입니다. 모든 삶이 주님과 항상 함께 보고 느끼고 교제하면 일상의 모든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다“에서 “내 안에 그리스도가 하신다.”라고 인생의 진정한 주인이 나에서 그리스도로 바뀌는 것입니다.

대림절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가 누구인지 그 정체성을 정확히 일깨워주기 위함입니다. 더 나아가 내가 그리스도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 자”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어떤 인생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친히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사랑의 열매를 맺는 삶이며, 그의 능력으로 세상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사탄의 역사를 무너뜨리고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생명의 도구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삶의 열매를 맺는 것이 참 나의 모습입니다.

今は祈る時です

人間が作ったものは、どのようなものであれ、限界があり、弱点があります。ですから、私たちはこのような事実を常に認識して主の前で自分を低くしてへりくだり、主の恵みで生きる存在です。主の前でへりくだって恵みを求めるのは、ひざまずいて祈ることです。多くの信徒が怠って若しくは時間がなくて祈ることができないと言います。私はこの言葉に同意できません。私たちが祈らない理由は驕り高ぶっているからではないでしょうか。

私たちが一瞬も主の恵みがなくては生きられない存在だと信じていれば、祈りは選択の問題ではなく生存の問題であることを知っているため、決して祈ることを諦めたりはしません。私たちが祈らない理由は、意識であれ無意識であれ、主以外に頼れるものがあるからです。だからこそ、へりくだっているキリスト者は祈りの場を決して離れません。ジャン・バニヤンは“祈りは魂の盾です。祈りは主に捧げる宝物です。祈りはサタンに振り回す鞭です。”と言い、祈りの生活を営みました。

主を信じている民にとって祈りは呼吸に値して命と直ちにつながる最も重要な問題です。祈りは信徒がこの世で味わう最高の祝福であり、力です。何故なら、主は祈る者を通して歴史を率いられ、主の御業に必要なすべてを与えてくださるからです。

最近、本教会ではエステル記を黙想しています。エステル記は主の巨大な歴史の中で、個人の歴史と共同体の歴史をどのように治めてくださるかをドラマチックに見せてくれます。何が一人の人生をあんなにドラマチックにして偉大にしてくださるのか、そして、死の前に立っているユダの共同体を再び生かしてペルシヤ人が捕虜であったユダヤ人が信じている主を信じるようになる驚くべきことがどのように可能であったかを教えてくれます。

イスラエルは歴史的に主の救いの恵みを二回経験しました。一つはイスラエルの歴史の中で最も大切な日である過越しの祭りであり、もう一つはエステル記に記録されているプリムの日です。面白いことは、プリムの日と過越しの祭りの時期がアビブの月の十四日で同じ日に定められたということです。歴史を治める主が二つの大切な日をこのように絶妙に同じ時期に繋がれた理由は何でしょうか。過越しの祭りはイスラエルの民たちが出エジプトする過程で行われた救いです。この過程においてイスラエルはどのような労苦も努力もしていません。ただ主の絶対主権の下で対価なし恵みで与えられたことです。これを記念してイスラエルは毎年アビブの月の十四日を過越しの祭りに定められて守っているのです。

イスラエルの歴史の過程でもう一回与えられた救いの恵みがプリムの日です。このプリムの日は主の民たちの人生はただ全能である主が治められていることを信じ、ただ主だけが救い主であり、すべてを担って下さる方であるのを信じてただ御言葉に聞き従う道を歩む者であることを示します。

 

 

 

 

 

 

 

 

 

 

エステル記の歴史の背景は、当時ペルシヤの総理になったハマンがイスラエル民を滅ぼす計画を立てて王の許しを得て全国にその事実を布告し、ユダヤ人たちが滅ぼされる危機に陥ったところです。その時、ユダヤ人を救われる主の歴史が記録されています。この過程において主は二人の人物に注目されて、彼らを通して救いの歴史を成し遂げられます。

 “モルデカイは、なされたすべてのことを知った。すると、モルデカイは着物を引き裂き、荒布をまとい、灰をかぶり、大声でひどくわめき叫びながら町の真ん中に出て行き、”(エステル記4:1)
ここで、モルデカイは祈っているのです。そして、モルデカイの下で育てられたエステルは当時王妃でした。エステルはモルデカイからユダヤ人が陥った状況を聞いてこのような態度をとります。

“行って、シュシャンにいるユダヤ人をみな集め、私のために断食をしてください。三日三晩、食べたり飲んだりしないように。私も、私の侍女たちも、同じように断食をしましょう。たとい法令にそむいても私は王のところへまいります。私は、死な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したら、死にます。”(エステル記4:16)

エステルも主に祈るのです。この二人が民族の危機の前で取った選択は、主を求めて祈ることでした。彼らには利己主義も理性的な判断も自分の幸せを追う気持ちもありません。ただ、自分を棄ててすべての歴史を治められる方である主を仰いで頼るという信仰だけがあるのです。

彼らが断食しながら叫ぶ祈りは、主以外に他のものを頼ることはしないという徹底した自己否認です。モルデカイとエステルがこのような道を歩むことができたのは、主だけを人生の中心としたからです。モルデカイとエステルがこのような道を歩むことができたのは、祈りを通して聖霊に満たされていたからです。だからこそ、モルデカイとエステルは当時捕虜であった身分にもかかわらず、ユダヤ人の危機を自分の問題にして命を懸けた祈りをすることができました。このような信仰は、異邦の地で主の恵みと力の管になり、主の救いの聖なる道具になり、生きておられる主が歴史のあるじであることを現す証人になるようにしたのです。

今の時代を生きている私たちが是非覚えてほしいのは、義人は私のために死なれ、再びよみがえられた天の父なる主の御子イエス・キリストだけを信じる信仰によって生きる者です。私たちは、イエス・キリストだけが私たちを救われる唯一の方であることをこの歴史の舞台で、この日本の地で、そして、今生活している場で証しする証人です。このような素晴らしい人生を生きることを願います。モルデカイとエステルのように十字架だけが誇りと力になる人生を主がどのように救いの働きを起こしてくださるか経験する主人公になることを願います。

[2017.1203] 예수님의 오심은 의를 이 땅에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イエス様のご臨在は、義をこの世に成し遂げるためです

예수님의 오심은 의를 이 땅에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삶의 불행을 돈과 권력, 명예 등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불행을 세상 나라의 것들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우리는 결코 속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의 불행의 원인이 세상 나라의 것들을 소유의 유무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상실에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삶속에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면 우리는 초막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높은 산과 거친 들에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삶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으면 우리는 궁궐에 살아도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를 위해 세상 나라를 주시기 위함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왜 주님께서 이토록 하나님나라에 집착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를 위함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만이 이 세상은 진정한 평화가 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고자 했던 그 하나님나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하나님께서는 의로 통치되는 하나님나라를 통해 평강과 희락으로 가득한 새로운 세상으로 우리들에게 주시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지난 주간 에스더서가 끝나고 시편97편을 묵상하면서 제 시선을 고정시킨 것이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자 하나님께서 그토록 세우려하시는 나라입니다.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반드시 회복하고 싶으신 나라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한 모든 인간에게 꼭 주고 싶고 누리게 하고 싶은 나라였다는 것을 알고 다시 한 번 아브라함의 부르심에 대해 묵상을 했습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18:19)

성경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식과 그의 속한 권속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은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여호와의 도’를 지키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도’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걸어가는 길’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함께 자신의 걸어가는 그 길을 걷기 위해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걸어가고 계신 그 길이 어떤 길입니까? 이어진 말씀이 ‘의와 공도를 행하며 걸어가시는 길’입니다. 시편971-2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구름과 흑암이 그를 둘렀고 의와 공평이 그의 보좌의 기초로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는 그 기준과 기초가 바로 의(쯔다카)와 공도(미쉬파트)였습니다. ‘의’라고 말하는 ‘쯔다카’는 법을 말하는 것보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공도(公道)’란 ‘모든 사람이 행하는 올바른 도리’를 말하는 것으로 공도로 번역된 미쉬파트는 서로가 서로를 형제로 대우하는 것으로 차별이 없는 사랑과 인간다운 대우를 하는 모습을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하신 ‘아브라함과 그 후손의 하나님이 되겠다.’는 약속은 곧 아브라함의 후손이 이룰 나라로서 의와 공도의 기초 위에 세워질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나라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구원하신 궁극적인 목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목적은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처럼 주님께서 걸어가신 것처럼 하나님과 함께 의와 공도의 길을 걸어가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중심이 되는 삶 즉 그의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의 계명을 지키는 삶은 도대체 어떤 삶입니까?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요일3:23)

여기서 ‘그의 계명’을 이렇게 바꿀 수가 있습니다. ‘그의 도’ 즉 하나님께서 우리와 걸어가시길 원하신 그 길은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즉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인생의 주가 되게 하고 그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십자가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삶의 모습이 어떤 모습입니까?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6-18)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공도가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세우신 하나님 나라는 죄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신 십자가사랑으로 이루어 나라로서 말과 혀로만이 아닌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으로 이루어집니다.

イエス様のご臨在は、義をこの世に成し遂げるためです

 

主を知らない人達は、不幸の理由をお金と権力と名誉を所有できなかったからだと思います。「人生の不幸は、世の中の物を自分の物にできなかったからだ。」これを皆さんはどう思われますか。我々は騙されてはいけません。人間の不幸の原因は、世の中の所有物の有無でなく、主の御国を失ったからなのです。我々の心と考えと暮らしの中に、真の御国の回復があるのならば、藁葺(わらぶき)小屋の中でも幸せに暮らすことができます。深い山の中や荒れた野原でも幸せになれます。しかし、我々の心と考えと暮らしの中に主の御国が失われると、宮殿の中の暮らしも不幸になるのです。イエス様がこの世に人間の身になって来られた目的は、我々のために世の中をくださるためではなく、御国をくださるためでした。

なぜ主は、これほど御国を強調されるのでしょうか。それは我々のためなのです。

御国を頂くことで、この世のまことの平和が訪れるからです。では、主がくださる御国とは、なんでしょうか。

「神(かみ)の国(くに)飲食(いんしょく)ではなく、義(ぎ)と、平和(へいわ)と、聖霊(せいれい)における喜(よろこ)びとである。」

ローマ人への手紙14章17節

主は、義によって治められる御国をとおして、平和と喜びに満ち溢れる新しい世の中を我々にくださることを望んでおられます。先週、エステル記の黙想を終えて詩編97編を黙想しながら、私の視線を固定させたのが、主の「御国」でした。御国は主がこの世を創られた目的であり、主があれほど建てようをする国です。独り子を捧げてでも必ず回復させようとした国です。何より主が自らの姿でお創りになった人間に、なんとしても与えて暮らしてほしい国だという事を気づき、改めてアブラハムをお召しになったことを黙想しました。

「わたしは彼(かれ)が後(のち)の子(こ)らと家族(かぞく)とに命(めい)じ主(しゅ)の道(みち)を守(まも)り、正義(せいぎ)と公道(こうどう)とを行(おこな)わせるために彼(かれ)を知(し)ったのである。これは主(しゅ)がかつてアブラハムについて言(い)った事(こと)を彼(かれ)の上(うえ)に臨(のぞ)ませるためである。」                        創世記18章19節

聖書は、アブラハムとその子孫と彼の家族に向かって主に召された目的は、「主の道を守らせ、義と公道を行わせるために彼を選ばれた」と記しています。

主は、アブラハムに「主の道」を守らせたのです。「主の道」とは「主が歩む道」です。つまり主は、アブラハムと一緒に歩くその道を歩ませるためにお召しになったのです。主の歩む道は、どんな道でしょうか。続く御言葉が、「義と公道を行って歩む道」です。詩編97編1節-2節にこう記されています。

主(しゅ)は王(おう)となられた。地(ち)は楽(たの)しみ、海(うみ)に沿(そ)った多(おお)くの国々(くにぐに)は喜(よろこ)べ。雲(くも)と暗(くら)やみとはそのまわりにあり、義(ぎ)と公道(こうどう)とはそのみくらの基(もとい)である。」      詩編97編1節-2節

主がこの世を治めるその基準と基が、義(ツタカ)と公道(ミシュパト)です。「義」と訳される「ツタカ」は、法を意味するよりも「主との正しい関係」を意味します。「公道」とは、「すべての人の正しい道理」を意味し、公道と訳された「ミシュパト」「互いに兄弟とみなし、差別のない愛と人間らしい待遇を施す姿」を表す単語です。

主がアブラハムと交わされた「アブラハムとその子孫の主になる」という約束は、即ちアブラハムの子孫が成す国が、義と公道を基とし建てられ、揺らぐことのない御国であることを意味します。これが、主がアブラハムをお召しになり、イエス・キリストを通してアブラハムの子孫をお救いになった目的なのです。

それでは、今、私たちに向けて主がお召しなる目的は何でしょうか。その目的は、アブラハムをお召しになったように、主が歩んだ主と共にする義と公道の道を歩むことを望まれるからです。主の義であるイエスキリストだけが中心となり、その教えを守って生きることです。

その教えを守って生きることは、どんなことでしょうか。

その戒(いまし)めというのは、神(かみ)の子(こ)イエス・キリストの御名(みな)を信(しん)じ、わたしたちに命(めい)じられたように、互(たがい)に愛(あい)し合(あ)うべきことである。」       ヨハネの第一の手紙3章23節

ここで「その戒め」は、「その道」に代える事ができます。即ち主が我々と歩むことを望まれたその道を、主の義であられる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イエスキリストが我々の人生の主になって、その御子を通して我々に教えてくださった十字架の愛で、お互いに愛しながら生きようとおっしゃっています。お互いに愛する姿はどんな姿でしょうか。

主(しゅ)は、わたしたちのためにいのちを捨(す)てて下(くだ)さった。それによって、わたしたちは愛(あい)ということを知(し)った。それゆえに、わたしたちもまた、兄弟(きょうだい)のためにいのちを捨(す)てるべきである。世(よ)の富(とみ)を持(も)っていながら、兄弟(きょうだい)が困(こま)っているのを見て、あわれみの心(こころ)を閉(と)じる者(もの)には、どうして神(かみ)の愛(あい)が、彼(かれ)のうちにあろうか。子たちよ。わたしたちは言葉(ことば)や口先(くちさき)だけで愛(あい)するのではなく、行(おこな)いと真実(しんじつ)をもって愛(あい)し合(あ)おうではないか。」

ヨハネの第一の手紙3章16節-18節

御国は義と公道によって治められる国です。イエスキリストがこの世に来られ建てられた御国は、罪人のために自らの命を捧げた十字架の愛で成し遂げられた国であり、言葉と口先だけではなく互いに自分を捧げる愛によって建てられます。

 

[2017.1126] 지금은 우리도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今は祈る時です

지금은 우리도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인간이 만든 그 어떤 것이든 한계가 있고 약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사실을 항상 인지하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겸손히 낮추고 은혜를 구하는 것은 바로 기도의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흔히 성도들이 게을러서 또는 시간이 없어 기도를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저는 그 말에 동의를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한 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기도는 선택의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라는 사실 알기에 결코 기도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하나님 외에 믿을 만한 구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그리스도인은 기도의 자리를 결코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존 번연은 기도는 내 영혼의 방패요.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재물이요. 기도는 사탄을 향해 휘두르는 채찍이다.”라고 말했고 그는 기도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에게 기도는 호흡으로 생명과 직결되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기도는 성도가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축복이자 능력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를 통하여 역사를 이끌어 가시며, 그 일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기 때문입니다.

요사이 우리교회는 에스더서를 묵상을 하고 있습니다. 에스더서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 속에 개인의 역사와 공동체의 역사를 어떻게 섭리하시는지 드라마틱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엇이 한 개인의 인생을 그렇게 드라마틱하게 하며 위대하게 만들 수 있는지, 그리고 죽음 앞에 서 있는 유다 공동체를 다시 살려내시고 페르시아 사람들이 자신들의 포로였던 유다인들이 믿는 하나님을 믿는 이 놀라운 일들이 어떻게 가능하였는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두 번 경험하게 되는데 하나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절기 유월절이고 또 하나가 에스더서에서 기록하고 있는 부림절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부림절과 유월절의 시기가 아비달 십사일로 같은 날에 지킨다는 점입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두 절기를 이렇게 절묘하게 같은 시기로 연결시킨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는 과정에서 이루진 구원입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의 그 어떤 수고와 노력이 있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절대주권으로 주어진 값없는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기념하여 이스라엘 매년마다 아비달 십사일에 유월절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과정에서 또 한 번 주어진 구원의 은혜가 바로 부림절입니다. 이 부림절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든 삶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음을 믿고 오직 하나님만이 구원자시며, 모든 삶을 책임져 주시는 분임을 온전히 믿고 오직 말씀만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함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에스더서의 역사적 배경은 페르시아의 총리가 된 하만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살 계획을 세워 왕의 허락을 받아 전국에 공포하므로 유대인들이 진멸을 당할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그때 유대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두 인물을 주목하셨고 그들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모르드개가 이 모든 일을 알고 자기의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성중에 나가서 대성통곡하며” 즉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4:1)

그리고 모르드개로부터 양육을 받아 자란 에스더는 당시 왕후였습니다. 에스더는 모르드개로부터 유대인들이 처한 상황을 들고 그 또한 이런 태도를 취합니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4:16)

에스더 또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민족의 위기 앞에서 선택은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기도의 자리였습니다. 그들 안에는 이기주의도, 이성적 판단도, 자신만을 위한 행복을 추구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다만 자신을 버리고 오직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만을 바라고 의지하겠다는 믿음만이 작동되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이 금식하며 부르짖는 기도는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겠다는 철저한 자기부인입니다.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그런 삶을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만을 삶의 중심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기도를 통해 성령 충만을 힘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당시 포로의 신분임에도, 유대인들의 위기를 끌어안고 목숨 건 기도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런 믿음의 삶은 그 이방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통로가 되어 하나님의 구원의 거룩한 도구가 되었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들어내는 증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오직 의인은 나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하는 유일한 분임을 우리들은 이 역사의 무대에서, 이 일본 땅에서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일터에서 증명해 보이는 증인들이어야 합니다. 이런 멋진 인생을 꼭 살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모르드개와 에스더처럼 십자가만을 인생의 자랑과 힘으로 삼고 살아가는 그 인생 앞에 하나님께 어떤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시는지 그 주인공이 꼭 되었으면 합니다..

 

今は祈る時です

人間が作ったものは、どのようなものであれ、限界があり、弱点があります。ですから、私たちはこのような事実を常に認識して主の前で自分を低くしてへりくだり、主の恵みで生きる存在です。主の前でへりくだって恵みを求めるのは、ひざまずいて祈ることです。多くの信徒が怠って若しくは時間がなくて祈ることができないと言います。私はこの言葉に同意できません。私たちが祈らない理由は驕り高ぶっているからではないでしょうか。

私たちが一瞬も主の恵みがなくては生きられない存在だと信じていれば、祈りは選択の問題ではなく生存の問題であることを知っているため、決して祈ることを諦めたりはしません。私たちが祈らない理由は、意識であれ無意識であれ、主以外に頼れるものがあるからです。だからこそ、へりくだっているキリスト者は祈りの場を決して離れません。ジャン・バニヤンは“祈りは魂の盾です。祈りは主に捧げる宝物です。祈りはサタンに振り回す鞭です。”と言い、祈りの生活を営みました。

主を信じている民にとって祈りは呼吸に値して命と直ちにつながる最も重要な問題です。祈りは信徒がこの世で味わう最高の祝福であり、力です。何故なら、主は祈る者を通して歴史を率いられ、主の御業に必要なすべてを与えてくださるからです。

最近、本教会ではエステル記を黙想しています。エステル記は主の巨大な歴史の中で、個人の歴史と共同体の歴史をどのように治めてくださるかをドラマチックに見せてくれます。何が一人の人生をあんなにドラマチックにして偉大にしてくださるのか、そして、死の前に立っているユダの共同体を再び生かしてペルシヤ人が捕虜であったユダヤ人が信じている主を信じるようになる驚くべきことがどのように可能であったかを教えてくれます。

イスラエルは歴史的に主の救いの恵みを二回経験しました。一つはイスラエルの歴史の中で最も大切な日である過越しの祭りであり、もう一つはエステル記に記録されているプリムの日です。面白いことは、プリムの日と過越しの祭りの時期がアビブの月の十四日で同じ日に定められたということです。歴史を治める主が二つの大切な日をこのように絶妙に同じ時期に繋がれた理由は何でしょうか。過越しの祭りはイスラエルの民たちが出エジプトする過程で行われた救いです。この過程においてイスラエルはどのような労苦も努力もしていません。ただ主の絶対主権の下で対価なし恵みで与えられたことです。これを記念してイスラエルは毎年アビブの月の十四日を過越しの祭りに定められて守っているのです。

イスラエルの歴史の過程でもう一回与えられた救いの恵みがプリムの日です。このプリムの日は主の民たちの人生はただ全能である主が治められていることを信じ、ただ主だけが救い主であり、すべてを担って下さる方であるのを信じてただ御言葉に聞き従う道を歩む者であることを示します。

 

 

 

 

 

 

 

 

 

 

エステル記の歴史の背景は、当時ペルシヤの総理になったハマンがイスラエル民を滅ぼす計画を立てて王の許しを得て全国にその事実を布告し、ユダヤ人たちが滅ぼされる危機に陥ったところです。その時、ユダヤ人を救われる主の歴史が記録されています。この過程において主は二人の人物に注目されて、彼らを通して救いの歴史を成し遂げられます。

 “モルデカイは、なされたすべてのことを知った。すると、モルデカイは着物を引き裂き、荒布をまとい、灰をかぶり、大声でひどくわめき叫びながら町の真ん中に出て行き、”(エステル記4:1)
ここで、モルデカイは祈っているのです。そして、モルデカイの下で育てられたエステルは当時王妃でした。エステルはモルデカイからユダヤ人が陥った状況を聞いてこのような態度をとります。

“行って、シュシャンにいるユダヤ人をみな集め、私のために断食をしてください。三日三晩、食べたり飲んだりしないように。私も、私の侍女たちも、同じように断食をしましょう。たとい法令にそむいても私は王のところへまいります。私は、死な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したら、死にます。”(エステル記4:16)

エステルも主に祈るのです。この二人が民族の危機の前で取った選択は、主を求めて祈ることでした。彼らには利己主義も理性的な判断も自分の幸せを追う気持ちもありません。ただ、自分を棄ててすべての歴史を治められる方である主を仰いで頼るという信仰だけがあるのです。

彼らが断食しながら叫ぶ祈りは、主以外に他のものを頼ることはしないという徹底した自己否認です。モルデカイとエステルがこのような道を歩むことができたのは、主だけを人生の中心としたからです。モルデカイとエステルがこのような道を歩むことができたのは、祈りを通して聖霊に満たされていたからです。だからこそ、モルデカイとエステルは当時捕虜であった身分にもかかわらず、ユダヤ人の危機を自分の問題にして命を懸けた祈りをすることができました。このような信仰は、異邦の地で主の恵みと力の管になり、主の救いの聖なる道具になり、生きておられる主が歴史のあるじであることを現す証人になるようにしたのです。

今の時代を生きている私たちが是非覚えてほしいのは、義人は私のために死なれ、再びよみがえられた天の父なる主の御子イエス・キリストだけを信じる信仰によって生きる者です。私たちは、イエス・キリストだけが私たちを救われる唯一の方であることをこの歴史の舞台で、この日本の地で、そして、今生活している場で証しする証人です。このような素晴らしい人生を生きることを願います。モルデカイとエステルのように十字架だけが誇りと力になる人生を主がどのように救いの働きを起こしてくださるか経験する主人公になることを願います。

[2017.1119] 남충성 선교사 ‘우리가 받은 영적인 복’ 장원규 목사 ‘한 해에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감사하라!’ ナム・チュンソン 宣教師 「 賜った霊的祝福 」  チャン・ウォンギュ牧師「今年、主が行った奇跡を感謝せよ!」

[2017.1119] 남충성 선교사 ‘우리가 받은 영적인 복’ 

장원규 목사 ‘한 해에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감사하라!’ 

 

에스라3장에서 보면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절기를 지키도록 한 것이 초막절 즉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절기에 담긴 영적 의미를 바르게 깨닫고 살아갈 때 복된 삶을 사는 중요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절기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속의 은혜와 하나님의 백성다움의 회복 그리고 약속의 땅에 들어감이라는 하나님나라의 완성의 핵심인 예수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예수그리스도로 충만한 삶은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시편107편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찬양과 감사의 고백입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앞에 어떤 악한 상황을 만나도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가 바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의 증명이자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 광야를 걸어가는 우리를 향해 바라시는 것이 바로 이 믿음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일하시는 근거입니다. 인생사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그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문제는 곧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문제입니다.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그의 능력 안에서 거룩한 생존의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의 인생은 마침내 약속의 땅에 이르는 것입니다. 2017년 가운데 동일하게 역사하셨던 그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며,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인생 여정 또한 항상 함께 하셔서 역사하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굳게 세우는 이 시간이 되길 하나님께선 원하십니다. 시편107편에 소개되고 있는 삶의 현장은 어떤 모습이었고 그런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이었습니까?

첫째는 광야에서 방황할 때였습니다.(107:4)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했다는 말씀은 삶의 안정을 찾을 수 없는 늘 불안한 가운데 삶의 모습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기본 욕구는 안정감입니다.

우리 가운데 지나간 일 년을 돌이켜 볼 때 ‘마치 광야의 사막 길의 방황과도 같았다.’ 이런 느낌을 갖는 분들이 아마도 있었을 것입니다. 삶의 안정을 위해 직업을 찾아 방황했던 한 해를 보냈던 분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이러했습니다.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7)

둘째는 죄의 사슬에 속박되었을 때였습니다.(107:10)

이스라엘 백성들의 70년의 바벨론 포로생활 그 자체는 사슬에 묶여 있는 삶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이런 사슬에 묶이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죄 때문이었습니다. 이 죄의 사슬의 고통은 다른 사람이 만들어 준 사슬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나의 어리석은 결정이, 나의 과오가, 나의 죄가, 내 잘못된 부도덕한 결정이 만든 사슬이었습니다. 그러나 죄악의 사슬에 묶여 죄의 종노릇 하는 절망적 삶을 살 때 하나님의 은혜는 이러했습니다. 14절입니다.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 얽은 줄을 끊으셨도다.

셋째로 질병으로 죽게 되었을 때입니다.(107:18)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병을 얻고 식욕을 상실하고 음식조차 먹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이제 거의 죽음을 느끼고 죽음의 문턱 앞에 도달한 모습을 발견 합니다. 식욕을 잃어버릴 정도의 심각한 질병에 빠져 죽음의 문턱 앞에 도달한 그 순간 하나님의 은혜는 이러했습니다.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20)

넷째로 풍랑을 만났을 때입니다.(107:25)

인생을 살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깊은 풍랑 속에, 바다의 한 복판 속에 빠져서 어쩔 줄 모르고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인생의 풍랑의 순간들을 맞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위기 가운데 처하자 이런 절망적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이렇게 역사했습니다.

“그들이 이리 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그들의 모든 지각이 혼돈 속에 빠지는도다.”(27)

이것이 우리가 살아온 한 해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가 걸어 온 지나 인생은 누군가에게 사막과 같은 고통이었고, 감옥과 같은 고통이었고, 병상의 고통이었고, 폭풍을 만난 고통이었습니다. 그런 오늘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있다는 겁니다. 물론 아직도 그 고통이 진행 중이 분들로 있겠지만 어제 죽을 것 같은 그 고통에서 오늘 우리는 이 은혜의 자리에 이렇게 함께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포로에서 돌아와 고향에 왔지만 모든 것이 황폐된 그 땅에 내일이 전혀 보장 되어 있지 않는 그 현실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편107편1절을 통해 이런 결론의 고백과 선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도 사막에서, 감옥에서, 병상에서, 폭풍이 이는 바다에서 나올 수 없는 그 절망과 두려움 속에서 건져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라는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이 지금 이곳에 계시는 것입니다.’

추수감사절은 지금까지 걸어온 삶이 어떤 삶이었는지를 돌아보는 시간이며, 지금 이 순간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시간입니다. 더 나아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삶의 좌표를 수정하고 새로운 결단과 마음가짐을 가지고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시간을 갖는 것이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중요한 의미임을 기억하고 오늘 이 예배를 통해 새로운 마음의 결단을 가지고 주님의 손을 잡고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는 복된 시간이 되길 축원합니다.

 

 

ナム・チュンソン 宣教師 「 賜った霊的祝福 」  チャン・ウォンギュ牧師「今年、主が行った奇跡を感謝せよ!」

 

エズラ3章を見ると捕虜から帰ってきたイスラエルの民が最初にすべきことは例祭を守る事、仮庵の祭り、すなわち感謝祭を守ることでした。例祭に込められた霊的な意味を正しく悟って生きていくことが幸いを生きる重要な道だからです。

例祭は主が与えた“救いの恵みと主の民としての回復”そして“約束の地へ入る”という主の御国の完成の核心であるイエス・キリストの影です。イエス・キリストで充ちることこそ荒野を生きる全てのキリスト人の人生です。

詩編107編はバビロン捕囚生活を終えて帰ってきたイスラエルの民の讃美と感謝の告白です。バビロン捕囚生活を終えて本国に帰ってきたイスラエルの民が神に讃美と感謝することは、決して簡単なこと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 しかし、私たちの前にどのような悪状況に会ってもどのような態度をとるのかがすぐに主への私たちの信仰の証明であり、実です。主が荒野を歩いてる私たちに向かっておられるのが、まさにこの信仰の実だからです。信仰は、主が具体的に働かれる根拠です。 人生のすべての問題は、主が働けばすべての問題が解決されます。だから、人生の問題は、すなわち主への信仰の問題です。信仰の主である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主の能力の中で聖なる生活をすれば、私たちの人生は、最終的に約束の地に至ることになります。2017年の中で同じように働いたその主の恵みを讃美し、これから生きて行かなければなら人生の旅も常に一緒におられる主への信仰を丈夫に立てる時間になることを主は望んでおられます。詩篇107篇に紹介されている生活の現場はどのような姿であり、それの中で主の恵みは何でしたか?

 

一つ目は荒野で道を迷う時です。(詩編107:4)

砂漠の道をさまよって泊まる場所見つけなかったの御言葉は、人生の安定を見つけることができない、常に不安な中で生活の様子を語っているのです。人の基本的な欲求は安定感です。

私たちの過ぎ去った今年を振り返ってみると「まるで荒野の砂漠の道のさまよいのようだ。」こんな感じを持つ方が、おそらくあったと思います。生活の安定のために仕事を探してさまよっていた一年を送った方があったでしょう。ところが、生きておられる主の導きは下記のようでした。

“また彼らをまっすぐな道に導き、住むべき町へ行かせられた。”(7節)

 

二つ目は罪のに縛られた時です。(詩編107:10)

イスラエルの民の70年間のバビロン捕囚生活そのものは鎖に縛られている生活でした。イスラエルの民がなぜこのような鎖に縛られたのでしょうか?それは罪のせいでした。この罪の鎖の痛みは、他の人が作ってくれた鎖ではなく、自分で作った私の愚かな決定が、私の間違いが、私の罪が、私の誤った不道徳な決定が作った鎖でした。しかし、罪の鎖に縛られて、罪の奴隷になっている絶望的生活をする時、主の恵みは下記のようでした。14節です。

“主は彼らをやみと死の陰から連れ出し、彼らのかせを打ちかれた。”

 

 

 

 

 

三つ目、病で死ぬことになった時です。(詩編107:18)

私たちが人生を生きる時、病気を得て、食欲を失い、食糧さえ食べることができない状況の中で、今ではほとんどの死を感じ死の顎前に到達した姿を発見します。食欲を失ってしまうほどの深刻な病気に陥った死の顎前に到達したその瞬間、主の恵みはこう注がれました。

“主はみことばを送って彼らをいやし、その滅びの穴から彼らを助け出された。” (20節)

 

四つ目、嵐に出会った時です。(詩編107:25)

人生を生きていると、ある日突然、深い暴風の中、海の真ん中の中抜け仕方を知らず、何もできない、暴風の瞬間を迎えることがあります。このような危機の中、絶望的状況にまで至りますが、主の恵みは、このように働きました。

“彼らはった人のようによろめき、ふらついて分別がれた。(27節)

これは我々が生きてきた一年の様子でした。私たちが歩いてきた人生は誰かには砂漠のような痛みであり、刑務所のような痛みであり、病の痛みであり、嵐にった痛みでした。そんな今日は、今この場にあることでしょう。もちろん、まだその痛みが進行中の方もいらっしゃるでしょう。しかし、昨日の死ぬようなその痛みを持って今日、我々は、この恵みの座に一緒にいるということです。その理由は、「主のいつくしみと人生に行われた不思議なことを行われたからです。」だから捕虜から帰ってき故郷に来ましたが、すべてが破壊され、その土地に明日が全く保証されていない、その現実の前で、イスラエルの民は、詩編107編1節で、このような結論の告白と宣言をしているのです。

  “主に感謝せよ、主は善であり、その哀れみが永遠に続くでしょう。”

過ぎ去った一年の間、私たちも、砂漠で、刑務所で、病床で、嵐の海で抜けることができない、その絶望と恐怖の中から救って下さいました。だから、私たちが望む唯一の望みは、「主が今、ここにおられることです。

 

感謝祭は、これまで歩んできた人生がどんな人生だったのかを振りかえる時間であり、今、この瞬間何の実を結んでいるかを調べる時間です。さらに、ただイエス・キリストに人生の座標を変更し、新たな決断と心構えを持って約束の地に向かって進む時間を持つことが感謝祭を守る重要な意味であることを覚えて、今日は礼拝を通して、新しい心の決断を持って、主と手をつないで、新しい生活に向かって進む幸いな時になるようにお祈りいたします

[2017.1112] 구원받았으면 범사에 감사할 뿐입니다 救いにあずかったのならばただただ感謝なのです

구원받았으면 범사에 감사할 뿐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날 때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태어납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사람은 세상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소유하려는 욕망이 인생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반대로 인간은 이 세상을 떠날 때 두 주먹을 쫙 펴고 마지막 숨을 거둔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인생의 죽음 앞에서 세상으로부터 소유한 그 어떤 것도 가지고 갈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인생은 그 누구도 다가오는 죽음을 피할 수 없고, 또한 그 죽음 앞에선 살아생전에 소유한 그 어떤 것 하나도 가지고 갈 수 없는 덧없는 인생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왜 그런 덧없는 인생으로 끝을 맺는 것일까요? 이 사실을 성경은 이렇게 증언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라.”(롬3:23)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은 이런 절망적인 인생에게 놀라운 반전의 삶을 열어주셨습니다. 죄의 삯으로 사망과 심판을 피할 수 없었던 인생에게 친히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는 놀라운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죄의 삯은 반드시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믿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 우리의 죄는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을 선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죄인인 우리입장에서 보면 어마어마한 사건입니다. 죄인인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선물로, 공짜로 받았지만 하나님은 너무도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런 은혜를 입은 자라는 사실을 정말 믿고, 그 사실을 인정한다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그 은혜를 값싼 은혜로 전락시키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독생자를 죽이기까지 주신 구원의 은혜는 내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기에 생명을 다해 지켜야 하고, 그 생명의 풍성함을 마음껏 누려야 합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자의 삶에 대해 이어진 말씀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이 말씀은 구원받은 자를 다른 말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지음을 받은 존재”로 원문은 “poiema-작품”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아름다운 걸작품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걸작품으로 새롭게 지으신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이라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은 곧 하나님의 뜻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가장 정확히 명시하고 있는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덷전5:16-18)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삶의 자세와 방식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이 변화는 나의 변화의 원인이신 내 인생의 새 주인 되신 예수님과 협력하여 우리들 스스로가 만들어 가야 할 삶의 변화인 것입니다. 이 변화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18절)을 이루는 것이 삶의 목적이자 방식 되는 것입니다.

첫째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항상 기뻐하는 삶입니다.

기쁨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의해 주어지는 기쁨이 아닌 우리 안에 있는 주님 그 자신이신 것입니다. 주님으로만 기쁨이 넘치는 삶이 곧 하나님 앞에 선한 일인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기도하는 삶입니다.

주님 주신 내적인 기쁨을 유지하려면 무엇보다 기쁨의 근원이신 주님과 지속적인 교제가 뒤 따라야만 가능합니다. 오직 주님과 관계를 지속적으로 이끌어주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자리는 자신이 부인되고 오직 주님으로 충만하니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범사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놀라운 기적과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바로 감사라는 모판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행하시는 그 일을 기억하며 감사가 그 마음에 깊이 형성되지 않고는 결코 용서도 사랑도 온전히 이루지 삶의 자리에 설 수 없습니다. 감사는 이처럼 모든 인간관계를 풀어가는 동력이며, 인생의 모든 문제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여 삶의 주변을 변화시키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감성의 언어가 아닌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진정으로 믿는 자만이 행할 수 있는 선한 행위입니다.

구원 받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부족하여 무엇이 더 있어야 하는 존재가 아닌 우리를 예수그리스도로 모든 것을 얻은 자이며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온전한 자입니다.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 주신 분이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신다면 그 행사는 형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범사에 감사한 삶을 살 뿐인 것입니다.

 

 

救いにあずかったのならばただただ感謝なのです

 

人が世に生まれる時、拳をぐっと握って生まれるようです。その理由をこのように解釈することができます。人は世から何かを所有しようとする欲が人生の出発点だからだ、と。ところが、反対に人はこの世を去るときは、握っていた拳を解いて息を引き取るようです。これをまたこのように解釈することができます。人生の死の前で世から所有したどのようなものも持っていけないからだ、と。

人生は誰も迫ってくる死を避けることはできないし、また、死の前では生前に所有したものの中で何一つ持って去ることはできない儚い人生なのです。では、私たち人間は何故このように儚い人生で終わってしまうのでしょうか。この事実を聖書はこのように証言しています。

“すべての人は、罪を犯したので、神からの栄誉を受けることができず、”(ローマ人への手紙3:23)

ところが、生きておられる主はこのように絶望的な人生に驚くどんでん返しの人生を開いてくださいました。罪から来る報酬で死と裁きを避けられない人生に御自ら来られて主の栄光に至れる素晴らしい賜物を与えられたのです。

 “あなたがたは、恵みのゆえに、信仰によって救われたのです。それは、自分自身から出たことではなく、神からの賜物です。”(エペソ人への手紙2:8)

主の恵みで私たちは救われたのです。罪から来る報酬は死です。私たちがイエス・キリストが十字架で死なれたことを信じ、自分の罪を告白すると、私たちの罪は赦されて主の永遠なるいのちを賜れます。

この事実は罪人である私たちの立場から見ると、物凄い事件です。罪人である私たちは贖われ、永遠なるいのちを賜物として、ただで貰ったのですが、主は実に甚だしい代価を払われて、私たちに与えてくださった賜物が永遠なるいのちなのです。私たちがこのような恵みを受けられた者であるのを固く信じ、この事実を認めるなら、主が下さった恵みを安い恵みに引き下げることはしないでしょう。独り子を死なせるまで与えてくださった救いの恵みは私のいのちより貴いものであって、いのちを尽くして守り、そのいのちの豊かさに与るべきなのです。こういうわけで、救われた者の人生に対して続くみ言葉がこうです。

“私たちは神の作品であって、良い行いをするために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造られたのです。神は、私たちが良い行いに歩むように、その良い行いをもあらかじめ備えてくださったのです。”(エペソ人への手紙2:10)

このみ言葉では救われた者を“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新しく造られた存在”として表現しているのですが、原文では“ poiema―作品”と書いてあります。キリストにあって素晴らしい傑作品として造られた存在になったという意味です。ここで大切な一つはイエス・キリストにあって傑作品として新しく造られた目的は、“良い行いをするために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造られたということです。

それでは、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良い行いとは何でしょうか。イエスが世に来られた目的はただ主の御心を成し遂げるためです。イエス・キリストにあって良い行いは、即ち主の御心と深い関係を結んでいます。聖書は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主の御心を最も正確に示されたみ言葉があります。

“いつも喜んでいなさい。絶えず祈りなさい。すべての事について、感謝しなさい。これが、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あなたがたに望んでおられることです。”(Ⅰテサロニケ5:16-18)

私たちが救われた主の子どもに“古い人を脱ぎ棄てて新しい人を身に着るべきです。”このみ言葉は私たちに人生の生き方と姿勢を変えなさいということです。この変化は私の変化の原因である人生の新しいあるじであるイエスと協力して私たち自ら作っていく生活の変化なのです。この変化は“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あなたがたに望んでおられること”(18節)を成し遂げるのが人生の目的であり、方式なのです。

一つ目、主が私たちに望んでおられることは、いつも喜んでいることです。

歓びは私たちを囲んでいる環境によって与えられる喜びではなく、私たちの中に居られる主、ご自身です。主だけで喜びが溢れる生活が主にあって良い行いなのです。

二つ目、主が私たちに望んでおられることは、祈ることです。

主から与えられた内的喜びを維持するためには、何よりも喜びの元である主と持続的な交わりが伴われるとき可能です。ただ主と関係を持続的に導いてくれるのが祈りです。ですから、祈りの場は自分を否認し、ただ主で満たされるといつも喜ぶことができます。

三つ目、主が私たちに望んでおられることは、すべての事について感謝することです。

私たちが生きるこの世に素晴らしい奇跡と変化を起こすのは感謝という苗床から始まるということです。主が私に行われたすべてのことを覚え、感謝が心に深く刻まれないと、決して赦しも愛も完全に成す場に立つことができません。感謝はこのようにすべての人間関係を解く力であり、人生のすべてのことに全能なる主が御自ら介入してくださって生活の周辺を変えてくださる行為なのです。だからこそ、感謝は感性の言葉ではなく、主の独り子をくださった主の恵みを真に信じる者だけ行われる良い行いです。

あなたは救われましたか。では、私たちは何かを常に必要とするのではなく、イエス・キリストにあってすべてを得た者であって、もう望むことがない全き者なのです。私に永遠なるいのちをくださるために自分のいのちを惜しまず与えてくださった方が私の人生を責任取ってくださるなら、すべての事が栄えるようになるでしょう。だからこそ、私たちはただすべてのことについて感謝するようになるでしょう。

[2017.1105] 공인현 선교사 – 공감, 공유하는 공동체 コン・インヒョン 宣教師-共感、共有する共同体

공인현 선교사 – 공감, 공유하는 공동체 

 

우리 인생은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간다.

가족, 교회, 직장 공동체의 일원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 공동체 즉 교회 공동체를 통해 그 분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

성령 충만한 공동체는 우리가 선망하는 교회의 모델이다.

바로 초대교회 공동체이다.

초대교회는 오순절 성령님의 임재로 시작되었다.

특이한 점은 초대교회는 시대의 문화, 폐습을 거스르는 공동체이다.

잘못된 차별이 아닌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서로 공감, 공유하는 공동체이다.

공감하기 위해선 먼저 다가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것처럼~~

그리고 공유하는 공동체였다.

우리 교회공동체가 성령 충만한 공동체로 세워지길 소망한다.

 

 

コン・インヒョン 宣教師-共感、共有する共同体

私たちは、共同体の一員として生きて行きます。

家族、教会、職場の共同体の一員であります。

主は、御国の共同体、つまり教会の共同体を通してその御業を成し遂げます。

聖霊様で満たされた共同体は、私たちが憧れる共同体のモデルです。

即ち、初代教会の共同体なのです。

初代教会は、五旬節の日に聖霊様がご臨在されたことから始まります。

注目すべき点は、初代教会は、その時代の文化、弊習に逆らう共同体でありました。

理不尽な差別ではなく、一つの魂を大事にすることに努めました。

そしてお互いに共感、共有する共同体でありました。

共感するためには、まず互いに近づ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

主が、我ら人間に近づいてくださったように。

それが共有する共同体なのです。

我らの教会共同体が聖霊様に満たされた共同体になる事を強く願います。

 

[2017.1029] 너의 인생은 내 손에 있느니라 あなたの道はわたしの手に依っている

너의 인생은 내 손에 있느니라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사람들 중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주권자로 삼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온전히 순종하며 사는 사람과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성취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 인생의 절대 주권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바른 관계를 맺지 않고는 우리의 인생은 결코 좋은 것을 볼 수 없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도리어 욕심을 따라 살다가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에 던져지는 저주의 인생이 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어떤 존재로 인정하고 믿느냐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 토기장이와 진흙과 관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가장 쉽게 설명한 말씀이며 우리가 이 관계를 바르게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복된 인생의 길을 걸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드는 과정을 보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려는 계획이 있다는 것을 예언하시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손에 놓여 있어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위태한 진흙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듯이 너희도 내 손에 있느니라.”는 말씀이 심판에 대한 강력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너희도 내 손에 있느니라.”는 말씀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감사와 신뢰와 위로의 말씀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민족과 나라 그리고 개개인을 향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자들에게 강력한 경고입니다. 내가 토기장이와 같이 너희를 다룰 수 없겠느냐”는 말씀은 창조주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을 주관하셔서 최고의 작품을 만들 수도 있고, 또한 한 순간 무너뜨려 사라지게 하실 주권도 갖고 계신 분임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권자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 즉시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켜 돌아가기 위해선 하나님께선 토기장이와 진흙의 관계를 통해 세 가지를 꼭 실천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곳을 사모하고, 찾아가고,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토기장이가 있는 곳으로 가라, 내가 거기서 말하리라” 말씀 하신 것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들려주실 장소와 시간을 친절하게 정해주시고, 알려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말한 장소에 가지 않거나, 그 장소에 가 있어도 말씀을 들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말씀이 임하는 곳에 있으면 살아날 수 있습니다. 말씀듣기를 사모하고, 갈급함 심령을 가지고 말씀이 있는 곳에 삶의 선택에서 가장 우선되어야 하고 말씀을 듣는 자리에선 마음을 집중해야 합니다. 말씀이 임하는 곳이 어디겠습니까?

1)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곳은 예배의 자리입니다.

2)하나님 말씀이 임하는 곳은 기도의 자리입니다.

3)하나님 말씀이 임하는 곳은 특별성회의 자리입니다.

둘째, 내 인생 전부가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는 창세기1장1절 단 한절의 말씀조차 믿지 못하고, 우리 스스로가 홀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망각에 빠져 지냅니다. 인간은 창조될 때 흙이라는 물질로 만들어졌습니다. 흙으로만 존재했다면 그 흙은 아무런 가치를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흙으로 하나님은 친히 세밀하게 만지셔서 인간이라는 놀라운 작품을 만드셨습니다. 이런 창조된 인간은 세상의 그 어떤 것들로 자신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스스로 유지, 보수해 나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토기장이가 되어 주시는 겁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을 한시라도 부정하거나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이 나의 삶을 아름답게 하셔서 걸작품을 만드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치료자이시고, 우리 영혼의 위로자이시며, 뒤틀어진 마음의 교정자 이십니다. 상처 때문에, 열등감 때문에, 질병 때문에, 낙심되고 망가진 심령을 치료하십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그 사람의 아픔과 슬픔, 그리고 탄식을 다 들어 주십니다.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시고, 울고 있는 자들의 눈물을 닦아 주시며, 원망하는 자들의 마음을 녹여 주십니다. 치료하시고, 위로하시고, 교정하시는 이유는 나의 삶을 아름답게 하셔서 걸작품을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토기장이 되시는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너희는 다 내 손에 있느니라.”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말씀이 임하는 곳으로 가서, 말씀이 임할 때까지 기다려라.”

“너희의 인생이 내 손 안에 있고 너희의 길을 예비하고 있음을 인정하라.”

“내가 진흙은 같은 너희를 빚어 최고의 걸작품을 만들도록 나의 손에 너희 인생을 맡겨라.”

우리를 하나님의 손안에 두시고 날마다 가장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 가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그가 내시는 생명의 길을 온전히 따르는 우리 모두가 되길 축원합니다..

 

あなたの道はわたしの手に依っている

 

主を信じる人には二つの類型があります。主宰者である主を、主として主に従う人と、人と主を利用し願望成就にいそしむ人です。

わたしたちは絶対主権をお持ちの主宰者である主の御手にあります。主との関係が何よりも肝要です。そこにこそ良く幸いが待っています。そうでないなら、ゲヘナ地獄に落ちる審判の対象になり、呪われます。

主はどんな方でしょうか。陶器師と器の関係がそれを良く表しています。イスラエルもキリスト者も同じく主にあって主の手にのっとって生きる存在にすぎない、そういうメッセージです。

 

主がエレミヤに見せた陶器師と器は主の審判の預言のたとえでした。‘粘土が陶器師の手の中にあるように、イスラエルの家よ、あなたがたも、わたしの手の中にある’

 

この言葉は、前者の人には祝福の言葉ですが、後者の類の人には警告の言葉です。後者の人は即座に主に帰らなくてはなりません。主の聖書のことばに戻り主に依り頼まなくてはなりません。

 

1.主の言葉のある場所に向かう

‘立って、陶器師の家に下れ。そこで、あなたに、わたしのことばを聞かせよう’エレミヤに主は場所と時間を教えておられます。まずその選択が先決です。

 

1)礼拝の場が主の言葉の場所です

2)祈りの場こそ主の働かれる場所です

3)特別聖会の場こそ主の言葉が働かれる場所です

 

2.あなたの道の初めから終わりまでが主にあることを認める

’初めに、神が天と地を創造した。’創世記1章1節。あなたは一人生きる錯覚に陥ります。でも土をもって主があなたを造られたのです。土に何の価値がありましょうか。主はその土であなたをお造りになりました。

3.主があなたを傑作としてこの世にお出しになることを信じる

主はあなたを守り、いやし、矯正してくださる方です、傷ゆえに、劣等感ゆえに、病いゆえに、お直しくださいます。誰ひとり置いてけぼりになさいません。‘あなたがたも、わたしの手の中にある’主の言葉です。

“あなた達は主の言葉のところに集まり待て”

“あなた達の道はわたしにある。備えがあることを認めよ。”

“粘土を最高の器へと造る私の手にゆだねよ”

主を日々讃美し主のお造りになる道を思い、聞き従う、わたしたちになりますように、祝福しま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