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7.22] 이 복을 받아야 진정 행복자입니다 [17] (로마서4:6-11) ロゴスライフ教会

복을 받아야 진정 행복자입니다 (17)

한국갤럽조사연구소사 우리나라를 포함해 18개 나라의 2만4천 명에게 “당신은 얼마나 행복하십니까?” 라는 질문을 통해 각 나라 사람들의 행복도를 조사를 했습니다. 그 결과 대한민국이 18개 나라 가운데 꼴찌였다고 합니다. 행복도 10점 만점에 한국 사람들의 행복 측정치는 5.3점이었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마음 반쪽은 불행이 소용돌이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20년 전에 비해 한국은 잘 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행복감은 아주 많이 떨어진 것입니다. 그 원인은 세상은 행복을 소유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유하지 못하거나 소유했던 것을 잃으면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행복을 소유에 두지 않고 바른 관계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복이 위로부터 오는 것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통해 온다고 말씀합니다. 로마서4장9절이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그런즉 이 복이”(롬4:9)

그냥 복이라고 하지 않고 “이 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복은 성경이 어떤 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로마서4장6절을 보시면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공로가 없어도,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 주셔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된 복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서 정말 복된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사람만이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정확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행복이 왜 하나님과 관계에서만 누릴 수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불행은 하나님께 범죄하므로 시작된 것입니다. 죄가 인간의 모든 불행의 시작이라면 죄의 문제를 다시 해결하지 않고는 인간의 행복은 결코 해결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의 문제는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받아야 죄로 비롯된 불행을 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선 우리가 그 어떤 죄를 지어도 그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순간 그 죄에 대해 이사야43장25절에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 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둘째는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면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됩니다.

인생 가운데 가장 두려움의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죽음입니다. 우리는 평상시 죽음 앞에 서는 일이 없이 일상을 살아갑니다. 막연히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생각을 하지 그 죽음이 오늘이 될 수 있고 그 죽음의 대상이 나라고 생각하며 살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되므로 얻는 가장 중요한 복이 영생입니다.

죄로 인해 인간의 삶 속에서 죽음이 들어옴으로써 불행이 시작되었다면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짐으로 행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에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짐으로 천국에서는 물론이요 이 세상에서도 행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통한 만족한 삶을 살아갑니다.

인생의 모든 결과를 책임져 주시는 분이 오직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만이 우리의 모든 수고에 결실을 맺고 만족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었던 다윗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23:1,4)

다윗도 아브라함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었던 것은 믿음으로 인함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목자가 되어 주셨고 아브라함 또한 그의 인생은 부족함이 없는 만족한 인생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4천 년 전 아브라함에게 임한 하나님의 함께 하시는 은혜는 지금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여전히 유효합니다. 죄 사함의 은혜, 영생을 주신 은혜 그리고 항상 함께 하시겠다는 은혜 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그 은혜를 믿는 일만 남았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비롯된 힘을 소유할 때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들을 철저히 끊고 하나님만 의지하여 인생 전부를 의탁함으로 하나님과 항상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삶만이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시는 인생이 되고 그 삶만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만족한 인생을 사는 자가 되어 하늘로 내리는 참 복을 누리는 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복을, 모든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이 누렸던 것처럼 우리 모두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말씀과 삶이 어우러지는 로고스라이프 교회 

 

 

この幸いを授かることが真の幸せ者です (17)

韓国ギャラップ調査研究所で我が国を含め18ヶ国の2万4千人を対象に“あなたはどれくらい幸せですか”という質問をし、各国の人々の幸福度を調査しました。その結果、韓国が18ヶ国中、最下位だったといいます。幸福度10点満点中、韓国の人々の幸福測定値は5.3点でした。見かけは健康でも、心の片隅では不幸の渦が巻いているのです。20年前に比べ、韓国はいわゆる裕福な国になりました。しかし人々の幸福度は著しく低下しています。その原因は、この世は幸福の意味を所有する事においているためです。そのため所有できなかったり、すでに持っていたものを失ってしまうと、不幸になってしまうのです。聖書は人間の幸せは所有ではなく、正しい関係であると語っています。そのため聖書は、祝福は上から来るものであり、神様との関係を通じてもたらされるものであると言っています。ローマ人への手紙4章9節は次の御言葉で始まります。

「では、この幸い(幸福)は」ローマ人への手紙4章9節

 

ただの幸いではなく、“この幸い”とおっしゃっています。この幸福はどのような幸福を言っているのでしょうか。ローマ人への手紙4章6節を見ますと、“行いによらずに神から 義と認められた人の幸い”を言っています。これは自分の行いがなくても、罪びとでありながらも、神様が義であると認めてくださり、神様との関係を回復してくださった幸いを意味します。この世で真に幸いな人は神様との関係が回復した人です。神様との関係が回復した人のみがこの世で幸せな人生を生きることができます。何故そうなのか、その理由を知る必要があります。私たちの幸せが何故神様との関係の中でのみ享受することができるのか見てみましょう。

 

一つ目に、神様との正しい関係の回復は、罪の問題を解決することができるためです。

人間の不幸は神様に罪を犯したことにより始まりました。罪が人間のすべての不幸の出発点であるなら、この罪の問題を解決せずには人間は決して幸せにはなれないのです。人間の罪の問題は神様によって罪の赦しを得ることで、罪による不幸を断ち切ることができます

私たちがどのような罪を犯したとしても、その罪を認識し、悔い改める時のことについてイザヤ書43章25節に次のように語っています。

「このわたしは、わたし自身のためにあなたのそむきの罪をぬぐい去り、もうあなたの罪を思い出さない。」 イザヤ書43章25節

 

 

二つ目に、神様との関係を回復することで、死からの自由を得ることができます。

人生の中で最も大きい恐れは何だと思われますか。それは死です。私たちは普段は死を前にすることなく、日常を生きています。漠然と人間はいつか死ぬと思うだけで、その死が今日訪れるかもしれない、もしくはその死の対象が私かもしれないといったことは考えません。私たちが神様を信じることで得られる最も大きい重要な幸いは、永生です。

罪によって人間の生の中に死が割り込み不幸が始まったのならば、人間に永遠の命が与えられることで幸せが始まるのです。神様との関係が回復される時にのみ、永遠の命が与えられ、天国はもちろんのこと、この世界においても幸せにな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

 

三つ目に、神様との関係が回復すると、神様が共にしてくださる事を通じて満足する人生を送ることができます。

人生のすべての結果を受け持ってくださる方は、ただ創造主である神様のみです。神様が共にしてくださる時にのみ、私たちのすべての苦労が実を結び、満足した人生を生きることができます。神様との正しい関係を結んでいたダビデは次のような告白をしました。

「主は私の羊飼い。私は乏しいことがありません。たとい、死の陰の谷を歩くことがあっても、私はわざわいを恐れません。あなたが私とともにおられますから。」 詩編23編1,4節

 

ダビデもアブラハムも神様との関係が回復できたのは、その信仰によってでした。そのため神様はアブラハムの牧者となってくださり、アブラハムもまた、その人生に乏しさのない富んだ人生となることができたのです。

4千年前アブラハムに臨んだ神様が共にしてくださる祝福は、今神様を信じる私たちにも依然として有効です。罪の赦しの恵み、永生を下さる恵み、そして常に私たちと共にしてくださるという恵みです。

では、今私たちがすべきことは天より授かるその恵みを信じることだけです。この世によって授かった力を持つ時に幸せになれるという考えを徹底的に断ち切り、神様だけに頼って人生すべてを預けることで、神様と常に正しい関係を結ばなければなりません。神様との正しい関係を結ぶ人生のみが、神様が常に共にしてくださる人生になり、その人生のみが罪の問題を解決し、死の恐怖に打ち勝ち、満足した人生を生きる者となって、天より授かる真の幸いを享受する者として生きていくことができます。この福を、すべての偉大なる信仰の先祖たちが享受したように、聖徒の皆さんも一人残らず享受されることを心より願います。

 

言葉(ことば)生(い)きる」ロゴスライフ教会

     

[2018.07.15]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 [16] (로마서 4:1-8) 장원규목사, 동경성결교회, 로고스라이프교회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 (16)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세상을 보는 안경을 쓰게 됩니다. 부모로부터, 유치원이나 학교로부터, 친구들로부터, 다양한 책들로부터 등등의 여러 경로를 통해 세상을 보는 안경을 쓰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쓴 안경은 좀처럼 벗기가 힘든 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지금까지 써 왔던 안경을 벗고 하나님께서 씌워주시는 말씀의 안경, 예수 그리스도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우리 믿음의 삶을 보면 자신이 썼던 안경을 벗지 않고 그 위에 말씀의 안경을 덧쓰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두 개의 안경을 끼고 있어 인생의 초점이 두 개로 보여 삶의 포커스가 정확하지 않아 혼란스런 삶을 살게 됩니다. 이런 상태의 삶은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신앙생활을 오래해도 근본적인 생각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생각의 초점이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어 있기에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을 다시 자기생각의 안경을 통해 보게 되니 말씀이 말씀답게 내 안에서 역사할 수가 없습니다. 생각의 근본이 바뀌지 않으니 조금 변화된 삶을 볼 수 있지만 근본적인 변화는 아닌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만 있지 경건의 능력은 전혀 없는 세상 사람과 다를 것이 없는 무늬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 얻는다는 안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말하는 율법은 성경이 말하는 율법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장로들의 유전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장로들의 유전과 하나님의 율법을 동일시합니다. 그러면서 그 기준에 맞는 사람의 모델로 아브라함을 꼽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기준으로 볼 때 아브라함은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모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확신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의 확신이 얼마나 잘못된 안경을 쓰고 성경을 본 것인가를 설명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 또한 유대인들과 같지 않지만 우리 나름대로 안경을 끼고 성경을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선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착한 행실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삶에 감사가 넘치고, 선행을 행하며, 자신만을 위한 삶에서 이웃을 향한 이타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착한 행실에 이행여부가 구원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착한 행실로 삶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대표주자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떻게 비롯된 그것을 오늘 본문이 말씀하려는 핵심입니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롬4:1-2)

아브라함이 의롭다 칭함 받은 것이 행위로 된 것이라면 그 행위를 자랑할 수 있을 터이지만 행위로 된 것이 아니므로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선한 행위가 하나도 없었다든지 아니면 예수 믿는 사람에게 행위가 전혀 필요 없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으므로 그의 행위는 선한 행위를 행합니다. 이런 선한 행위에 대해 아브라함 입장에서 얼마든지 자랑할 수 있겠지만 그 행위를 가능케 한 원동력에 대해 성경은 다른 차원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3절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아브라함이 의로운 행위를 한 것은 그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태어나 자란 곳은 하란이라는 곳이었습니다. 그 하란에 있을 때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무엇으로 드러났느냐 이것을 말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었다는 것이 단순히 믿음의 고백으로 끝나지 않고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는 순종으로 그 행위를 드러낸 것입니다. 당시 하란은 화려한 문명의 도시입니다. 살기가 너무 편한 도시이며 경제적으로 부요한 도시입니다. 그러나 가나안은 황무지와 다를 바 없는 도시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그 동안 영위해 온 안전하고 편안한 삶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황무지로 떠났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 믿음이 어떻게 주어진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도 행위도 인간 차원에선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정말 주님을 믿는다면 세상이 씌어준 안경을 벗어버리고 이젠 복음의 안경을 써야 합니다. 이젠 하란에서 가나안을 향해 말씀을 따라 삶의 방향을 돌려야 합니다. 매일 하나님의 의이신 주님으로 충만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날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는 한 우리의 자아가 역사한 옛사람은 날마다 죽고 또한 날마다 그리스도가 주가 되셔서 주장하시는 삶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그 유업이 나의 유업이 되는 그 영광스런 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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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書は何と言っているのか (16)

 

人はこの世に生まれる瞬間から、自分の意図とは関係なく、世を見る眼鏡を掛けるようになります。親から、幼稚園や学校から、友人から、様々な本などから、いくつかの経路を通して世を見る眼鏡を掛けるわけです。そのように掛けられた眼鏡をなかなか外せられないのが人間です。

神を信じるというのは、今まで掛けられた眼鏡を外し神様が掛けてくださるみ言葉の眼鏡、イエス・キリストの眼鏡を掛けて世を見て生きていくことを意味します。ところが、意外と私たちの信仰の生活を見ると、自分が掛けた眼鏡を外さず、その上にみ言葉の眼鏡を重ねて生きていく人が多いです。このような人々は、二つの眼鏡を掛けており、人生の焦点が二つになり人生のフォーカスが正確ではなく、混乱の生活を送るようになるでしょう。

このような状態の人は、いくら聖書をたくさん読み信仰生活を長くしても、根本的な考えを変えることができません。考えの焦点が自分から始まっているのでみ言葉を聞いても、そのみ言葉を再び自分の考えの眼鏡を通して見るので、み言葉がみ言葉らしく自分の中で作用することができません。考えの根本が変わらないので、ある程度変わった姿は見られるが、根本的な変化はないのです。見えるところは敬虔であってもその実を否定する、敬虔の力は全くない世の人と異なることのない、形だけのクリスチャンに生きるのです。

ユダヤ人たちは、律法を守って救いを得るという眼鏡を掛けていました。もちろん、彼らが言う律法は、聖書が言っている律法ではありません。人々が作った長老たちの遺伝です。それにも関らず彼らは長老たちの遺伝と神の律法を同様にしています。それなのに、その基準に合うモデルとして、アブラハムを挙げていたのです。つまり彼らの基準で見ると、アブラハムは、律法を守って義と認められたモデルとなったわけです。このような彼らの確信は大したものでした。それで使徒パウロは、彼らの確信がいかに誤った眼鏡を掛けて聖書を見ていたのか、説明したがっていたのです。私たちはユダヤ人とは異なりますが、自分なりに眼鏡を掛けて聖書を見られるという点では同じであることを知るべきです。

 

私たちが、善行を行うことは、神のみ恵みによって救われ神の子とみなされたからです。それで、生活の中で感謝が満ち、善行を行い、自己中心の生活から隣人に向けた利他的な生活を送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このような善行の行いが救いを決定する可否ではありません。善き神の子となったので、生活の中で善行の実を結ぶのです。

アブラハムは信仰の代表的な者です。アブラハムの信仰がどのように始まったのか、それが今日のみ言葉の核心です。

 

 

「それでは、肉による私たちの父祖アブラハムの場合は、どうでしょうか。もしアブラハムが行い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のなら、彼は誇ることができます。しかし、神の御前では、そうではありません。」(ローマ4:1-2

 

アブラハムが義と認められたのが行いによったものであれば、その行いを誇ることができるはずですが、行いによったものではないので、誇ること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この部分で、私たちが注意すべき点があります。アブラハムに善い行いが一つもなかったとか、または、イエスを信じる人に善い行いは全く必要ないと誤解してはならないところです。アブラハムは神を信じたので、彼は善い行いをしたのです。このような善い行いについて、アブラハムの立場からいくらでも自慢できると思いますが、その行いを可能にした原動力に対して聖書は、別の視点から語っています。 3節です。

「聖書は何と言っていますか。「それでアブラハムは神を信じた。それが彼の義とみなされた」とあります。」

 

アブラハムが義のみなされたのは、彼が神を信じていたからだと言っています。アブラハムが生まれ育った所はハランという所でした。そのハランにいるとき、アブラハムに神のみ恵みが臨みました。その時、アブラハムは神を信じました。ところが、その信仰が何で明らかになったのか、それを言いたいのです。アブラハムの信仰は、単純に、信仰の告白で終わらずハランを去ってカナンに行く従順で、その行為を表わしたのです。

当時ハランは、華麗な文明の都市でした。とても暮らしやすい都市であり、経済的に豊かな都市でした。しかし、カナンは荒れ地と変わらない街でした。アブラハムは、自分がその街で営んできた安全で快適な生活を捨てて、神が命じられた荒地にたちました。どうすればそのように出来るのでしょうか。アブラハムは神を信じていたからです。アブラハムにこのような信仰がどのように与えられたのでしょうか。のみみによってえられたものです。ですので、信仰も行いも人間の立場では何も誇ることが出来ないものなのです。

 

私たちが本当に主を信じるならば、世から掛けられた眼鏡を外して、福音の眼鏡を掛けるべきです。もうハランからカナンにい、み言葉沿って生活方向変えるべきです。毎日神の義である主に満ちた生活を送ることです。そのように、日々主と共に生きる限り、私たちの自我が基準になる古い人は日々死なれ、キリストが主となられ導かれる生活により、アブラハムの相続が自分の相続になる、栄光の日を迎えることになるでしょう。

 

 

 

言葉(ことば)生(い)きる」ロゴスライフ教会

   

 

[2018.07.08] 율법을 굳게 세워야 합니다 [15] (로마서3:27-31) 장원규목사, 로고스라이프교회

율법을 굳게 세워야 합니다 (15)

하나님 말씀의 중요한 역할이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깨닫게 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혼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우리가 볼 수 없는 은밀한 마음 깊은 곳까지 비춰 우리 안에 감추어진 모든 죄들을 다 들춰 보여줍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의 원인은 다 죄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인간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참된 행복을 찾을 수 없는 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죄인임을 깨닫는 데부터 시작됩니다. 죄인임을 깨달았다는 것은 죄로 인해 저지른 추악함과 참담함을 느끼며 자신 안에 그 어떤 선함도 없는 찾을 수 없는 무가치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의’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바르게 세울 수 있는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3장27절에서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에 있어서 우리에게 자랑할 것이 있느냐고 반문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원받은 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 은혜로 ‘믿음의 법’을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우리가 더더욱 자랑할게 없다는 그 이유 한 가지를 더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3장29절입니다.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우리는 본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을 없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그 자리로 무조건적으로 초청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은혜로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으로 의로운 자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 보시기 바르고 의로웠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인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만 자랑하는 삶을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만을 자랑으로 삼는 삶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본문 31절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하나님만을 자랑으로 삼는 삶은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은혜의 시대로 율법은 폐하였는데 왜 ‘율법을 굳게 세우리라’라는 말씀에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율법에 대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5:18)예수님은 율법의 실체이시기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으므로 이제는 율법은 폐하여야 한다고 말씀을 하시지 않고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룬다.’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을 굳게 세운다는 것은 곧 주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며 주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씀하는 것일까요? 주님께서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지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의 증명은 계명을 지킴으로서 들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사랑해 주신 그 사랑을 본받아 삶 속에서 그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해 주셨습니까?

첫째는 하나님은 우리를 값없이 은혜를 베풀어 주심으로 사랑해 주셨습니다.(롬3:24)

둘째는 하나님은 독생자를 제물로 삼으시면서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롬3:25)

셋째는 하나님은 길이 참으심으로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롬3:25중반)

넷째는 하나님은 우리가 과거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사랑해 주셨습니다.(롬3:25후반)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준 사랑의 네 가지의 모습을 따라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삶의 과녁으로 삼아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신 그 사랑을 본받아, 우리도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심을 넘어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희생의 제물이 되는 삶 즉 율법을 굳게 세우는 삶을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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律法を確立すべきです (15)

 

主の御言葉の重要な役割は我々の罪が何かを確実に悟らせる事です。我らの魂の奥まで見る事が出来ない心の深い底まで照らして我らの中で隠された全ての罪を表せます。人の全ての不幸の原因は罪から始まります。罪の問題を解決しないと真の幸せを得る事が出来ない理由がこれです。人が罪の問題を解決する道は罪人であることを悟ってから始まります。罪人である事を悟ったと言うことは罪を犯した自分の汚しい事を感じ自分の中で善なる事が何も無い無価値な存在であることを悟ることです。その瞬間我らは‘主の義’に注目すべきです。その‘主の義’は何でしょうか。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信仰です。イエスが十字架で流した血が主と我らの関係を健やかに建たせる主の義になります。それでパウロはローマ人への手紙3章27節でこう語ります。

“それでは、私たちの誇りはどこにあるのでしょうか。それはすでに取り除かれました。どういう原理によってでしょうか。行いの原理によってでしょうか。そうではなく、信仰の原理によってです。”

救われて主の子孫になった事に対して我らが自慢することが無いことを語っています。我らが救われたのが主に善で在ってからではなく主が我らを善にするために恵みとして‘信仰の原理’を下さったからです。その上にパウロは自慢してはいけないもう一つの理由を言っています。ローマ人への手紙3章29節です。

“それとも、神はユダヤ人だけの神でしょうか。異邦人にとっても神ではないのでしょうか。確かに神は、異邦人にとっても、神です。”

我らは本来主を父と呼ぶ資格がない異邦人でした。しかし、主の恵みで我らも救われることが出来ました。その場に招待して下さいました。そして、我らにも信仰をくださり、その信仰によって義人になることを許して下さいました。その理由は我らの人生が主の目に正しく義で在ったからではありません。ただ主の恵みでした。だから我らは主だけを自慢する人生を生きるべきです。

それなら主だけを自慢する人生とは何でしょう。本文の31節です。

“それでは、私たちは信仰によって律法を無にすることになるのでしょうか。絶に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かえって、律法を確立することになるのです。

主だけを自慢する人生は律法を確立することであると言っています。我らは主の恵みで救われた恵みの時代で律法は無くなったはずだがなぜ律法を確立することになると言っているのかと疑問を持たせます。

 

 

しかし、イエスは律法に対してこう語った事があります。

 “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告げます。天地が滅びうせない限り、律法の中の一点一でも決してすたれることはありません。全部が成就されます。(マタイの福音書5:18)イエスは律法の実体だからイエスがこの世に臨在したからこれから律法を廃止にすると言わずに‘天地が滅びうせない限り、律法の中の一点一でも決してすたれることはありません。全部が成就されます。とおっしゃいました。

それでは律法を確立する事がつまり、主の命令を守る事であると言うことですが、主の命令を守るとは具体的にどういう事でしょう。命令を守ることに対して聖書にはこう語っています。 わたしの戒めを保ち、それを守る人は、わたしを愛する人です。わたしを愛する人はわたしの父に愛され、わたしもその人を愛し、わたし自身を彼に現します。(ヨハネの福音書14:21)

我らがイエスを信じるとは主を愛する事を意味するし、主を愛する事の証は主の命令を守る事で現れます。

主が我らを救って下さって愛して下さったその愛に従い人生の中で具体的に実践することです。主は我々をどのように愛して下さいましたか。

一つ、主は我々に代価なしでみをえて下さいました。

(ローマ人への手紙3:24)

二つ、主は一人子を生贄にしてから我々を愛して下さいました。

(ローマ人への手紙3:25)

三つ、主は長く忍耐して我々を愛して下さいました。

(ローマ人への手紙3:25中半)

四つ、主は我々の過去に犯した罪を見逃して下さって愛して下さいました。

(ローマ人への手紙3:25後半)

 

主が我々に与えて下さった愛の四つの姿に従って我々の隣人を愛する事が律法を確立する事であり、主を愛する事であります。それなら我々はただイエスキリストだけを人生の印として主が一人子を下さったその愛を見本にし、自分自身だけを思わず、我々が生きる現場で生贄になる生き方をすることで律法を確立させる人生を過ごしましょう。

 

 

 

 

言葉(ことば)生(い)きる」ロゴスライフ教会

    

[2018.07.01] 모세의 축복이 주는 영적인 교훈 (신명기33:1-11) 장원규목사,동경성결교회, ロゴスライフ教会

모세의 축복이 주는 영적인 교훈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성도 안에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생명을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그 생명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자라가야 합니다. 1년 전보다, 2년 전보다 해가 가면 갈수록 성장과 성숙해야 합니다. 성장, 성숙은 곧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며 변화에는 반드시 생명의 가득한 세상으로 바꿔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2018년을 시작하고 6개월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 시점에 하나님은 왜 맥추 절기를 지키도록 하시는 것일까요? 이번 주간 신명기33장을 묵상하다가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가 걸어온 인생이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신명기33장은 모세가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의 12지파들을 축복하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무엇을 축복하고 있습니까? 신명기 33장은 모세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대상으로 축복하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르우벤 지파와 레위지파의 축복을 통해 맥추절을 맞아 지난 6개월의 삶을 돌아보며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첫째는 르우벤 지파에 대한 모세의 축복입니다. .

“르우벤은 죽지 아니하고 살기를 원하며, 그 사람 수가 적지 아니하기를 원하나이다.”(신33:6)

지금 모세는 죽기 직전에 각 지파들을 축복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르우벤에게 하고 있는 이 축복은 참 이상합니다. 세상에 “죽지 않고 살기를 원하고, 그래서 수가 적어지지 않기를”원하는 것은 축복이라고 생각하기가 힘듭니다. 그런데 모세는 르우벤을 위해서 죽지 않고 살아만 있기만을 빌고 있습니다. 무슨 이유로 이런 이상한 축복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원인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창세기49장3~4절의 말씀과 연결해 생각해야 합니다.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여기서 우리가 염두 해 두어야 할 것은 모세의 축복은 지금 500년 전에 있었던 야곱의 축복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500년이 지나 르우벤 지파를 축복하는데 축복의 내용이 “르우벤은 죽지 아니하고 살기를 원하며, 그 사람 수가 적지 아니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축복 할 수밖에 없는 그의 자손들의 모습입니다. 르우벤의 자손은 그의 선조처럼 생존 자체가 위협을 받고 있는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선조인 르우벤에게 야곱이 축복한 그 이후 자손들은 전혀 변화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레위 지파에 대한 모세의 축복입니다.

“레위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 주의 법도를 야곱에게, 주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며 주 앞에 분향하고 온전한 번제를 주의 제단 위에 드리리로다.”(신33:8,10)

레위는 르우벤처럼 성적인 범죄는 아니지만 커다란 실수를 했던 사람입니다. 창세기49장5절에 보면 야곱이 레위를 축복하는 장면인데 이때 야곱은 축복인지 저주인지 모를 축복을 하고 있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레위는 칼은 폭력의 도구라는 축복이 아닌 저주를 받은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자손들은500년이 지나 모세가 레위지파를 축복하는데 ‘주의 경건한 자’가 되었고, 주의 율법을 가르치며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감당하는 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창세기를 기록한 사람도 모세요, 신명기를 기록한 사람도 모세라는 것입니다. 창세기와 신명기의 저자인 모세가 레위의 이 변화에 대해서 감격적으로 기록하고 축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주가 변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하는 이 변화입니다. 변화된 운명이요 변화된 인생입니다. 모세도 레위 지파요, 아론도 레위 지파 사람입니다. 야곱은 레위에게 ‘레위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라 하여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 노여움이 혹독하고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지만 500년 지나 모세가 유언을 할 때는 변화된 인생으로 제사장 가문이 되어 말씀을 맡은 귀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복음은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운명과 인생과 성품과 윤리를 바꾸는 능력입니다. 그분의 십자가는 우리로 타락한 본성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삶으로 초대합니다. 그 복음, 그 십자가의 복음을 만나고 듣고 경험한 우리는 마땅히 레위처럼 변화된 운명, 변화된 인생,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변화는 그리스도인의 숙명입니다. 변해야 삽니다. 복음 앞에서 변화되어야 합니다.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닮은 성품과 윤리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이것이 맥추절 절기를 지키는 우리를 향해 주시는 깊은 교훈임을 기억하고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사람들로 끝임 없이 변화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축원합니다.

 

말씀과 삶이 어우러지는 로고스라이프 교회     

 

モーセの祝福から得られる霊的な教訓

 

キリスト教は命の宗教です。そのため、神様を信じる聖徒は世界を変えられる生命を抱いています。そのため、聖徒はその生命が世界を変化させていけるように成長してい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1年前より、2年前より、時の流れと共に成長、成熟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成長、成熟はつまり変化を意味することであって、その変化は必ず生命に満ちた世界に変えることができます。

私たちは2018年がスタートしてから6か月という時間を過ごしました。この時点で神様はなぜ刈り入れの祭りの節期を守るようにおっしゃったのでしょうか。今週一週間申命記33章を黙想中に、神様が私たちが歩んできた人生にどのような変化があったかについて焦点を合わせていらっしゃるということに気づきました。申命記33章はモーセが最後にイスラエルの12の部族を祝福する場面を描いています。

ではモーセは何を祝福しているのでしょうか。申命記33章はモーセがイスラエルの12部族に向かって祝福する内容ですが、ルベン族とレビ族への祝福を通じて、刈り入れの節季を迎え、過ぎた6か月の私たちの生活を振り返り、大事な教訓を得ようと思います。

 

一つ目に、ルベン部族に対するモーセの祝福です。

「ルベンは生きて、死なないように。その人数は少なくても。」 (申命記33:6)

今モーセは死を迎える前に各部族を祝福しています。しかしルベンにしているこの祝福は妙な点があります。“死なずに生きて、その数が少なくならないこと”を望むことは祝福とは捉えがたいです。しかしモーセはルベンのために、死なずに生きることを祈っています。どのような理由でこのような祝福をしているのでしょうか。この原因を正確に知るためには創世記49章3-4節の御言葉と繋げて考えなければなりません。

「ルベンよ。あなたはわが長子。わが力、わが力の初めの実。すぐれた威厳とすぐれた力のある者。だが、水のように奔放なので、もはや、あなたは他をしのぐことがない。あなたは父の床に上り、そのとき、あなたは汚したのだ。彼は私の寝床に上った。」 (創世記49:3-4)

 

ここで私たちが念頭に置かなければならないのは、モーセの祝福は今500年前にあったヤコブの祝福を前提にし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しかしモーセが500年後にルベン部族を祝福した内容が“生きて、死なないように。その人数は少なくても”と願ったことは、そう祝福せざるを得なかったルベン部族の姿に理由があります。ルベン部族の子孫はその祖先のように生存する事自体が危ぶまれているのです。祖先であるルベンにヤコブが祝福したその後も、その子孫は全く変化がないことを語っているのです。

 

 

二つ目に、レビ部族に対するモーセの祝福です。

「レビについて言った。「あなたのトンミムとウリムとを、あなたの聖徒のものとしてください。あなたはマサで、彼を試み、メリバの水のほとりで、彼と争われました。彼らは、あなたの定めをヤコブに教え、あなたのみおしえをイスラエルに教えます。彼らはあなたの御前で、かおりの良い香をたき、全焼のささげ物を、あなたの祭壇にささげます。」(申命記33:8,10)

 

レビはルベンのように性的な犯罪ではなかったですが、大きな過ちを犯した人です。創世記49章5節にヤコブがレビを祝福する場面において、彼は祝福か呪いかわからない祝福をしています。「シメオンとレビとは兄弟、彼らの剣は暴虐の道具」であると。レビは剣は暴虐の道具であるという、祝福ではなく呪いを受けた者でした。しかし彼の子孫は500年が過ぎ、モーセがレビ部族を祝福するのに“主の敬虔な者”となり、主の律法を教え、神様捧げる祭祀を全うする者になったのです。

私たちは覚えてお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創世記を記した者もモーセであり、申命記を記したものもモーセ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創世記と申命記の著者であるモーセがレビのこの変化に対して感激的に記録し、祝福しているのです。呪いが変わり神様の御言葉に献身するものへと変化しました。変化した運命であり、人生です。モーセもレビ部族でありアーロンもレビ部族の人です。ヤコブはレビに“レビの剣は暴虐の道具”であるとし、“わがたましいよ。彼らの仲間に加わるな”、“のろわれよ。彼らの激しい怒りと、彼らのはなはだしい憤りとは”としましたが、500年が過ぎモーセが遺言を残す時は、変化した人生で祭司の一家となり御言葉を全うする貴い人となったのです。

 

福音は力です。イエスキリストは私たちの運命と人生と品性と倫理を変える力です。その方の十字架は私たちの堕落した本性を捨てさせ、神様に従う人生へと道行きます。その福音、その十字架の福音に出会い、経験した私たちは当然レビのように変化した運命、変化した人生、変化した生き方を生きなければなりません。

変化はクリスチャンの宿命です。福音の前で変わ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新しくな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神様に似た品性と倫理に変化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れがクリスチャンとして私たちが歩まなければならない道です。これが刈り入れの節期を守る私たちに向けられた大切な教訓であることを記憶し、神様の御心にかなう人々として絶えず変化する私たちになることを心よりお祈りします。

 

言葉(ことば)生(い)きる」ロゴスライフ教会

  

[2018.06.24] 하나님을 경외함이 사람의 본문입니다 [14] (로마서3:21-26) 장원규목사、ロゴスライフ教会

하나님의 의를 주목해야 합니다 (14)

모든 그리스도인인들 신앙생활에 가장 핵심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한결같이 ‘하나님 말씀’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오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삶을 사는 것은 마땅한 삶인데 하나님 말씀을 다 지켜야 의로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결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그런 사실을 로마서를 통해 지속적으로 강조하면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의 기능은 우리의 죄를 인식케 하는 역할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말씀이 죄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인식하게 할까요? 그 답을 히브리서4장12-13절이 말씀해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환히 비추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말씀 앞에 서면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기에 숨겨져 있던 것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내가 하나님 앞에 큰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어떤 존재인가를 아느냐에 따라 어떤 길을 선택할지를 결정되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해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그 다음엔 어떤 길을 선택하겠습니까? 그런 사람에게 그 해답을 위해 21절이 “이제는”이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통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았다면 이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하나님의 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하나님의 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를 신학적으로 정의하면 ‘바른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과 우리의 관계를 바르게 세우는 하나님의 의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의의 기준에 그 어떤 차별을 두시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의가 차별이 없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허락되었는지 밝혀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4)

둘째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제물로 삼으심으로 하나님의 의가 주어집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롬3:25)

셋째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난 죄를 간과해 주심으로 하나님의 의가 주어집니다.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3:25하)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사랑하는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더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 자신을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독생자를 주시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에 동의하고 그 사랑을 주신 하나님만 사랑하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우리가 행해야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관계를 멀어지게 하는 죄와 결별하는 것입니다. 육체를 더 사랑하여 본능으로 살고, 자기만족과 자기 유익을 위해 살려는 자기중심의 삶을 청산하는 것입니다. 특히 세상을 사랑하며 산 삶을 청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적극적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죽이기까지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호흡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더 이상 우리에게 주어진 사랑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은 이 우주에도, 이 지구 어디에서나 항상 충만합니다. 그 사랑은 지금 이 순간에 이 자리에 충만합니다. 그 사랑은 지금 내 마음 앞에까지 충만해 있습니다. 문제는 내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 마음을 열어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이신 주님으로 충만하면 세상에 그 어떤 것들 앞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겨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고 세상을 넉넉히 이기며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이 되는 삶을 사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말씀과 삶이 어우러지는 로고스라이프 교회

 

 

神様の義に注目すべきです(14)

 

すべてのクリスチャンたちの信仰生活に最も重要なのが何かと問われると、ひたすら「神様のみ言葉」と答えるでしょう。ところが、一つクリスチャンたちが持つ誤解があります。神様のみ言葉を守り行う生活をすることは当然のことなのに、神様のみ言葉をすべて守らないと義人にはなれないと考えている人が意外と多いということです。人間は決してそうすることができません。パウロはそのような事実をローマ人への手紙を通して継続的に強調し、神様が神様の民たちに与えられたみ言葉の機能は、私たちの罪を認識させる役割だと言っています。だとしたら、み言葉が罪に対して具体的にどのように認識させるでしょうか。その答えをヘブル人への手紙4章12〜13節が教えています。

「神のことばは生きていて、力があり、刃のよりもく、たましいと節と骨の分かれ目さえも刺し通し、心のいろいろな考えやはかりごとを判別することができます。造られたもので、神の前でれおおせるものは何一つなく、神の目には、すべてが裸であり、さらけ出されています。私たちはこの神にして弁明をするのです。」

 

神様のみ言葉は、私たちの心を明るく照らす鏡のようです。したがって、神様のみ言葉のみ前に出ると、たましいと霊、関節と骨髄の分かれ目さえも刺し通し隠されていたものが赤裸々に明らかになり、私は神様のみ前に罪人であることを悟るようになるのです。

人は、自分がどんな存在であるかを知っているかに応じて、どのような道を選択するかを決定することになります。神様の御言葉を通して、自分が罪人であるという事実を悟るようになれば、その次にはどのような道を選択するでしょうか。そのような人に、答えとして21節で「今は」から始まり教えています。

「今は、律法とは別に、しかも律法と預言者によってあかしされて、神の義が示されました。」

 

私たちが神様の御言葉を通して、自分が罪人であることを悟ったならば今、私たちが注目すべきのは「神様の義」ということです。では、「神様の義」は具体的に何を言っているでしょうか。すなわち、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信仰による神の義であって、それはすべての信じる人にえられ、何の差別もありません。」(ローマ人への手紙3:22)

 

すなわち、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信仰を神様の義と言っているのです。 「義」を神学的に定義すると、「正しい関係」です。神様はイエス・キリストをご自身と私たちとの関係を正しく立てる神様の義としてしたのです。そして、神様はその義の基準に何の差別もつけませんでした。

 

今日の本文は、私たちに与えられた神様の義が差別なく、具体的にどのように許可されたのか明らかにしています。

第一は、神様の恵みで与えられたものです。

「ただ、神のみにより、キリストイエスによる贖いのゆえに、なしに義と認められるのです。」(ローマ3:24

第二は、神様がイエス・キリストを供え物としたことで神様の義が与えられます。

神は、キリストイエスを、その血による、また信仰による、なだめの供え物として、公にお示しになりました。」(ローマ3:25

第三は、神様が私たちの過去の罪を見逃して下さったことで神様の義が与えられます。

それは、ご自身の義を現すためです。というのは、今までに犯されてた罪を神の忍耐をもって見のがしてられたからです」(ローマ3:25下)

 

神様と正しい関係を回復するというのは、神様と愛情のある関係を回復することを意味します。神様は私たちを愛し、ひとり子を惜しまず犠牲させるまで、より厳密に言えば、神様ご自身を死に許すまで愛されたのです。私たちが神様を愛するというのは、ひとり子を死に許すまで愛してくださったその愛に同意し、その愛をくださった神様だけを愛するということを意味するのです。それでは、我々が神様を愛するとき、行うべきのことがあります。それは、神様との関係を遠ざけるようにする罪と決別することです。肉体を愛し本能的に生きて、自己満足と自分の利益のために生きようとする自己中心の生活を清算することです。特に世を愛した生活を清算することです。

 

そして、より積極的に私たちが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は、神様が御子を死に許すまで、私たちに下さった愛に応えることです。私たちが神様の愛に応えないと、神様の愛は、もはや私たちに与えられた愛ではなくなるからです。

聖徒の皆さん!神様の愛、イエス様の愛は、この宇宙にも、この地球上のどこでも常に満たされています。その愛は、今この瞬間、この場にも満ちています。その愛は、今私の心の前にまで充満しています。問題は、自分の心を開くことです。つまり、自分の心を開いてイエス・キリストに自分を完全に任せることです。このように、神様の愛である主に満たされると世のどのようなものの前でも、私たちの心を奪われ、偶像崇拝に陥ることなく、世界を十分に勝ち、神様の喜びと栄光となる人生を生きる者になるでしょ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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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7] 하나님을 경외함이 사람의 본문입니다 [13] (로마서3:10-20) 장원규목사、ロゴスライフ教会

하나님을 경외함이 사람의 본분입니다(13)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바른 자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자세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미래의 방향을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의 복은 자세가 좋은 사람에게 넘쳐흘러 좋은 미래를 열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해 좋은 자세를 갖추면 하나님의 복은 무한히 그리고 풍성하게 임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인생에서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길 원하십니다. 그 이유는 자세를 바꾸면 미래가 바뀌고 좋은 미래를 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복주시기 앞서 백성들에게 먼저 요구하는 것은 우리의 자세를 바르게 세우는데 초점을 맞추십니다.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의 자세를 바르게 세우기 위해 사용하는 좋은 도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후에도 하나님을 향한 자세는 좋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그런 자세로 위대한 민족, 보배로운 성민으로 세울 수 없다는 판단 하에 그들의 자세를 바꾸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더 이상 노예가 아닌 왕의 자세로, 교만이 아닌 겸손한 자세로,원망이 아닌 감사하는 자세로, 의심이 아닌 믿음의 자세로 말입니다.

이렇듯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또한 동일합니다.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바른 믿음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바른 자세를 갖추었는지를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이 “두려움”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흐르는 중요한 하나의 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선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항상 너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믿음으로 광야의 길을 걸어가야 했고,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믿음을 가지고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두려움에 대한 두 가지의 태도를 반드시 갖추어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에 세상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하나님의 자녀의 삶은 오직 믿음으로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믿음이 아닌 눈에 보이는 물질의 힘으로 살아가야 하는 곳입니다. 세상은 물질의 힘을 가져야만 버틸 수 있고,편안하게 살 수 있고, 생존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 자연스럽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 광야생활을 연상하시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광야는 말 그대로 인간으로선 생존 불가한 환경입니다. 그런 곳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내신 것입니다. 광야의 길을 걸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에 자연스럽게 자리한 것도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인생의 그 어떤 문제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를 갖고 살아가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태도입니다.

성경 전체 흐르는 중요한 맥 하나가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지난 인류 역사의 가장 큰 불행은 세상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것이며 그분께 합당한 영광을 올려드리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루어지지만 이미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즉 모든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깊이 인정하고 그의 피조물인 인간은 두려움과 떨림으로 그의 모든 말씀에 온전한 순종의 삶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인생의 결론을 이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12:13)

성도 여러분, 시대를 불문하고 성경의 한결같은 인간을 향한 문제 제기는 이것입니다.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롬3:18)

인간 역사 이레 인생의 모든 불행의 시작이자 인생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게 된 원인도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 문제였습니다. 인간의 본분이 무너질 때 나타나는 현상은 인간은 자신중심이 되고, 자기 뜻대로 살고, 자기만족을 위해 살아갈 뿐입니다.하나님의 말씀은 안중에도 없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소중한 사명은 헌신짝처럼 버리고,하나님의 뜻과 의의를 이루는 삶에 대해 열정은 없고 현실 안주와 안전 그리고 쾌락에 빠진 삶을 살아갑니다. 이 모습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자연스럽게 맺는 열매들입니다.

꼭 기억합시다.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시기에 세상에 대해 담대함으로 살아갑시다.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시기에 하나님을 경외하며 두려움과 떨림으로 모든 말씀을 경청하고 마음과 목숨을 다해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데 힘써야 합니다. 그 길만이 광야 같은 세상 여정에서 거룩한 생존을 이어갈 수 있고, 언제 주님 오셔도 영광스럽게 주님을 공중에서 만날 수 있는 보배로운 성민이 될 것입니다

 

말씀과 삶이 어우러지는 로고스라이프 교회   

 

   

神様を恐れることが人間の本分です(13)

 

聖書における信仰とは、神様に向かう正しい姿勢のことを語っています。私たちの人生で姿勢が大切な理由は、それが未来の方向を決めるためです。つまり、神様の恵みは正しい姿勢の人にのみ溢れ、良い未来を迎えられるようになるのです。神様に向かう正しい姿勢を維持すると神様の祝福は無限に、そして豊かに私たちにのぞむようになります。そのために神様は私たちに人生において姿勢がどれだけ大切かを悟ることを願っておられます。その理由は、私たちの姿勢を変えることで未来が変わり、良い未来を切り開くことができるためです。神様は私たちを祝福される前に、私たち民に、私たちの姿勢を正しく整えることに焦点を置かれています。苦難は神様が私たちの姿勢を正しくさせるために用いられる良い道具です。

イスラエルの民は、出エジプトをした後にも神様に対する姿勢が良くありませんでした。神様は彼らがそのような姿勢で、偉大なる民族、尊い聖民として迎え入れることができないという判断の下、彼らの姿勢を変えることを決意されました。これ以上奴隷ではなく王の姿勢で、傲慢ではなく謙遜の姿勢で、恨みの姿勢ではなく感謝の姿勢としてです

このように今日を生きる私たちクリスチャンに対する神様の御心もまた同じものです。私たちが神様を信じるのであれば、正しい信仰の姿勢を持たなければなりません。神様に対する正しい姿勢を保てているかを測る基準となるのが、“恐れ”です。

聖書には全体を通貫している大きな流れが一つあります。神様は神様の民に向かって、“いつもあなたたちと共にいる”という約束の御言葉をくださいました。イスラエルの民はこの御言葉を信じて荒野の道を歩まなければならず、クリスチャンはまさにこの信仰をもって荒れ野のようなこの世を生きているのです。私たちが“神様がいつも共にしてくださる”という信仰で生きるときに私たちは恐れに対する二つの態度を必ず整えなければなりません。

 

一つは、神様が共にしてくださるために、この世を恐れない態度です。

私たちが生きる世界は神様の御子たちが神様の思い通りに生きることができる、そのような場所ではありません。神様の御子はその人生をただ信仰のみで生きていくのです。しかしこの世は信仰ではなく、目に見えるこの世のものの力で生きていかなければならない場所です。世界は物の影響力を持ってこそ耐えることができ、楽に生きることができ、生存できるところです。そのために私たちの心には自然とこの世に対する“恐れ”が腰を据えるようになります。

イスラエルの民が出エジプトした後の荒野での生活を思い出すとより理解ができるかと思います。荒野は言葉通り、人が生き延びていくことができない環境です。そのようなところに神様はイスラエルの民を導かれたのです。

 

 

荒野の道を歩くイスラエルの民の心に自然と湧き出たのも、“恐れ”です。神様が私たちと共にしてくださることを信じるのであれば、私たちは人生のどんな問題の前でも怖じけない態度で生きなければなりません。

 

二つ目は、神様が私たちと常に共にしてくださるために、私たちが神様を恐れる態度です。

聖書全体の大切な流れの一つの中に、創造主である神様の御前で、すべての被造物は神様を敬畏することです。過ぎた人類の歴史の中の最も大きな不幸は、世界万物を創られた神様を知らないことであり、値する栄光を捧げられず、向かいいれ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ことです。

今私たちに最も必要なものは、神様との正しい関係です。神様を信じない人々に神様との関係の回復はイエスキリストを通して神様を信じる信仰につながりますが、すでに神様を信じる人々にとって神様との正しい関係とは神様を恐れることです。つまりすべての創造主である神様の存在を認め、その被造物である人間は恐れとおののきをもってその御言葉に完全なる従順で神様を敬畏することです。そのためにソロモンは人生の結論を次のように語っているのです。

「結局のところ、もうすべてが聞かされていることだ。神を恐れよ。神の命令を守れ。これが人間にとってすべてである。」伝道者の書12:13

 

聖徒の皆さん、時代を問わず、人間に対する聖書の一貫した指摘は次のようなものです。

「彼らの目の前には、神に対する恐れがない。」ローマの人への手紙3:18

人間の歴史の中で、人生のすべての不幸の始まりであり、神様より審判を受けるようになった原因もまた、神様を恐れないこのような問題でありました。人間の本分が崩れてしまうときに起こる現象は、人間は自己中心的になり、自分の意をもとに生き、自分の満足のために生きるだけです。神様の御言葉は心になく、神様がゆだねられた大切な使命は投げ捨て、神様の意と義を成す人生に対する熱情は冷め、現実に対して安住する、快楽に溺れる人生を生きていきます。この姿が、神様を恐れない時に自然と結ばれる実なのです。

 

皆さん、必ず心に留めておきましょう。神様が常に私たちと共にしてくださることを信じ、世に対して勇ましく生きていきましょう。神様が私たちと共にしてくださるがために、神様を敬畏し、恐れとおののきをもって、御言葉を傾聴し、心と命を捧げて従順に従う人生を生きていくことに努め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の道のみが荒野のようなこの世を歩む過程において聖なる生き方を生きることができ、いつ神様が臨まれても栄光をもって神様を迎えられる尊い聖民となるでしょう。

 

 

言葉(ことば)生(い)きる」ロゴスライフ教会

[2018.06.10] 그렇다면 우리는 나으냐?[12] (로마서3:9-20) 장원규목사、ロゴスライフ教会

그렇다면 우리는 나으냐? (12)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명제는 자기 자신을 바로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인류 역사의 공통적 교훈은 인간의 모든 불행은 항상 자신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고 넘어서지 말아야 할 경계를 넘어서는 교만함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은 두 부류의 인생들에 대해 일관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부류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바르게 인식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정도를 벗어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겸손한 인생을 살아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복된 인생을 삽니다. 또 한 부류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망각하고 넘어서지 말아야 선을 넘어 교만한 길을 걸어 멸망과 저주의 인생을 산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를 향해 이렇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인간이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성경의 일관된 명제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자신을 모습을 바로 인식하지 못하면 절대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9-10)

성경이 인간에 대해 죄인이라 말하고 있다는 것을 구구절절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봅니다.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온전하신 만큼 우리도 온전하게 살라는 이 말씀 앞에서 자신은 온전하게 잘 살고 있다고 손들 수 있는 분계십니까? 또 주님은 우리를 향해 이렇게 명령을 하셨습니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마22:39)

이 말씀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말할 사람이 있습니까?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단 한 번이라도 성경을 제대로 읽었다면 단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주님의 말씀 앞에 무릎을 꿇었다면 오로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요, 소망이 없는 죄인이요,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뿐입니다.

우리 자신을 바로 인식하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자신을 바로 인식할 때에만 비로소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로 만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 내 욕심과 욕망을 채우는 것만을 구하는 인생으로 살다가 영으로 시작하여 육으로 끝을 맺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히 직시한 자만이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소원을 채워주는 도구나 수단이 아니라 구원자요, 인생의 길이요, 영생이신 그리스도만이 인생의 전부되시는 주로서 의 만남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신을 바르게 인식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주님을 위해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위해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직 하나님 말씀만을 따르고 순종하는 삶이었습니다. 오직 진리만을 따르는 삶이었습니다. 이렇게 진리만을 따라 살아가게 되면 그 사람이 머무는 모든 곳은 다 사랑이 넘칩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진리를 따라 살지 아니하면 그곳은 반드시 우상이 자리 하게 되는 것입니다. 돈과 권력이 중심이 되고 자신의 욕심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우상이 자리하는 곳에 나타나는 증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나타나는 증상의 반대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기쁨입니다. 그렇다면 우상을 따르고 있다는 증거는 무엇으로 나타나게 될까요? 불의를 따르고 불화하고 염려, 근심, 두려움 등이 대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산다는 것은 진리이신 주님으로 기뻐하고, 주님만 의지하며, 진리이신 주님을 위해 사는 것에 생명을 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 진리와 더불어 사는 사람은 모두를 유익하게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자 되심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주님을 30세 나이에 진리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죽는 희생의 밀알이 되어 우리가 죽음의 구렁텅에서 나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다는 이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바울 한 사람이 진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그 희생적은 삶은 로마제국의 역사를 바꾸어 놓고 말았습니다. 2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 세계가 그 복음의 열매를 누리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오직 주를 본받기 위해 자신의 온 몸을 그리스도에게 던진 사도바울의 영성처럼 우리도 진리이신 주님을 위해 주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기꺼이 걸어간다면 앞으로 우리 자손들은 대를 거듭하며 진리의 열매를 누리는 축복을 경험할 것입니다.

 

말씀과 삶이 어우러지는 로고스라이프 교회      

 

では、私たちは他の者にまさっているのでしょう(12)

 

人間にとって最も重要な命題は、自分自身を正しく認識する事です。 人類の歴史の共通の教訓があります。人間のすべての不幸は常に自分を正しく認識できず超えてはならない境界を越えて傲慢のせいでした。聖書は、二つの部類の人生に対して一貫して言っています。 一つ目は、自分がどのような存在なのかを正しく認識し、自分にえられた程度を逸しない人です。このような人は、控えめな人生を生きて、主のみを受けて福なる人生を味わいます。二つ目は、自分がどのような存在なのかを忘れて越えてはならない線を越えて傲慢の道をいて滅亡と呪いの人生を生きた人です。

今日の本文は、私たちに向かってこう言っています。 では、どうなのでしょう。私たちは他の者にまさっているのでしょうか。

人間が  自分自身を知るということは、聖書の一貫性のある命題です。 主を信じる私たちが、自分自身を見て正しく認識出来ないと絶対に真のクリスチャンになることができません。

では、どうなのでしょう。私たちは他の者にまさっているのでしょうか。決してそうではありません。私たちは前に、ユダヤ人もギリシヤ人も、すべての人が罪の下にあると責めたのです。それは、次のように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義人はいない。ひとりもいない。” (ローマ人への手紙3:9-10)

聖書が人間に対して罪人だと話していることがはっきり確認できるでしょう。例をあげましょう。

「だから、あなたがたは、天の父が完全なように、完全でありなさい。」(マタイ5:48)では、主が完全であるように、私たちも完全に生きなさい!という御言葉の前で、自分は完全に正しく生きていると言える方いますか?

「あなたがたに新しい戒めをえましょう。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愛したように、あなたがたも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ヨハネの福音書13:34)

この御言葉の前に、自分はその御言葉の通りに完全に従う人だったと堂々と言える方いますか。

さらに、主は、私たちに向かってこう命令をされました。

「あなたの隣人をあなた自身のように愛せよ。」(マタイの福音書22:39)

この御言葉の前で、自分が罪人ではないと言える人、いますか?一人もいないでしょう。一度でも聖書を正しく読んだ人なら、一度でも真剣に主の御言葉の前にひざまずいたならば、ひたすら確認できるのは、自分が死ぬしかない罪人であり、希望がない罪人であり、審判受けるしかない罪人であるという事実だけです。

私たち自身を正しく認識することがなぜ重要なのですか? 二つの理由があります。

 

第一は、自分自身を正しく認識する場合にのみ、初めてキリストを救い主としてうことができるからです。

イエスキリストを私の救い主として会わなければ、主に私の欲と願望を満たすものだけを求める人生で生き、霊で始まって肉体で端を結ぶでしょう。

 

 

創世記4章は人間のこのような実状に対して悟らせた一つの例を記載しています。

「セツにもまた男の子が生まれた。彼は、その子をエノシュと名づけた。そのとき、人は【主】の御名によって祈ることを始めた。(創世記4:26)

自分が死ぬしかない存在であることを認識した人だけが主の御名を本当に握り叫ぶということです。これを認識していない人たちは、死ぬことも知らず糖液のみより欲しいと祈り続けてノアの洪水の審判の警告が継続されるが貪欲に満ち、彼らの心には、主の警告を聞くことができなかったし、警告を無視した彼らは死に至るしかなかったのです。

自分が誰なのかを正確に直視した者だけが、イエスキリストが自分の願いを満たしてくれる道具や手段ではなく、救い主であり、人生の道であり、永遠の命であるキリストだけが人生のすべてである主としての出会いを持つようになるのです。

 

第二は、自分を正しく認識した瞬間から、私たちは、主のために生きることができるからです。 

では、主のために生きる事とは何でしょう。主が歩まれた道に沿って歩くことです。イエスはただ主の御言葉だけを従い、従順する人生でした。ただ、真理のみ従う人生でした。このように、真理のみ従い生きていくと、その人が留まるすべての場所は、すべて愛があふれます。  私たちが覚えておくべきことは  、私たちが理に沿って生きる事を油すると、そこには必ず偶像が生じる事になります。 金と権力が中心となって、自分の欲がその場を占めるようになります。偶像があるところに現れる事が何なのか知っていますか。主の御国が臨まれると現れる事の正反対の姿です。主の御は、聖の中で義と平安と喜びです。それでは、偶像に従っている証拠は何で現れるでしょう。不義にい、反目、心配、恐れ、などが代わりにすることになるのです。

主のために生きるということは、理である主に喜び、主だけり、理である主のために生きることに命をかける生活を生きることです。 なぜなら、主は真理であるからです。真理に沿って生きる人、真理と共に生きる人は皆を有益にさせます。こういうことができる理由は、「生きている理」に従うからです。

イエスが私たちの救い主である事を真実に信じるのであれば何をすべきでしょうか。主は30歳に真理のために命を出した道を歩いていました。そのようにイエスが死ぬ犠牲の種になり、私たちが死の洞窟から出て永遠の命を受ける事が出来たこの点を覚えなければなりません。

使徒パウロ、一人が真理のために自分の命を少しも大事と思わなかったその犠牲はローマ帝国の歴史を変える事になりました。2千年が過ぎた今も全世界がその福音の実を味わっています。

この時代を生きる私たちがイエスキリストの心を持って、ただ主を従うために自分自身をキリストに投げた使徒パウロの霊性のように、私たちも真理である主のために主が歩まれた道を進んで歩いていけば、今後、私たちの子孫は代を重ねて、真理の実を受ける祝福を経験しています。

 

み言葉(ことば)に生(い)きる」ロゴスライフ教会

[2018.06.03] 도덕적인 인간의 세번째 부류 – 율법주의자 (11) 장원규목사、ロゴスライフ教会

도덕적인 인간의 세번째 부류 – 율법주의자 (11)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실 때 모든 만물은 겉과 속이라는 두 형태로 만드셨습니다. 겉을 형식이라고 하며 속은 내용 또는 의미라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겉과 속 어디에 삶의 비중을 두고 사느냐에 따라 삶의 질과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겉모양에 더 치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겉이 아닌 속을 보는 것입니다. 겉을 치장하는 삶이 아닌 속을 단장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하나님을 겉을 보시는 분이 아닌 속을 보시는 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시선을 가진 사람을 일컬어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라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겉만 보는 것입니다. 진리와 진실을 겉으로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겉만 보고 판단하고 행동하게 되면 반드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빠질 수 있는 모습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겉모양에 빠져 사는 자를 가리켜 ‘율법을 의지하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이 도덕적인 인간이 빠질 수 있는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율법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겉모습만 보고 사는 율법주의자가 치중하는 삶의 모습 다섯 가지를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첫째는 “하나님 법을 의지하며” 삽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자랑하며”삽니다. 셋째는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삽니다. 넷째는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삽니다.

다섯째는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아이의 선생”으로 삽니다.

이와 같이 유대인들은 율법을 의지하고, 율법을 받았으며, 율법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완벽한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 어떤 흠도 없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겉모습을 한 꺼풀 벗겨 내고 그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가를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 속에 어떤 것을 담고 있는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롬2:21-24)

바울은 유대인들은 율법을 의지하고, 율법을 받았으며, 말끝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는 사람들인데 겉으로 보기에 완벽한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인데 실상 그 속은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한 자”였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는 자”였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는 자”였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는 자”였다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 자”였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사람처럼 행동하였는데 실제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심지어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는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결론적으로 전해주시는 말씀은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채우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는 사람, 자기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지 않는 사람은 율법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그리스도이라면 육체의 삶에 치중하는 삶만을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 육체를 거룩하게 구별하여 우리의 속사람 즉 하나님의 영을 마음에 온전히 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속과 겉이 점점 더 하나가 되어가야 합니다. 특히 속모양이 겉모양 곧 삶의 모습을 결정하기에 속 사람을 더 강건하게 해야 합니다. 항상 속에 생명이신 주님을 담아 모든 생각과 모든 행위가 주의 영이 역사하여 겉모습은 더 주님을 닮아가고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겉모습은 아무리 화려하고 좋게 보이는 율법주의자가 되어 모든 것은 헛되고, 거짓되어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말씀과 삶이 어우러지는 로고스라이프 교회

 

道徳的な人の特徴―良心(11)

 

神が万物を創造された時、すべての万物は心(内)とうわべ(外)という二つの形で造られました。うわべを形式と呼ばれ、心は内容や意味と言います。重要なのは心とうわべどこに生活の比重を置いて生きるかによって、生活の質と結果が変わるということです。問題は、多くの人が目に見える外観に、より重点を置いて生きる人が多いということです。

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人々の生活の方式は、信仰です。信仰に生きることは、うわべではなく、心を見せることです。うわべを飾る人生ではなく、心を整える人々がまさにクリスチャンと言えるでしょう。それで、神は自らこう言われました。

しかし【主】はサムエルに仰せられた。彼の容貌や、背の高さを見てはならない。わたしは彼を退けている。人が見るようには見ないからだ。人はうわべを見るが、【主】は心を見る。(サムエル記第一 16:7)

神はうわべを見るのではなく、心を見るみ方です。このように、神の視線を持つ人を信仰に生きる人と言います。では、罪とは何でしょう。うわべだけを見ることです。真理と真実はうわべに飾ることではありません。それで表面だけを見て判断し行動すると、結局罪を犯してしまうのです。このような姿が、今日のクリスチャンたちにありうる様子であることを私たちは忘れてはいけません。

使徒パウロは、外見に陥って生きる者を指して「律法に頼って」と言われています。このような姿が道徳的な人間が落ちる第三の部類の人々なのです。今日、一緒に読んだ本文は、律法に頼って生きていく、外見だけ見て生きる律法主義者が重点を置いて生活する様子、5つを私たちに紹介しています。

もし、あなたが自分をユダヤ人ととなえ、律法を持つことに安んじ、神を誇り、みこころを知り、なすべきことが何であるかを律法にえられてわきまえ、また、知識と理の具体的な形として律法を持っているため、盲人の案人、やみの中にいる者の光、愚かな者の導き手、幼子の師だと自任しているのなら 

(ローマ人への手紙 2:17-19)

第一は、「律法を持つことに安んじ」生きます。第二は、「神を誇り」生きます。第三は、「みこころを知り、なすべきことが何であるかを律法にえられて」生きます。第四は、「 極めて善いこと分別し」生きます。第五は、「 盲人の案人、やみの中にいる者の光、愚かな者の導き手、幼子の師だと自任し」生きます。

このように、ユダヤ人たちは、律法を頼りにし、律法を受け、律法を持つ人々です。

うわべで見ると完璧な神の人の姿です。どんな咎もない人のように見えます。しかし、彼らの外見を剥がし、その内面に何が入っているのかを見てみました。その内面にはどのようなものがあるのか、次のように述べています。

どうして、人をえながら、自分自身をえないのですか。むなときながら、自分はむのですか。姦淫するなと言いながら、自分は姦淫するのですか。偶像を忌みきらいながら、自分は神殿の物をかすめるのですか。律法を誇りとしているあなたが、どうして律法に違反して、神を侮るのですか。これは、「神の名は、あなたがたのゆえに、異邦人の中でけがされている」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

(ローマ人への手紙2:21-24)

 パウロは、ユダヤ人たちは、律法を頼り、律法を受けており、常に神のみ言葉を語る人たちなのに、うわべには完璧な神の人の姿なのに、実際その内面はどうなのか説明しています。

第一は、「人をえながら、自分自身をえない者」であること。第二は、「むなときながら、自分は者」であること。第三には、「姦淫するなと言いながら、自分は姦淫する者」であること。第四は、「偶像を忌みきらいながら、自分は神殿の物をかすめる者」であること。第五は、「律法を誇りとしていながら律法に違反して、神を侮異邦人の中でけがされている者」であったことです。

表面上は、神の人のように行動していましたが、実際には、神の栄光を覆って、神を冒涜している生活をしていたということです。パウロが私たちクリスチャンに結論として伝えている言葉は心に、イエス・キリストの真理を満たす人だけが真に神に仕える人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それで自分の中に、イエス・キリストがおられない人、自分の中に聖霊が宿っていない人は、律法主義者になれるしかないのです。

私たちが救われたキリスト者ならば肉体の生活に重点を置く生活だけで生きてはなりません。その肉体を聖く区別して、私たちの内なる人、つまり神の御霊を心に完全にうけとめる者にな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れで心とうわべが一つになって行くのでしょう。特に心がうわべ、すなわち生活の様子を決定するので、心をより丈夫にする必要があります。常に心に命である主をうけとめ、すべての考えと行いに主の御霊を働かせ、より主に似て、主に栄光を捧げ、主の御心が成し遂げられる人生になるべきでしょう。そうでなければうわべの華やかな律法主義者になって、すべてのものはむなしく、偽りの者になり、神の裁きのみ前に立つのでしょう。

 言葉1ことば 1いきる」ロゴスライフ教会

[2018.05.28] 도덕적인 인간의 두 번째 부류-양심(10)(로마서 2:12-16) 장원규목사

도덕적인 인간의 두 번째 부류-양심(10)

 

오늘 본문인 로마서2장12-16절 말씀은 도덕적 인간 중 두 번째 부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로 양심주의자입니다. 인간의 양심으로 모든 의와 선을 완벽하게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 전서를 통해 “선한 양심”, “착한 양심”, “깨끗한 양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왜 양심 앞에 수식어로 ‘선한’, ‘착한’, ‘깨끗한’을 붙인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인간이 죄를 지은 이후 인간의 양심 자체가 오염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인간 스스로 양심을 정화하고 회복시키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웅덩이에 고여 있는 썩은 물은 스스로는 정화할 수 없듯이 죄에 의해 타락한 인간의 양심도 이와 같습니다. 스스로 완전하게 회복될 수 없기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양심에 대한 성경의 인식입니다. 이 인식을 바탕으로 성경은 양심주의자를 두 부류로 나누어 말씀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법을 모르거나 무시하는 양심주의자입니다.

그런 부류의 양심주의자들에 대해 로마서2장12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하나님의 법이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든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법 없이 자기 양심만으로 의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법이 없으면 죄가 없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법이 없는 곳에 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인식이 없을 뿐입니다. 즉 죄에 대해 인식하지 못할 뿐이지, 죄는 죄로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잣대 없이 우리의 양심대로 살면 반드시 망하는 것 즉 죽은 것임을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법을 가진 양심주의자입니다.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롬2:12후)

양심주의자의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 자기 양심만으로 하나님의 법을 구현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즉 자기 힘, 자기 공로로 하나님의 말씀을 다 지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과연 그럴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하나님의 법을 ‘상대적으로’ 지킬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명령을 10%밖에 못 지키고 있는데 자신은 잘 지킨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만족, 자기 착각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드러내는 의는 상대적인 것인데도 그것이 절대적이 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의인이라 착각하고 있다가 결국 심판을 당하고 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행함이 상대적인 것이 아닌 절대적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3:28)

인간은 죽었다 깨어나도 율법을 다 지켜 온전해 질 수가 없습니다. 그럼 우리는 의로운 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의로운 자가 될 수 없다면 의로우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인생이 되고 그런 인생은 다 심판 아래 놓이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는 죄인인데 영생의 삶을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도저히 그 어떤 가능성을 찾을 수 없는 멸망자 인생일 뿐입니다. 그런데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의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의롭다’라고 여겨주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약속은 너무나 감격적인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부족한 의를 주님께서 다 채워 주신다는 사실을 정말 깨닫는다면 이 사실을 정말 믿는다면 지금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 주님께 감사하면 기쁨과 순종의 삶 외에는 다른 삶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성도 여러분 마음속에 기쁨이 있으십니까? 감사가 있으십니까? 기쁨과 감사는 사라진지 오래고 혹시 답답하고 무미건조하며 무거운 부담만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항상 기뻐하고 늘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라시는데 과연 여러분들은 요즘 행복하십니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세상이 점점 살기가 힘들어지고 어려워지기 때문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만 정말 세상이 점점 살기 힘들고 어려워져서 우리가 기쁨과 감사를 잃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세상이 좀 나아지면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 수 있게 될까요? 행복해 질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이 바뀌어야만 기뻐하며,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이 바뀌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뀌어야만 합니다. 세상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를 계수해 보도록 합시다. 그리고 넘치는 감사를 가지고 한 주간 힘 있게 사시고 다음주 하나님 전으로 나아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과 삶이 어우러지는 로고스라이프 교회

 

道徳的な人の特徴―良心(10) 

本日の本文、ローマ人への手紙2章12-16節のみ言葉は、道徳的な人の二つ目の特徴について話しています。所謂良心主義者のことです。人の良心ですべての義と善に完璧に至ることができるのだと信じている人たちです。

使徒パウロはテモテへの手紙を通して、“正しい良心”、“善い良心”、“きよい良心”と強調しています。パウロは何故、良心の前に修飾語として‘正しい’、‘善い’、‘きよい’をつけたのでしょうか。その理由は人が罪を犯してからは人間の良心そのものが汚染されてしまったからです。主の助けがなくては人間自ら良心を浄化して回復させるのは不可能だからです。水溜りの腐った水が自然に浄化されないように罪によって堕落した人間の良心もそうです。自ら完全に回復できないため、主の助けが必要なのです。これが、良心に対する聖書の認識です。この認識のもとに聖書は良心主義者を二つに分けて言います。

一つ目は、主の法を知らない若しくは無視する良心主義者です。

このような良心主義者に対してローマ人への手紙2章12節はこう言われています。“律法なしに罪を犯した者はすべて、律法なしに滅び、”

主の法が伝わらなかったがために知らない場合であれ、意図的に主の法を無視してしまう場合であれ、主の法なしに自分の良心をもって正しく生きぬけると思っている人たちです。法のないところに、人に罪をあてがう術はありません。正確に言えば、法が無い所には罪がないというより、罪に対する認識がないといえます。すなわち、罪を認識できないだけで、罪はそのまま残っ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ですから、主の法、主の基準なしに良心のままに生きると必ず滅びる、つまりは死ぬのだと聖書では明らかに言われています。

二つ目は、主の法を持っている良心主義者です。

“律法の下にあって罪を犯した者はすべて、律法によってさばかれます。”(ローマ人への手紙2:12後)

良心主義者の二つ目の部類の人は、主の法を持っています。ところが、問題はこのような部類の人の特徴は主の恵みなしに自分の良心だけで主の法を成し遂げることができるのだと信じている人です。即ち、自分の力、自分の働きで主のみ言葉をすべて守れるのだと信じている人です。本当にそうなのでしょうか。それは、ありえません。主の助けがないと、主の法は‘相対的に’守るようになるからです。このような人は主の命令を実際は10%従っているのに自分はよく従っているのだと思ってしまうのです。自己満足、錯覚に陥っているのです。自分が現す義は相対的にすぎないのに、それが絶対的な義だと思うことです。そして、自分自身を義人だと勘違いしてしまい、結局は裁かれます。主がおっしゃる行いは相対的ではなく絶対的なことであることを知るのが大切です。

では、私たちは何をすればいいのでしょうか。

“人が義と認められるのは、律法の行いによるのではなく、信仰によるというのが、私たちの考えです。”(ローマ人への手紙3:28)

人間は決して律法を完全に守って義に至ることはできません。では、私たちは義になる者になれないのでしょうか。義になる者になれないと義である主の御前に行けないし、主と共に歩めなくなりますし、そのような人生は裁きに至ってしまいます。律法を完全に守れない罪人で永遠なるいのちを得るのは不可能です。  私たちは到底どのような可能性も生み出せない滅亡者の人生なのです。ところが、義である主が主に認められる義の道を開いて下さったのです。それが、主の義である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れば誰でも“義である”と認めて下さるというみ言葉です。この約束は真に感極まりないみことばではないでしょうか。ですから、私たちの至らぬ義を主が全て満たして下さるということを本当に悟って本当に信じるなら、今どのように生きるのでしょうか。ただ主に感謝し、喜んで聞き従う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だからこそ、使徒パウロはこのように言ったのです。

   “いつも喜んでいなさい。絶えず祈りなさい。すべての事について、感謝しなさい。これが、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あなたがたに望んでおられることです。”(Ⅰテサロニケ人への手紙5:16-18)

皆様、この時分、喜びはございますか。感謝はおありですか。喜びと感謝はなくなり、ともすると、苦しくて枯れてしまってただ重荷だけが残ってい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主はいつも喜んで、すべての事に感謝し、幸せであるようにおっしゃるのですが、皆様はいかがでしょうか。幸せでしょうか。

もしそうではないなら、どうしてだと思われますか。世で生きるのが段々厳しくなっているからでしょうか。多くの人たちがそう言いますが、本当に世の中が厳しくて喜びと感謝をなくしてしまったのでしょうか。世の中の状況がすこし生きやすくなったら喜んで感謝しながら生きることができるのでしょうか。幸せになるのでしょうか。そうではありません。世が変わらないと喜び、感謝し、幸せに生きることはできないと思いがちですが、そうではありません。世か変わるのはなく、私が変わるのです。世に問題があるのではなく、自分に問題があるのです。

本日、み言葉を聞きながら、主に与えられたすべての恵みを数えてみましょう。そして、溢れんばかりの喜びをもって一週間力ある生活を営み、来週主の宮に来て、主が最も喜ばれる感謝をもって礼拝を捧げる私自身と皆様となりますようにお祈りいたします。

み 言葉1ことばに 1いきる」ロゴスライフ教会

 

[2018.05.20] 경건의 능력으로 살고 있습니까?(디모데후서 3:1-5) 장원규목사

경건의 능력으로 살고 있습니까?

말세의 특징을 설명하면서 등장하는 단어가‘고통’입니다. 왜 말세가 고통으로 설명 되어질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의 확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어떠한가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경건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사도바울이 지적하는 경건의 모양만 있는 삶은 어떤 삶일까요?  자기 사랑입니다. 자기 사랑이란 자신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자기를 위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는 좋은 뜻으로 사용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자기 사랑의 대표적인 행위가 우상숭배였습니다.

“내가 본즉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여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어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도를 빨리 떠났기로”(신명기 9:16)

“또 그들이 자기들을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이르기를 이는 곧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한 신이라 하여 하나님을 크게 모독하였사오나”(느헤미야 9:18)

분명 하나님은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밑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신명기 5:8)

그런데 자기를 사랑하면 자기에게 집중하게 되고 자기를 위해서 무엇을 하면 좋을까 하면서 하는 첫 번째가 우상을 만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요구하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말세에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자랑하며 교만합니다. 이기적인 이 모습은 자기 사랑으로 함축됩니다. 자기 사랑은 공동체를 손상시키는 죄들로 이어지는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존재가 자기를 사랑하면 결국 하나님이 사랑하라고 주신 이웃들과도 사랑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쾌락을 하나님보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사랑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경고하신 말씀이 말라기 1장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더러운 떡을 드리면서, 눈 먼 희생 제물을 바치면서 그것이 악하다고 생각하지 아니하는 백성을 향하여 헛된 제사를 하지 못하게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며 그 제사를 받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참 무서운 말씀입니다. 이것이 단지 이스라엘 백성만의 모습일까요? 지금 이 말씀을 읽고 있는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능력은 부인하는 자는 복음에 대한 바른 믿음이 없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없는 자입니다. 내가 이렇게 살고 있다면 그런 삶에서 떠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입으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하나님보다 자기를 사랑하여 결국 경건의 모양만으로 살고 있다면 우리는 이제 경건의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떠십니까? 경건의 모양과 함께 경건의 능력이 드러나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경건의 능력을 얻을 수 있을까요?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디모데후서 3:16).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敬虔の力で生きていますか 

世の終わりの時の特徴を説明する際出てくる単語が「苦痛」です。なぜ、世の終わりが苦痛で説明されるでしょうか。結論から言うと敬虔の形はあるが、敬虔の能力が無いからです。主は我々を愛されました。その愛の印がまさにイエスキリストです。しかし、主を信じる我々はどうでしょうか。私たちが主を信じるならば敬虔の能力があるはずです。今日の御言葉の使徒パウロが指摘している敬虔の形だけある人生はどんな人生でしょうか。

自己愛です。自己愛とは自分が自分の主人になることです。聖書に‘自分の為’と記載された内容で良い意味で使われた事はほとんどありません。自己愛の代表的な行為が偶像崇拝です。

“私が見ると、見よ、あなたがたはあなたがたの神、【主】に罪を犯して、自分たちのために鋳物の子牛を造り、【主】があなたがたに命じられた道から早くもそれてしまっていた。”(申命記9:16)

“彼らが自分たちのために、一つの鋳物の子牛を造り、『これがあなたをエジプトから導き上ったあなたの神だ』と言って、ひどい侮辱を加えたときでさえ、”(ネヘミヤ記9:18)

  確実的に主は自分のため偶像を作らないよう言いました。

“あなたは、自分のために、偶像を造ってはならない。上の天にあるものでも、下の地にあるものでも、地の下の水の中にあるものでも、どんな形をも造ってはならない。”(申命記5:8)

しかし、自分を愛すると自分に集中することになり、自分のために何をすれば良いかを考える初めの事が偶像を作ることです。主が主の民に命じたのは主を愛することです。主に対する愛は心を尽くして、まことを尽くして主におのれを捧げる事だと記載されています。しかし、世の終わりの時の人たちは自分を愛し、お金を愛し、自慢し、傲慢に陥ります。利己的なこの姿は自己愛で現れます。自己愛は共同体を崩す罪人になりますが“不遜な者、神をけがす者、両親に従わない者、感謝することを知らない者、汚れた者になり、情け知らずの者、和解しない者、そしる者、節制のない者、粗暴な者、善を好まない者になり、裏切る者、向こう見ずな者、慢心する者”等です。

主を愛すべき存在が自分を愛すると結局主が愛し合いなさいと言われた隣人とも愛する事が出来ない姿を見せます。これで終わらず“快楽を主より愛する事”になります。つまり、自己愛は主より他をもっと愛する事です。

この全てが敬虔の姿はあるが、敬虔の能力を認めない者たちの姿です。敬虔の姿だけあり、能力が無かったイスラエルの民に対して警告した御言葉がマラキ書1章に記載されています。主は汚れたパンを捧げながら、盲目の獣をいけにえにささげながらそれが悪いと思わない民に対して、“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祭壇に、いたずらに火を点ずることがないように、戸を閉じる人は、だれかいないのか。わたしは、あなたがたを喜ばない”とおっしゃいました。恐ろしい御言葉です。これがただイスラエルの民だけの姿でしょうか。

今、この御言葉の前にいる私たちにおっしゃいます。敬虔の姿はあるが、能力を認めない者は福音に対して正しい信仰を持っていない者です。キリストの救いの能力を信じない者です。私が、貴方がこの姿をしているのであればその姿から離れるべきです。主と信じながら、言葉ではキリスト者だと言いながら主より自分を愛し、結局敬虔の姿だけで生きているのであれば、私たちは今、敬虔の能力を回復すべきです。皆さまの人生はどうでしょうか。敬虔の姿と共に能力がありますか。私たちはどうすれば敬虔の能力を得る事が出来ますでしょうか。

一つ目、主の御言葉から得る事が出来ます。

 “聖書はすべて、神の霊感によるもので、教えと戒めと矯正と義の訓練とのために有益です。それは、神の人が、すべての良い働きのためにふさわしい十分に整えられた者となるためです。(テモテ第二3:16)  主の御言葉が私たちに力を下さいます。

二つ目、祈りです。

敬虔の姿はあるが能力が無かった人々のたとえ話をイエスがマルコの福音書を通して教えて下しました。マルコの福音書9章は霊に取りつかれた息子をイエスが治した事が記載されています。霊に取りつかれた息子を父親が連れて来た時、弟子たちは治せませんでした。結局イエスに連れて来て治されました。その後、弟子たちが聞きます。“どうしてでしょう。私たちには追い出せなかったのですが。”主が答えます。“この種のものは、祈りによらなければ、何によっても追い出せ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하主を信じながら、しかし祈らないのであれば敬虔の姿があるが能力が無い人生を生きるしかありません。

  海に住んでいる魚が生きているうちにはしょっぱくありませんが、不思議に死んだ魚に塩をかけるとしょっぱくなります。これを私たちの霊的状態に適応して見ると姿を持っていれば能力もただで着くものでは無いことを分かります。たまには敬虔の姿で私たちは間違って思う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主は確実的におっしゃっています。“こういうわけで、あなたがたは、実によって彼らを見分け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わたしに向かって、『主よ、主よ』と言う者がみな天の御国に入るのではなく、天におられるわたしの父のみこころを行う者が入るのです。”(マタイの福音書7:20-21)

   実で分かると言います。私たちは今、敬虔の姿でここに座っています。これで満足するのではなく敬虔の能力がある人生に向かって歩みましょう。御言葉と祈り無しでは主に歩むことは出来ません。主の能力を得ることも出来ません。

“神の国はことばにはなく、力にあるのです。”(コリント第一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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