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9.23] 우리는 하나님 안에 또한 즐거워합니다 [22] (로마서 5:9-11) ロゴスライフ教会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합니다 (22)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인이라는 말을 워낙 자주 쓰다 보니 이 말이 더 이상 우리에게 충격적으로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죄인이라는 이 한 마디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무디어져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앞에 인간이 죄인이라면 그것은 곧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원수라고 여기신다면 인간은 고스란히 멸망을 받아야만 하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선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원수를 오히려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부터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던 우리를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제물 삼아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정말 믿기 힘들고 어려운 위대한 사랑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은 자임을 믿는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그 엄청난 사랑을 주신 하나님께 기쁨이 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롬5:11)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한다는 것은 이젠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실 때 말로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독생자를 내어주시는 아주 구체적인 행위로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사랑을 받았기에 우리 또한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 관념적이거나 말만 기뻐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5장1-4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네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화평을 누리는 삶, 둘째로 은혜를 누리는 삶, 셋째로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삶, 넷째로 환난 중에서 소망을 이루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삶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의미가 아닌 이 모든 삶이 다 지금의 삶의 현장에서 누리고 이루어야 하는 삶이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당에 앉아 예배를 드릴 때는 다 거룩해 보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진위는 예배당에서가 아닌 삶으로 드러나기에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끝까지 삶을 잘 지키라 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잘 지키라는 것에 있어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한 예를 든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분명 하나님의 평화를 얻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삶의 현장입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은 평화 할 수 없는 수많은 이유와 문제들이 끝임 없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우리는 평강이신 주님이 함께 계시므로 평화 할 수 없는 그 이유와 문제는 내 문제가 아니기에 주님께 맡깁니다. 바로 이렇게 주님께 맡기는 것이 주님을 진정으로 믿는 믿음이고 이 믿음이 작동될 때 하나님은 일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니 먼저 마음에는 근심도 두려움도 없는 평강이 임하게 되고, 하나님이 일하시니 내가 할 수 없었던 그 일들을 능력으로 해결해 주시는 기적들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자신의 내면과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들어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삶으로 드러나지 않는데도 평화를 얻었다고 여기는 것은 자기최면에 걸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기에 예배당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드리고 찬양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고백입니다. 그 고백이 진실인지는 삶의 현장에서 결판이 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들어 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예배요. 아름다운 찬양이자 거룩한 기도인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분명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으로 원수의 관계가 풀어지고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안에 즐거워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삶의 현장에서 어떤 환경을 만나도 평강을 잃어버리지 않고, 은혜를 누리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어떤 환난 가운데서도 소망을 꼭 붙잡고 환난을 견뎌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수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 인해 평화와 은혜와 영광과 소망을 얻었음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삶의 현장에서 날마다 말씀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말씀이 나를 지배하고 다스려서 말씀의 역사하는 삶이 되어 하나님의 평화를 이루고,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나며, 하나님의 소망을 품고 좋은 미래를 열어가는 복된 인생이 될 것입니다.

 

말씀과 삶이 어우러지는 로고스라이프 교회   

 

私たちは神様によって喜びます (22)

人間は皆神様の御前で罪びとです。しかし私たちが罪びとという言葉を頻繁に使うことによって、この言葉が大して衝撃的に感じられなくなりました。罪びとというこの言葉がどのような意味を持ち、どのような結果をもたらすのかについて気づかずに生きることが多々あります。それだけ私たちが鈍っ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神様の御前で人間が罪人であるなら、それはつまり神様と対敵し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神様が人間を敵としてみなすなら、人間は滅亡しなければならない、そのような存在です。しかし神様はどうされたでしょうか。神様はそのような敵をかえって神様の子供としてみなしてくださいました。それは神様が私たちを創られた当初より愛されていたためです。しかしその愛に気づかなかった私たちのためにその一人子を捧げものとし、私たちとの関係を回復させてくださいました。信じがたく、また偉大な愛です。このような神様の驚くべき愛を受けている者であると信じるならば、私たちはどのような生を生きることで、その偉大なる愛を下さった神様に喜びとなる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か。パウロは次のように語ります。

 

「そればかりでなく、私たちのために今や和解を成り立たせてくださった私たちの主イエス · キリスト によって、私たちは神を大いに喜んでいるのです。」ローマの人への手紙511

 

神様の中で、神様によって喜ぶのです。神を大いに喜ぶということは、すべての人生の領域で神様によって喜ぶということを意味します。神様は私たちを言葉だけで愛してくださっ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一人子を差し出してくださるという、とても具体的な行為によって愛してくださいました。このような愛を受けたからこそ、私たちもまた、神様の中で喜ぶことが観念的な、または口先だけの喜びになってはいけないのです。

ローマの人への手紙1-3節は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者たちに四つのことを語っています。まず初めに、和平を享受する人生、二つに恵みに導き入れられた人生、三つ目に神の栄光を望んで大いに喜ぶ人生、四つ目に災いの中でも希望によって喜ぶ人生です。このような人生は抽象的で観念的な意味ではなく、すべて今生きている人生の各処で享受し成すべき人生であることを語っています。

 

 

私たちが礼拝堂に座って礼拝を捧げているときには皆聖なる者に見えます。しかしその信仰の真偽は礼拝堂ではなく人生の形として現れるために、神様は私たちにその人生を固く守ることを命じておられます。私たちの人生をしっかりと守るということにおいて、その意味を理解するために一つ例をあげると、私たちが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と、必ず神の平和を享受する人になるということを挙げられます。問題は私たちの人生の現場においてです。私たちの人生は平和にはなれない数々の理由と問題が限りなく起き続けます。しかし私たちは平和の神様が共にしてくださるために、平和になれない理由と問題を神様に預けることができます。このように、神様に託すことが神様を真に信じる信仰であり、この信仰を持つ時に神様は働かれるのです。神様が私たちと共にしてくださるために、まず心には恐れも不安もなく平和がもたらされ、神様が働かれるために私にはできなかったことを神様の御力で解決してくださる奇跡が起きます。神様の平和が自分の内面と人生の中で具体的に現れるのです。まさにこのような姿が人生に表れていないのにも関わらず、平和を得たとみなすことは、自分を偽っていることです。

私たちが神様を愛するために、教会に来て礼拝を捧げ、祈りを捧げ賛美を捧げますが、これは神様に捧げる告白です。その告白が本当であるかは人生の現場で決まるものです。よって私の人生の中で神様が生きておられることが表れることが最も美しい礼拝であり、美しい賛美であり、聖なる祈りなのです。これはどういう意味でしょうか。私たちはかつて神様の敵であった人々です。神様の一方向の愛によってこの関係が解決され、喜べるものとなりました。神様の中で喜ぶ人生を生きることは、人生の現場どのような環境にいても心の平和を保ち、恵みによって導かれ、神様の栄光を表し、どのような災いの中にいても希望を離さず耐えしのぐことです。

 

神様の敵から、神様の愛によって神様の子供になったことで、平和と恵みと栄光と希望を得たことを信じますか。そうであるなら人生の各処で日々自分を否定し、死な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うすることで御言葉は私を治め、動かし、御言葉が生きる人生となって神様の平和を成し、神様の恵みが働き、神様の栄光が表れ、神様の希望を抱いて良い未来を切り開いていく恵まれた人生となることでしょ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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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6] 바른 믿음은 이 은혜 안에 들어갑니다[21] (로마서 5:2-8) ロゴスライフ教会

바른 믿음은 은혜 안에 들어갑니다 (21)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하나님의 바른 관계를 맺게 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되면 주어지는 특권이 하나님으로부터 평화가 임하게 되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게 합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5:2)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에 굳게 서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감을 얻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움에 거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여기서 은혜가 임한다고 하지 않고 아예 은혜 속에 들어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일까요? ‘은혜’를 헬라어로 ‘카리스’라고 하는데 성경은 이 ‘카리스’가 여러 의미로 쓰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이 ‘카리스’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지 그것은 알며 이 은혜 안에 들어감의 축복이 무엇인지를 알고 또한 우리는 그 은혜를 더 깊은 누리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카리스는 ‘은혜로운 말’입니다.

누가복음4:21-22절을 보면 이런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는데 주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을 은혜로운 말임으로 그들을 다 놀랐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은혜로운 말’ 카리스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리는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목마름이 있어 읽고 싶고 읽으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하나님이 말씀을 들리니까 하나님의 그 깊은 사랑을 느끼고 경험하면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 안에 거하는 행복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둘째로 카리스는 ‘사랑’입니다.

누가복음2장52절을 보면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예수님께서 지혜와 키가 자라가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랑스러워’에서 사랑‘카리스’로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 받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됩니다. 이 사랑은 인간의 존재의 근원입니다. 이 사랑을 받은 자만이 참사람의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셋째는 카리스는 ‘칭송’입니다.

사도행전2장47절에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여기서 칭송을 ‘카리스’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께 칭찬과 격려를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자기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절망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 자신을 잊고 살아갈 때는 스스로 그럴듯해 보이지만 말씀을 통해 내 속을 들여다보면 얼마나 추한 모습을 담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며 절망할 때 그런 우리를 향해 하나님은 격려해 주고 계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넷째로 카리스는 ‘마음’입니다.

빌립보서2장5절을 보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여기에서 ‘마음’이 카리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곧 주님의 마음을 얻은 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마음은 자신을 낮추시고 오직 하늘 아버지의 뜻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시는 겸손한 마음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겸손한 마음이셨습니다. 인간의 불행의 시작은 교만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되면 우리 또한 주님의 마음을 가진 자가 되어 겸손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겸손한 마음을 가진 자의 삶을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셔서 부족함이 없게 하시고 모든 위험에서 지키시며 때가 되면 반드시 그를 높이시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다섯째로 카리스는 ‘기쁨’입니다.

빌레몬서1장7절을 보면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기쁨’이 카리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하나님의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소유를 얻어 잠시 얻는 기쁨이 아니라 기쁨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관계의 회복에서 오는 기쁨은 하나님으로 인해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는 이 기쁨은 환경과 상황에 따라 비롯되는 것이 아니기에 불평과 불만의 상황 가운데 있다 해도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에 그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는 그 기뻐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바르게 회복되면 어디서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하든지 화평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 세상을 살면서 이것보다 더 행복한 삶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런 삶이야말로 참된 신앙의 맛이요 멋입니다. 하나님만 온전히 믿는 믿음에 굳게 서서 험악한 세상 삶 가운데 이런 멋지고 기쁨 넘치는 행복한 인생길을 걸어가시길 축원합니다.

 

말씀과 삶이 어우러지는 로고스라이프교회

 

正しい信仰は、この恵みの中に入ります (21)

 

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信仰は、神と正しい関係を結ぶようにします。神と正しい関係を結ぶと、与えられる特権として神から平和が臨まれ、神の恵みに入るようになります。

『またキリストによって、いま私たちの立っているこのみに信仰によって導き入れられた私たちは、神の光を望んで大いに喜んでいます。』(ローマ人への手紙5:2)

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私たちが信仰に堅く立つと、神の恵みの中に導き入れられ、神の栄光を望み喜ぶ生活を送るようになります。ここで恵みがあると言わずに、最初から恵みの中に入ると言われています。それでは、ここで言う神の恵みとは何でしょうか。「恵み」をギリシャ語で「カリス」と言いますが、聖書では、この「カリス」が複数の意味で使われています。聖書が言っているこの「カリス」がどの意味で使われているか、それを理解するとこの恵みの中に入る祝福が何なのかを知り、また私たちはその恵みをより深く味わう生活を送ることができます。

最初にカリスは「恵みの言葉」です。

ルカによる福音書 4:21-22節を見ると、このような内容が記録されています。

『イエスは人にこう言って話し始められた。「きょう、聖書のこのみことばが、あなたがたが 聞いたとおり實現しました。」みなイエスをほめ、その口から出て来る恵みのことばに驚いた。 そしてまた、「この人は、ヨセフの子ではないか。 」と彼らは言った。』

イエスは、会堂に入って、神の言葉を述べ伝えましたが、主の口から出て来る言葉が恵みの言葉で彼らが皆驚いたということです。ここで「恵みの言葉」カリスです。どういう事でしょうか。神のみ言葉が聞こえるのは、神の大いなる恵みです。神の恵みが臨むと、神の言葉に渇きを感じ、より読みたくなり、読めば読むほど、生きておられる神のみ声が聞こえるようになります。神の御言葉が聞こえるから神のその深い愛を感じ経験しながら、神との深い交わりの中に留まる幸せ者の生活を送るようになります。

 

第二にカリスは「愛」です。

ルカによる福音書2章52節を見ると『イエスはますます知惠が進み、背たけも大きくなり、神と人とに愛された。』記されています。イエスは知恵と背が伸びて、神と人とにより愛されたと書いてあります。ここで「愛」が「カリス」を意味します。私たちが神の恵みを受ける瞬間から、神の愛を受ける存在になります。この愛は人間の存在の源です。この愛を受けた者だけが真の人生を送ることができます。

第三は、カリスは「称賛」です。

使徒の働き2章47節に『神を美し、すべての民に好意を持たれた。主も日救われる人を仲間に加えてくださった。』ここで称賛を「カリス」と言います。私たちが神から恵みを受けたというのは、神に称賛と励ましを受けたということを意味します。自ら自分の中を深く見てみると、絶望的な面が多くあります。自分自身を意識せず多忙な生活を送るうちは、自らある程度満足しますが、み言葉を通して自分の中を除いてみると、どれほど醜い姿をしているかわかりません。このような姿を見て絶望するとき、このような私たちに向かって、神は励まして下さるみ方です。これが神様の恵みです。

第四に、カリスは「心」です。

ピリピ人への手紙 2章5節を見ると『あなたがたの間では、そのような心構えでいなさい。それはキリストイエスのうちにも見られるものです。』ここで「心」がカリスです。私たちが、神の恵みを受けたというのは、すなわち主の心を得た者になったということを意味します。主の心は、自分を低くし、ただ天の父なる神の御心のために十字架で死ぬまで従順した謙遜な心でした。一言で謙遜な心でした。人間の不幸の始まりは、高慢な心から来ているのです。

私たちが、神の恵みを受けるようになると、私たちも主の心を持った者になって謙遜な心を持つようになります。謙遜な心を持った者の人生を神は常に共にいて下さり、足りないことのないように、またすべての危険から守られ、時が来れば、必ず彼を高められる祝福を味わえるようにします。

第五に、カリスは「喜び」です。

ピレモンへの手紙 1章7節を見ると『私はあなたの愛から多くの喜びと慰めとを受けました。それは、聖徒たちの心が、兄弟よ、あなたによって力づけられたからです。』ここ言っている「喜び」がカリスです。私たちが、神の恵みを受けると神の喜びを得るということです。所有物を得てしばらく得る喜びではなく、喜びの源である神との関係の回復から来る喜びは神のために、常に喜ぶ生活を送るようになります。神から来るこの喜びは、環境や状況に応じないので不平や不満の状況の中であっても、神が共におられるので、神から来るその喜びの中に居られます。

 神との関係が正しく回復されると、どこで、誰に会い、何をしても平和を保つことができます。神の恵みの中に留まれ、神の栄光に参加できます。皆さん、世を生きながら、これより幸せな人生がどこにあるでしょうか。このような生活こそ真の信仰の味であり素晴らしいことです。神だけを信じる信仰に堅く立って険しい世の中で、このような素晴らしい、喜びあふれる幸せな人生の道を歩むよう祝福しお祈りします。

 

「み言葉(ことば)生(い)きる」ロゴスライフ教会

 

        

[2018.08.26] 순종과 충성의 삶 (열왕기하 9:1-10) ロゴスライフ教会

순종과 충성의 삶

오늘 말씀에는 선지자의 제자 중 하나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름도 없고 나이도 없고 그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한 일은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를 왕으로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엘리사가 이를 불러 사전 설명도 없이 기름병을 가지고 가라고 합니다. 가서 예후를 찾아 그를 데리고 골방으로 들어가 기름병을 그의 머리에 부어 그를 하나님이 세우신 왕으로 삼으라는 일을 맡깁니다. 그리고 문을 열고 도망하되 지체하지 말라고 합니다. 상황은 긴박하고 위험한 상황입니다. 사전 발각이나 제대로 일처리를 못하면 죽음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연습을 한 것도 아닙니다. 이 사람은 청년이라고도 하고 소년이라고 하니 어떤 일을 감당하기에 경험이 많은 것도 노련한 나이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그 말을 듣고 지체하지 않고 갑니다. 그리고 임무를 수행합니다.

저는 이 소년의 모습을 보면서 두 가지를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순종이고 하나는 충성입니다.

그는 엘리사의 지시가 내려졌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예후를 세워서 아합의 집을 다 멸절하겠다는 사명을 전하는 것이, 그 일을 감당할 사람을 세우러 가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소년은 엘리사의 말에 순종하여 달려갑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음으로 하나님께 버림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말렉을 치고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는 좋은 것은 남기고 가치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일에 대해서 사무엘에게 책망을 듣자 그는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해서였다고 변명을 합니다. 결국 사무엘은 사울에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사무엘상 15:22-23)

오늘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이 소년은 순종함으로 예후를 세우는 일에, 그리고 예후를 통해 아합의 집을 진멸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쓰임 받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데 그 사람들의 공통점은 바로 순종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 소년을 통해 충성됨을 보고 싶습니다.

이 소년은 장관들이 모여 앉아 있는 자리에 당당히 나가 할 말을 알립니다. 예후를 불러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며 엘리사가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선포합니다. 충성이란 히브리어로는 진실이며 헬라어로는 신실함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충성이란 일을 맡긴 사람의 뜻대로 해 내는 것입니다. 내 주관, 내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맡긴 자의 뜻을 헤아려 그 뜻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입니다. 맡겨진 일을 마음을 다해 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에 충성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맡기신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그 뜻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충성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살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충성인 것입니다. 남들보다 덜 받았다고, 내 형편이 남들보다 좋지 않다고 투덜거리며 남탓, 상황탓을 하고 있다면 충성과는 거리가 먼 삶입니다.

진실되고 신실한 사람은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멀리 떠난 주인이 반드시 돌아온다는 것을 기억하며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충성된 삶입니다.

엘리사에게도 많은 제자가 있었겠지만 그 일을 맡길 만한 제자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충성할 만한 제자를 선택했을 것입니다.

잠언 25:13은 충성된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

하나님은 지금도 충성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시편 101:6)

하나님의 자녀 된 여러분이여.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우리의 삶에 지금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순종과 충성의 모습이 있습니까? 달란트를 나누어준 주인은 오랜 후여도 돌아왔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도 주님 앞에 결단할 때가 온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기억할 때 우리는 순종과 충성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충성하는 사람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가시며 또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되는 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삶,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 이것이 가장 복된 삶 아니겠습니까? 오늘도 말씀을 통해 이런 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과 삶이 어우러지는 로고스라이프 교회      

 

従順と忠実の生活

 

 

今日の御言葉は、預言者の弟子の一人が登場します。名前もなく年齢もなく、彼に対する具体的な説明もありません。ところが、彼がしたことは、ヨシャパテの子エフーを王に立てることでした。エリシャは彼を呼んで事前説明もなく、油のつぼを持って行くようにといいます。行ってエフーを見つけ、彼を連れて奥の間に入って、油のつぼを彼の頭の上に注ぎ、彼をイスラエルの王とすると任務を任せます。そしてドアを開け、ぐずぐずしていないで逃げなさいといいます。状況は緊迫で危険な状況です。事前発覚やきちんと処理できないと死なれる可能性もあります。練習をしたこともありません。この人は、青年とも呼ばれて、少年ともいう何かの任務を行われるのに経験が多いわけでもなく、老巧な年齢でもないようです。しかし、その青年は、その言葉を聞いて、遅滞することなくすぐ行きます。そして、任務を遂行します。

 

私はこの少年の姿を見ながら二つのことを黙想しました。一つは、従順であり、一つは、忠実です。

彼はエリシャの指示が出されたとき何を考えていたのでしょう。エフーを立てアハブの家を絶滅するという使命を伝えることが、そして、それを行う人を立てるのは、決して簡単なことではないでしょう。それでも少年はエリシャの言葉に従順して走って行きます。

 

私たちがよく知っているサウルは、イスラエルの初代王でありましたが、神の御言葉に従順せず、神に見捨てられた人となりました。神はアマレクを滅ぼし、それらのすべての所有を残さないようにしましたが、彼は良いものを残し価値がなく、つまらないものだけを消滅しました。そして、そのようにしたことに対してサムエルに非難を聞いた彼は、神にいけにえを捧げるためだったと言い訳をします。結局、サムエルはサウルに言います。

 

『するとサムエルはった。「は【】のうことほどに、のいけにえや、そののいけにえをばれるだろうか。よ。うことは、いけにえにまさり、けることは、雄羊脂肪にまさる。まことに、そむくことはいのわないことは偶像礼拝だ。あなたが【】のことばを退けたので、もあなたを王位から退けた。」(サムⅠ15:2223)』

 

今日、名前も知られていないこの少年は、従順でエフーを王に立て、エフーを通してアハブの家を消滅する神の御心を成すことに使われます。神は人を通して、神のみわざを行われますが、使われる人たちの共通点は、まさに従順の人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

 

第二にこの少年を通して忠実さを見たいと思います。

この少年は、長官が集まって座っている席で堂々と自分がするべき話しをします。エフーを呼んで、彼の頭に油を注いで、エリシャが伝えた神のみ言葉をそのまま宣言します。

 

 

忠誠はヘブライ語では真実であり、ギリシャ語では忠実を意味します。だからこそ忠誠というのは仕事を任せた人の志をそのままに成すことです。私の考え、私の満足のためではなく任せた人の志を察し、最善を尽くすことです。任された仕事を心を尽くして行うのが忠誠です。

 

あなたは今何に忠実していますか。神があなたに託されたことに対して、神の御心を尋ね、その御心にふさわしい生活を送っていますか。そうでなければ、皆さんは忠実していないことです。ところが、神の御心を尋ね、神が喜ばれる御心に応じて住んでいるのであれば、それが忠実なのです。他の人より少なく受けた、私の都合が他の人より良くないと不平しながら人のせい、状況のせいにしているのであれば忠実とは距離が遠い生活です。

真実で忠実な人は、主の御心を察し、遠く離れた持ち主は必ず戻ってくることを覚えて、自分に与えられた仕事に最善を尽くす人です。これが忠実な生活です。

エリシャにも多くの弟子がいたでしょうが、その中でもそれを任せられる弟子がいたでしょう。名前は記録されていないですが、忠実な弟子を選択したはずです。

 

箴言25:13は、忠実な人に対してこのように記録しています。

『忠使者はこれをわすにとって、のようだ。主人らせる。』

 

神は今も忠実な人を探しておられます。

詩篇101:6 は、真実たちにがれます。らがとともにむために。は、えます。』

 

神の子どもとされる皆さん。神を信じると告白する、私たちの生活の中で、今、神が認められる従順と忠実がありますか。ダラントを配った持ち主は、長い時間が経った後でも戻って来たことを覚えてください。私たちの生活の中でも、主の御前で決断する時が来ることを必ず覚えておいてください。それを覚えたとき、私たちは従順と忠実の生活を送ることができます。神は神の御心に従い、忠実な人を選んで、神の仕事を行われる、またそのような人々と共におられる約束を覚えてください。主人の喜びに参加する祝福を味わうことを願います。神が認めれる生活、神が共におられる生活、これが最も幸いな生活ではないでしょうか。今日も御言葉を通して、このような祝福を味わうことを願いお祈りします

 

言葉(ことば)生(い)きる」ロゴスライフ教会

 

[2018.08.12]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히브리서11:24-26) ロゴスライフ教会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사소한 것에서부터 중요한 일에 이르기까지 삶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선택을 잘하면 좋은 인생길이 열리고 선택을 잘못하면 후회의 인생길이 열리겠지요, 여러분은 지금 어떤 선택을 하면서 살고 있나요? 우리는 선택할 때 잘 선택해야 합니다. 가치있는 일, 의미있는 일, 복된 일, 생명을 살리는 일, 선한 일을 선택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선택의 기준은 이러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 33)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먼저 그의 나라의 그의 구하는 것이 바른 선택입니다.

모세는 공주의 아들이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 받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 어떻게 이런 선택이 가능했을까요?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고난보다는 애굽의 보화를 선택해야 겠지요. 그러나 모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들이 가진 유한성을 본 것입니다. 지금은 보화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죄의 낙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그 길은 사망의 길이고 멸망의 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모세와 다르게 잘못된 선택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번 주에 우리가 묵상한 말씀 가운데 나오는 아하시야라는 왕입니다. 아하시아는 유다 왕이었지만 아합의 딸이자 어머니였던 아달랴의 영향아래 아합 왕조의 일원이 되었고 그들의 배교행위에 가담했습니다. 아하시야는 다윗의 자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합의 사람이 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아하시야가 아합의 집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니 그는 아합의 집의 사위가 되었음이러라. (열왕기하 8:27)” 그 결과 아합 왕조가 멸망할 때 그 땅에서 함께 소멸되었습니다. 그의 왕위는 고작 1년이었고 예후에 의해서 죽음을 당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선택을 합니다. 그러나 나쁜 길임을 알고도 선택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저마다 그 길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선택할 것입니다. 선택은 어느 날 갑자기 그냥 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서 쌓여진 경험, 지식, 살아온 습관 등 나를 형성하는 모든 것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잘못된 선택으로 후회하는 인생길을 간 사람의 이야기는 성경에 여기저기 등장합니다. 이삭의 아들이었던 에서는 동생에게 야곱에게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버립니다. 그의 선택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닙니다. 그의 행동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창세기 25:34)

 

성경 룻기는 총 4장으로 되어 있는 길지 않은 말씀이지만 여기엔 온통 선택에 관한 말씀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흉년 때문에 고향을 떠났던 나오미는 남편도 잃고 아들 둘도 잃게 됩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작정을 하고 며느리들을 돌려보내고자 합니다. 첫째 며느리 오르바는 시어머니와 헤어지는 것을 선택하고 둘째 며느리 룻은 어머니를 따라가는 것을 선택합니다. 룻의 고백이 이러합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룻기1장 16절)

룻의 선택은 눈에 보이는 현상이나 자기의 유익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룻은 보아스의 아내가 되어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 오벳을 낳게 됩니다. 그렇게 룻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잇게 됩니다.

성경을‘선택’이라는 키워드로 맞추어놓고 읽어보면 새로운 시각에서 성경이 들어옵니다.

거기에는 바른 선택을 한 사람도 있고 옳지 않은 선택을 한 사람도 있습니다. 바른 길로 간 사람이 있고 잘못된 길로 간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선택한 사람이 있고 아하시아처럼 세상 권력을 선택한 사람도 있습니다. 선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가는 배를 선택하기도 합니다. 기도하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니엘은 생명을 유지하려고 하기보다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선택했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선택 속에서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며 여기까지 걸어오셨습니까? 여러분의 선택은 어떠하셨습니까? 그리고 또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며 걸어가시렵니까?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할 것이니라.(신명기 30장15-17절)

하나님이 우리 앞에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두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여러분, 우리의 선택은 우리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줍니다. 작은 것은 별 영향이 없을 것 같은가요? 아니요. 작은 선택들이 모여서 큰 선택을 만들어냅니다. 작은 것에서부터 바른 선택을 하는 사람은 큰 일에도 바른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좋은 선택, 바른 선택, 복된 선택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라고 고백하던 여호수아의 선택이 오늘 우리의 선택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과 삶이 어우러지는 로고스라이프 교회       

 

 

どのような選択をなさいますか

 

 

小さなことから大事なことまで、私たちの人生は選択の連続です。良い選択をすればよい人生が開かれ、間違った選択をすれば後悔の人生となるでしょう。皆さんは今どのような選択をしながら生きていますか。私たちは選択をする時、正しい選択を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価値のあること、意味のあること、福なること、命を救うこと、善いことを選択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神様が私たちにおっしゃった選択の基準は次のようです。

 

「だから、神の国とその義とをまず第一に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それに加えて、これらのものはすべて与えられます。」(マタイによる福音書6章33節)

 

神様の子供である私たちにとって、まず第一に神の国とその義を求めることが正しい選択です。モーセは姫の息子としてではなく、神様の民と共に苦難を受けることを選びました。罪の楽しみに浸るより神様の民と共に苦労することを選択しました。キリストのために受けた全てのそしりを、エジプトの財にまさる大きな富と思ったのです。

このような選択がどうして可能だったのでしょうか。それは神様がくださる報われを望み見たためです。モーセは‘まず第一に神の国とその義を求める’ことをしたのです。この世の価値観では苦難よりはエジプトの金銀を選ばなければならないでしょう。しかしモーセはそのようにはしませんでした。それらがもつ有限性を見たのです。今は金銀、宝物のように見えるかもしれないけれど、それらは罪がもたらす楽しみであることを知っていたのです。罪の対価は死とおっしゃいました。結局その道は罪の道であり、滅亡の道であると知っていたためです。

モーセとは違って、間違った選択をした人がいました。今週私たちが黙想してきた御言葉に登場するアハズヤという王です。アハズヤはユダの王でありましたがアハブの娘であり母であったアタルヤの影響の下、アハブ王族の一員となり彼らの背教行為に加わりました。アハズヤはダビデの子孫であったにもかかわらずアハブの人になることを選びました。

 

「彼はアハブの子ヨラムとともに、アラムの王ハザエルと戦うため、ラモテ・ギルアデに行ったが、アラム人はヨラムに傷を負わせた。」(列王記第二8章27節)

 

その結果アハブの王朝が滅びるときその土地で一緒に消滅しました。その王位はたったの一年でありイエフによって殺されることになります。

私たちは数多くの選択をします。それが悪い道であると知っていながらも選択する人は多くありません。各自その道が最善と思いながら選ぶでしょう。選択という行為はある日急に単純に行われることではありません。自分の中に積み重なった経験、知識、習慣など自分を形成するすべてを通じて行われます。選択には責任が伴うということを覚えてお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

間違った選択によって後悔する人生を歩んだ人の話は聖書のあらゆるところに登場します。イサクの息子であったエサウは弟であるヤコブに、レンズ豆の煮もの一皿に彼の長子の権利を売り払ってしまいました。彼の選択は不可避の選択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彼の行動について聖書は次のように記しています。

 

「ヤコブはエサウにパンとレンズ豆の煮物を与えたので、エサウは食べたり、飲んだりして、立ち去った。こうしてエサウは長子の権利を軽蔑したのである。」(創世記25章34節)

聖書のルツ記は4章でなる長くはない御言葉ですが、ここには選択に関する御言葉が詰まっています。凶作のために故郷を後にしたナオミは夫を亡くし、二人の息子も失うことになります。もう一度故郷に戻る計画を立て、息子の妻たちを各自望むところへ行かせようとします。一人目の嫁であったオルバはナオミと別れることを選び、二人目のルツはナオミについていくことを選びます。ルツの告白は次のようです。

 

「あなたを捨て、あなたから別れて帰るように、私にしむけないでください。あなたの行かれる所へ私も行き、あなたの住まれる所に私も住みます。あなたの民は私の民、あなたの神は私の神です。」(ルツ記1章16節)

 

ルツの選択は目に見える現象や自分の利益によ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そしてルツはボアズの妻になりダビデの父のエッサイ、その父のオベデを生むことになります。そうしてルツはイエスキリストの系図を継ぐことになります。

聖書を“選択”というキーワードに沿って読んでみると新しい視点から聖書を見ることができます。そこには正しい選択をした人も、正しくない選択をした人もいました。正しい道に行った人も、そうでない人もいました。正しい道に行った人も、そうでない道に行った人もいました。神様を選んだ人も、アハズヤのようにこの世の権力を選んだ人もいました。預言者であったにも関わらず神様の命令に逆らってニベネではなくタルシシュに向かう船を選択するようなこともありました。祈りをささげると殺されるということを知りながらもダニエルは自分の命を守るより神様に捧げる祈りを選択しました。

数えきれないほど多くの選択の中で、皆さんはどのような選択を行いながらここまで歩んできましたか。そしてまたこれからはどのような選択をしながら歩んでいかれるのですか。

15見よ。私は確かにきょうあなたの前にいのちと幸い、死とわざわいを置く。16 私がきょうあなたにあなたの神、主を愛し主の道に歩み主の命令とおきてと定めとを守るように命じるからである。確かに、あなたは生きてその数はふえる。あなたの神、主はあなたが入って行って所有しようとしている地であなたを祝福される。17しかしもしあなたが心をそむけて聞き従わず誘惑されてほかの神々を拝みこれに仕えるなら18きょう私はあなたがたに宣言する。あなたがたは必ず滅びうせる。あなたがたはあなたがヨルダンを渡り入って行って所有しようとしている地で長く生きることはできない。」(申命記30章15-18節)

神様は私たちの前に命と、福と、死と災いを置かれたとおっしゃっています。私たちは私たちが何を選ぶかによって私たちの人生が変わってきます。神様の子供となった皆様。私たちの選択は私たちの人生に大きな影響を与えます。小さい選択はあまり影響力がないと思われていますか。いいえ、小さな選択が集って大きな選択につながります。小さいことから正しい選択をできる人は、大きな選択の分岐に立った時も正しく選べるのです。良い選択、正しい選択、祝福された選択は一夜にして行えるものではないためです。

「わたしとわたしの家は主に仕えます!」と告白したヨシュアの選択が今日の私たちの選択となることを願います。

 

 言葉(ことば)生(い)きる」ロゴスライフ教会

[2018.08.05] 그렇다면 이젠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19) (로마서 4:18-25) ロゴスライフ教会

그렇다면 이젠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19)

하나님께서 역사의 무대가운데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그릇으로 삼았던 사람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결핍된 인생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우상숭배의 가정에서 태어나 성장한 사람입니다. 다윗은 가정에서 소외되었던 자였고 일개 평범한 목동의 인생을 사는 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택한 제자들은 가난하고 배움이 짧았던 사람들이며,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같이 무언가 결핍과 흠을 가진 그런 인생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인생의 결핍을 저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실 인생 가운데 부족함과 결핍은 참된 비전을 형성하는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모든 것이 넉넉한 사람들은 미래를 향한 비전을 갖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가진 것 때문에 교만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비전은 곧 우리의 인생을 진리를 따라 살아가게 하는 중요한 근거임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전의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하고 비전을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보통 우리는 비전과 야망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비전과 야망의 차이점을 말할 때 야망은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비전은 하늘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전을 품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타락시키지 않고 해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켜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비전을 품은 사람을 그릇으로 삼아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을 마음에 새기고 로마서4장18절 말씀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절망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즉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그 상황에서도 ‘바랬다.’고 합니다. 곧 아브라함이 비전을 품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비전을 품었다는 것입니까?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100세가 되도록 아들도 없던 사람이 어떻게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는 비전을 가질 수 있습니까? 주책이나 노망이 나지 않고는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비전을 품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비전을 품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아브라함의 비전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약속을 근거로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창17:4) 아브라함은 현실적으로 바랄 수 없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으로 주신 것임을 믿었기에 아브라함의 비전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왔기에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님과 동행했고,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 불가능했던 그 약속이 성취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비전이었기에 하나님을 믿고 그 믿음에 따라 살았습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믿음은 반드시 삶에서 구체화될 때에만 온전한 믿음인 것입니다. 그 온전한 믿음에 하나님은 역사하셔서 반드시 약속을 성취하십니다. 창세기15장6절에서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증언하는데 여기에서 아브라함은 여호와를 믿는다고 입으로만 고백이 아닌 삶으로 살아낸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사도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이렇게 해석을 해 주었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2:21-22)

아브라함은 아들이삭을 실제로 제단에 올려놓고 번제로 드리려고 했습니다. 행함이 믿음보다 앞서지는 못하지만 그래서 행함이 자랑이 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믿음은 반드시 행함을 수반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비전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삶 속에서 이루어지리라고 믿는다면 그 비전을 위해 자신이 행할 것을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사람을 살아가는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한 사람의 비전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켜 올 수 있었는지 비전의 사람들을 통해 이미 이 역사의 무대에 증명된 것처럼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또한 비전의 사람이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은 어떤 비전을 주셨는지 그 비전의 말씀을 굳게 믿고 그 믿음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3:28-29)

우리가 분명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그는 분명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입니다. 현실의 나의 모습은 결코 이 비전을 바랄 수 없지만 그 비전을 주시고 그 비전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꼭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비전을 따라 살아가는 과정에서 실수하고 실패한다 해도 그것을 반면교사로 삼아 다시 일어서서 주님과 함께 그 믿음의 길을 인내하며 끝까지 걸어간다면 아브라함, 요셉, 다윗, 바울을 하나님께서 위대하게 사용하신 그릇들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의 비전의 그릇으로 쓰임 받아 마침내 그 비전이 성취되는 그 위대한 자리에 서 있게 될 것입니다.

 

말씀과 삶이 어우러지는 로고스라이프 교회   

 

では、これからはイエスのように生きることです (19)

 

 

神が歴史の舞台の中で用いて、神の御心を成し遂げる器としてみなした人々を見てみると欠乏した人生でした。アブラハムは、偶像崇拝の家に生まれ育った人です。ダビデは、家庭で疎外された者であって一介平凡な牧童の人生を生きる者でした。イエスご自身が選んだ弟子たちは貧しくて勉学が短かく、人から非難を受けていた人たちでした。みんな何か欠乏と傷が付いているような人生でした。人々は人生の欠乏を呪いとして認識することが多いです。しかし、実際に人生で不足と欠乏は、真のビジョンを形成する重要な根拠となります。すべてが豊かな人々は、未来に向けたビジョンを持つことは容易でありません。なぜなら今持っているもののせいで自然に高ぶる生活をするようになるからです。

ビジョンは、私たちの人生が真理に沿って生きて行くようにする重要な根拠であることを、聖書は語っています。多くの人々がビジョンの真の意味を知らずビジョンを言うときが多くあります。通常、私たちはビジョンと野心をよく区別できない場合があります。ビジョンと野心の違いを言うとき、野望は人間の欲望から始まったものであれば、ビジョンは天から与えられるものです。したがってビジョンを抱いた人は他の人を堕落させず、傷つけることもありません。そして世界を美しく変化させていきます。それで、神はビジョンを抱いた人を神の器としご自身の歴史を成し遂げて行くのです。

まさにこの点を心に刻んでローマ人への手紙4章18節に注目してください。

『彼は望みえないときに望みを抱いて信じました。それは、「あなたの子孫はこのようになる」と言われていたとおりに、彼があらゆるの人の父となるためでした。』

 

このみ言葉は、アブラハムが「望めない状況に置かれている」と言っています。それで、アブラハムが絶望していると言われていますか。そうではありません。「アブラハムが望みえないときに望みを抱いて信じた」、すなわちアブラハムは望めない状況でも、「望んだ。」ということです。そして、アブラハムがビジョンを抱いていました。どのようなビジョンを抱いていましたか。あらゆる民族の祖先になることでした。100歳になっても、息子もなかった人がどのようにあらゆる民族の祖先となるビジョンを持つことができたのでしょうか。無定見でボケてなくては話にならないです。しかし、アブラハムはビジョンを抱いていました。アブラハムがビジョンを抱いたと言われている、その根拠は何ですか。

 

最初に、アブラハムのビジョンは、神から与えられた約束を根拠にするからです。

『わたしは、この、わたしの契約をあなたと結ぶ。あなたは多くの国民の父となる。』

(創世記17:4)

神はアブラハムをお呼びになり多くの民族の父となるように定めました。アブラハムは、現実的には望めませんが、全能の神が約束のみ言葉で与えられたものであることを信じたので、自分のビジョンとみなしたのです。神から来たのでアブラハムは、神と共に歩み、神と交わりがある生活をしました。その結果、不可能であった、その約束が成就することができたのです。

第二は、アブラハムは、神から与えられたビジョンだったので、神を信じて、その信仰に基づいて生きました。

先週の主日にも伝えたように、信仰は必ず生活の中で具体化されるときのみ全き信仰になるのです。その全き信仰に神は働きになられ必ず約束を成就される御方です。創世記15章6節で、「彼は【主】を信じた。主はそれを彼の義と認められた。」と証言しますが、ここでアブラハムは主を信じると口だけの告白ではなく、生活で生きられた信仰でした。それで、ヤコブ使徒は、アブラハムの信仰についてこのように解釈をしてくれました。

『私たちの父アブラハムは、その子イサクを祭壇にささげたとき、行い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ではありませんか。あなたの見ているとおり、彼の信仰は彼の行いとともにいたのであり、信仰は行いによって全うされ、』(ヤコブの手紙 2:21-22)

アブラハムは息子イサクを実際に祭壇に置いて捧げようとしました。行ないが信仰より先になることは出来ない、それで行ないを自慢することはできませんが、しかし、信仰は必ず行うことを伴うものです。誰もが自分が持っているビジョンが神から来て、生活の中で行われることを信じるならば、そのビジョンのために自分が行うべきことを行う人になるべきです。

では、信仰の人として生きていく私はどのような人になるべきでしょうか。一人のビジョンが、世界をどのように変化させたのか、ビジョンの人々を通して既に歴史の舞台で証明されたように、この時代を生きていく神様の人々がまた、ビジョンの人になることがいかに重要なのかを深く認識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して、すでに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人々に向かって、神はどのようなビジョンをくださったのか、そのビジョンのみ言葉を固く信じ、その信仰に沿って生きて行くべきです。

『ユダヤ人もギリシヤ人もなく、奴隷も自由人もなく、男子も女子もありません。なぜなら、あなたがたはみな、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一つだからです。もしあなたがたがキリストのものであれば、それによってアブラハムの子孫であり、約束による相人なのです。』(ガラテヤ人への手紙 3:28-29)

 

私たちが真に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ならば、私たちは間違いなく、アブラハムの子孫であり、約束どおり相続人です。現実の私は、決してそのビジョンを望むことができませんが、そのビジョンを与え、成し遂げる神を固く信じることが重要です。そして、そのビジョンに沿って生きていく過程で過ち失敗したとしても、それを反面教師とし再び立ち上がって、主と共に、その信仰の道を忍耐し、最後まで歩んでいけば、アブラハム、ヨセフ、ダビデ、パウロを神が偉大に用いられた器のように、私たちもまた、神のビジョンの器に用いられ、遂にそのビジョンが成就される偉大な場に立つ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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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29] 입술의 믿음에서 삶의 믿음으로 (18) (로마서 4:10-17) ロゴスライフ教会

입술의 믿음에서 삶의 믿음으로 (18)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적으로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 있다면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처럼 자신과 자녀들이 하나님께 위대하게 쓰임 받는 자가 되는 것일 겁니다. 저도 꼭 그런 인생이 되었으면 하고 저의 두 자녀의 인생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 모든 성도가 꼭 그런 위대한 인생을 살았으면 하면 간절한 소망이 있습니다.

위대한 인생을 기대한다면 한 번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그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을까? 요셉은 어떻게 노예의 신분에서 일약 애굽의 총리라는 그 위대한 자리에 설 수 있었을까? 다윗은 일개 목동에서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그 위대한 왕의 자리에 설 수 있을까요? 다니엘은 포로로 끌려간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세상을 통치하던 나라의 세 왕 밑에서 나라의 행정을 책임지는 총리가 되어 세상을 움직이는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었을까요? 이 사람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었습니다.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이 입으로 고백된 믿음에서 삶의 믿음으로 이어졌기에 새로운 역사를 여는 주인공으로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때문에 그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고 삶의 믿음을 행한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입술의 믿음에서 삶의 믿음을 산 좋은 본으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계속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0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믿음이 하나님께 언제 의로 여김 받았는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을 때였는지 아니면 할례 받지 않았을 때였는지를 바울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질문을 바꿔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결단한 후인가 아니면 그러한 결단이 없었던 전에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게 여겨주셨는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답은 “무할례시” 즉 할례를 받지 않았을 때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왜 이 사실을 이렇게 집요하게 반복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우리의 공로와 상관없이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정확하게 깨닫지 못하면 바른 믿음을 가질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귀한 그릇으로 사용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귀한 믿음을 버리고 믿음을 떠나 멸망에까지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그러면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 받기 전 보여 준 참 믿음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기 전부터 그의 믿음은 입술의 믿음이 아닌 삶으로 증명해 보이는 믿음이었음을 우리에게 깊이 일깨우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중요한 질문 하나를 던지고 쉽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인데 왜 삶의 모습들은 다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더 크게 성취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눈에 보일 정도로 위력적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주님을 믿는다는데 그 주님을 믿으면 주님이 함께 하시는 삶인데 매일 피곤하고 무기력하고 기쁨도 감사도 없는 불행한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요?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롬4:17)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다는 말씀입니다. 창세기12장2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당시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땐 황당무계한 말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입에서만 고백되는 믿음이 아닙니다. 머릿속에만 담긴 관념적인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창12:4) 즉 삶으로 드러난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떤 믿음이었는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창22:16)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히11:17)

아브라함의 믿음은 입술에만 머문 믿음이 아닌 삶을 드리는 믿음 즉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믿음이었습니다. 이것을 말씀과 삶이 일치된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신 약속을 삶의 가운데 구체적으로 이루시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 이 자리에 주님의 은총이 충만하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이 은혜 앞에서 우리가 어떤 믿음으로 응답하느냐에 따라 수년 후 우리 각자의 삶의 모습은 엄청난 차이가 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은혜 속에 자신의 삶을 맡기는 사람들은 창대한 복을 누리게 될 것이고, 입으로만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은 계속 무기력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지금부터 하나님의 은총에 여러분의 삶 전부를 다 맡기고 오직 예수만 바라보고, 예수께 모든 생각을 복종시켜 예수만 사시는 삶을 사는 참된 신앙인의 길을 걸어갑시다. 그리하여 우리 각자 삶 가운데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을 날마다 목격하고 맛보는 신바람 나는 참 행복한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모두가 되길 축원합니다.

 

말씀과 삶이 어우러지는 로고스라이프 교회  

 

唇の信仰から人生の信仰へ (18)

 

キリスト人が共同的に望んでいることは偉大なる信仰の先祖のように自分と子孫が使われる事だと思います。私も必ずそのような人生になりたいし、息子・娘の人生だけではなく我々教会の全ての聖徒がそのような偉大なる人生を生きて行く事を強く願っています。

偉大なる人生を期待するのなら考えなければならない事が一つあります。アブラハムはどうやってそのような偉大な信仰の先祖になれたのでしょうか。ヨセフはどのように奴隷の身分からエジプトの総理大臣という偉大な座まで立つことが出来たのでしょうか。ダビデはただの羊飼いから全ての民から尊敬される偉大なる王様になれたでしょうか。ダニエルは捕虜の身分だったのに当時世界を支配した国の三名の王の下で国の行政を任される総理になり、世界を動かす偉大な人生を生きる事が出来たでしょうか。この人たちの人生を良く見ると一つの共通点を持っている事が分かります。それは主にする信仰でした。

偉大な信仰の先祖が口で告白した信仰から人生の信仰へ生きる事が出来たから新しい歴史を開ける主人公になれたのです。偉大な信仰の先祖は主を信じる信仰の為のどのような犠牲も喜んで受け入れる人生の信仰を行った者たちでした。

パウロはそのような口の信仰から人生の信仰への生きた良い見本として信仰の先祖アブラハムを続けて紹介しています。今日の本文10節にこう記載しています。

“まだ割を受けていないときにでしょうか。割を受けてからではなく、割を受けていないときにです。

アブラハムが主の恵みで与えられた信仰にて主との関係が回復されました。しかし、アブラハムの信仰が主にいつ義とみなされたのか、アブラハムが割礼を受ける前か受けた後なのかをパウロは確かめています。質問を変えて観るとアブラハムが主に従って生きると決断をした後なのかその決断しなかった時に主が彼を義として下さったのかを尋ねています。パウロの答えは“割礼を受けていないとき” つまり割礼を受ける前だと言っています。

パウロはなぜこの事実を繰り返して強調しているでしょうか。主の救いの恵みが我々の行いではなく主から始まる事を正確に悟らなければ正しい信仰を持つ事が出来ないし、主のみ旨の為の尊い器として使われることが出来ないからです。さらに、主に恵みとして受けた信仰を捨てて滅亡に至るからです。

それでパウロはアブラハムの割礼を受ける前の見せた真の信仰を学ぶ事を言っています。アブラハムは割礼を受ける前から彼の信仰は口だけの信仰ではなく人生で証する信仰だった事を我々に深く悟らせています。

 

ここで、私は皆様に重要な質問を一つします。

我々は皆、主のみで救われた人なのになぜ人生を生きる姿が皆それぞれでしょうか。ある方には主の約束がもっと大きく成されて、主の御言葉が目に見える程強く働きます。しかし、ある方は主を信じると言いますが主を信じると言うことは主と共に生きる事なのに毎日疲れ果てて無気力で喜びも感謝もない不幸な人生を生きるでしょうか。パウロはアブラハムの信仰に対してこう記載しています。

“このことは、彼が信じた神、すなわち死者を生かし、無いものを有るもののようにお呼びになる方の御前で、そうなのです。(ローマ人への手紙4:17)

アブラハムは死んだ者を甦らせて、無い物を在る物にする主を信じたということです。創世記12章2節で主は “わたしはあなたを大いなる民とし”とおっしゃいました。しかし、当時アブラハムには子孫がいませんでした。世間の人から見ると言葉にならない事だと思われます。しかし、アブラハムは主の御言葉を信じました。彼の信仰は口だけで告白された信仰ではありません。頭の中にある観念的な信仰でもありませんでした。彼の信仰は“アブラムは【主】がお告げになったとおりに出かけた。”(創世記12:4)つまり、信仰が人生に見える生き方でした。そしてアブラハムの信仰がどのような信仰だったのかこう記載しています。

“仰せられた。「これは【主】の御告げである。わたしは自分にかけて誓う。あなたが、このことをなし、あなたの子、あなたのひとり子を惜しまなかったから、”(創世記22:16)

“信仰によって、アブラハムは、試みられたときイサクをささげました。彼は約束をえられていましたが、自分のただひとりの子をささげたのです。”(へブル人への手紙11:17)

アブラハムの信仰は口で止まっていた信仰ではなく人生を捧げる信仰つまり、自分の命まで捧げる信仰でした。これが御言葉と人生が一致する信仰と言います。その信仰は主がご自身の御名を持って誓った約束を人生の中で具体的に成し遂げることです。

今この時間、この場に主の恵みが溢れる働きがあります。この恵みに我々がどんな信仰で答えるかにて数年後我々の人生の姿は大きい差を見せます。主が与えて下さった恵みに自分の人生を委ねる人は壮大な祝福の人生を生きると思いますが、口だけの告白で止まる人は続けて無気力な人生を生きると思います。これから主の恵みに皆様の人生全てを委ねてただイエスだけを見つめて、イエスに全ての考えを従順させてイエスだけが生きる真の信仰の道を歩みましょう。それで我々各自の人生の中でなさる主の約束を日々目撃し、味わう喜びの信仰の道を歩む皆様を祝福します。

 言葉(ことば)生(い)きる」ロゴスライフ教会

     

[2018.07.22] 이 복을 받아야 진정 행복자입니다 [17] (로마서4:6-11) ロゴスライフ教会

복을 받아야 진정 행복자입니다 (17)

한국갤럽조사연구소사 우리나라를 포함해 18개 나라의 2만4천 명에게 “당신은 얼마나 행복하십니까?” 라는 질문을 통해 각 나라 사람들의 행복도를 조사를 했습니다. 그 결과 대한민국이 18개 나라 가운데 꼴찌였다고 합니다. 행복도 10점 만점에 한국 사람들의 행복 측정치는 5.3점이었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마음 반쪽은 불행이 소용돌이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20년 전에 비해 한국은 잘 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행복감은 아주 많이 떨어진 것입니다. 그 원인은 세상은 행복을 소유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유하지 못하거나 소유했던 것을 잃으면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행복을 소유에 두지 않고 바른 관계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복이 위로부터 오는 것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통해 온다고 말씀합니다. 로마서4장9절이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그런즉 이 복이”(롬4:9)

그냥 복이라고 하지 않고 “이 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복은 성경이 어떤 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로마서4장6절을 보시면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공로가 없어도,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 주셔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된 복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서 정말 복된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사람만이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정확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행복이 왜 하나님과 관계에서만 누릴 수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불행은 하나님께 범죄하므로 시작된 것입니다. 죄가 인간의 모든 불행의 시작이라면 죄의 문제를 다시 해결하지 않고는 인간의 행복은 결코 해결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의 문제는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받아야 죄로 비롯된 불행을 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선 우리가 그 어떤 죄를 지어도 그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순간 그 죄에 대해 이사야43장25절에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 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둘째는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면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됩니다.

인생 가운데 가장 두려움의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죽음입니다. 우리는 평상시 죽음 앞에 서는 일이 없이 일상을 살아갑니다. 막연히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생각을 하지 그 죽음이 오늘이 될 수 있고 그 죽음의 대상이 나라고 생각하며 살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되므로 얻는 가장 중요한 복이 영생입니다.

죄로 인해 인간의 삶 속에서 죽음이 들어옴으로써 불행이 시작되었다면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짐으로 행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에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짐으로 천국에서는 물론이요 이 세상에서도 행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통한 만족한 삶을 살아갑니다.

인생의 모든 결과를 책임져 주시는 분이 오직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만이 우리의 모든 수고에 결실을 맺고 만족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었던 다윗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23:1,4)

다윗도 아브라함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었던 것은 믿음으로 인함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목자가 되어 주셨고 아브라함 또한 그의 인생은 부족함이 없는 만족한 인생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4천 년 전 아브라함에게 임한 하나님의 함께 하시는 은혜는 지금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여전히 유효합니다. 죄 사함의 은혜, 영생을 주신 은혜 그리고 항상 함께 하시겠다는 은혜 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그 은혜를 믿는 일만 남았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비롯된 힘을 소유할 때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들을 철저히 끊고 하나님만 의지하여 인생 전부를 의탁함으로 하나님과 항상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삶만이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시는 인생이 되고 그 삶만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만족한 인생을 사는 자가 되어 하늘로 내리는 참 복을 누리는 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복을, 모든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이 누렸던 것처럼 우리 모두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말씀과 삶이 어우러지는 로고스라이프 교회 

 

 

この幸いを授かることが真の幸せ者です (17)

韓国ギャラップ調査研究所で我が国を含め18ヶ国の2万4千人を対象に“あなたはどれくらい幸せですか”という質問をし、各国の人々の幸福度を調査しました。その結果、韓国が18ヶ国中、最下位だったといいます。幸福度10点満点中、韓国の人々の幸福測定値は5.3点でした。見かけは健康でも、心の片隅では不幸の渦が巻いているのです。20年前に比べ、韓国はいわゆる裕福な国になりました。しかし人々の幸福度は著しく低下しています。その原因は、この世は幸福の意味を所有する事においているためです。そのため所有できなかったり、すでに持っていたものを失ってしまうと、不幸になってしまうのです。聖書は人間の幸せは所有ではなく、正しい関係であると語っています。そのため聖書は、祝福は上から来るものであり、神様との関係を通じてもたらされるものであると言っています。ローマ人への手紙4章9節は次の御言葉で始まります。

「では、この幸い(幸福)は」ローマ人への手紙4章9節

 

ただの幸いではなく、“この幸い”とおっしゃっています。この幸福はどのような幸福を言っているのでしょうか。ローマ人への手紙4章6節を見ますと、“行いによらずに神から 義と認められた人の幸い”を言っています。これは自分の行いがなくても、罪びとでありながらも、神様が義であると認めてくださり、神様との関係を回復してくださった幸いを意味します。この世で真に幸いな人は神様との関係が回復した人です。神様との関係が回復した人のみがこの世で幸せな人生を生きることができます。何故そうなのか、その理由を知る必要があります。私たちの幸せが何故神様との関係の中でのみ享受することができるのか見てみましょう。

 

一つ目に、神様との正しい関係の回復は、罪の問題を解決することができるためです。

人間の不幸は神様に罪を犯したことにより始まりました。罪が人間のすべての不幸の出発点であるなら、この罪の問題を解決せずには人間は決して幸せにはなれないのです。人間の罪の問題は神様によって罪の赦しを得ることで、罪による不幸を断ち切ることができます

私たちがどのような罪を犯したとしても、その罪を認識し、悔い改める時のことについてイザヤ書43章25節に次のように語っています。

「このわたしは、わたし自身のためにあなたのそむきの罪をぬぐい去り、もうあなたの罪を思い出さない。」 イザヤ書43章25節

 

 

二つ目に、神様との関係を回復することで、死からの自由を得ることができます。

人生の中で最も大きい恐れは何だと思われますか。それは死です。私たちは普段は死を前にすることなく、日常を生きています。漠然と人間はいつか死ぬと思うだけで、その死が今日訪れるかもしれない、もしくはその死の対象が私かもしれないといったことは考えません。私たちが神様を信じることで得られる最も大きい重要な幸いは、永生です。

罪によって人間の生の中に死が割り込み不幸が始まったのならば、人間に永遠の命が与えられることで幸せが始まるのです。神様との関係が回復される時にのみ、永遠の命が与えられ、天国はもちろんのこと、この世界においても幸せにな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

 

三つ目に、神様との関係が回復すると、神様が共にしてくださる事を通じて満足する人生を送ることができます。

人生のすべての結果を受け持ってくださる方は、ただ創造主である神様のみです。神様が共にしてくださる時にのみ、私たちのすべての苦労が実を結び、満足した人生を生きることができます。神様との正しい関係を結んでいたダビデは次のような告白をしました。

「主は私の羊飼い。私は乏しいことがありません。たとい、死の陰の谷を歩くことがあっても、私はわざわいを恐れません。あなたが私とともにおられますから。」 詩編23編1,4節

 

ダビデもアブラハムも神様との関係が回復できたのは、その信仰によってでした。そのため神様はアブラハムの牧者となってくださり、アブラハムもまた、その人生に乏しさのない富んだ人生となることができたのです。

4千年前アブラハムに臨んだ神様が共にしてくださる祝福は、今神様を信じる私たちにも依然として有効です。罪の赦しの恵み、永生を下さる恵み、そして常に私たちと共にしてくださるという恵みです。

では、今私たちがすべきことは天より授かるその恵みを信じることだけです。この世によって授かった力を持つ時に幸せになれるという考えを徹底的に断ち切り、神様だけに頼って人生すべてを預けることで、神様と常に正しい関係を結ばなければなりません。神様との正しい関係を結ぶ人生のみが、神様が常に共にしてくださる人生になり、その人生のみが罪の問題を解決し、死の恐怖に打ち勝ち、満足した人生を生きる者となって、天より授かる真の幸いを享受する者として生きていくことができます。この福を、すべての偉大なる信仰の先祖たちが享受したように、聖徒の皆さんも一人残らず享受されることを心より願います。

 

言葉(ことば)生(い)きる」ロゴスライフ教会

     

[2018.07.15]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 [16] (로마서 4:1-8) 장원규목사, 동경성결교회, 로고스라이프교회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 (16)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세상을 보는 안경을 쓰게 됩니다. 부모로부터, 유치원이나 학교로부터, 친구들로부터, 다양한 책들로부터 등등의 여러 경로를 통해 세상을 보는 안경을 쓰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쓴 안경은 좀처럼 벗기가 힘든 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지금까지 써 왔던 안경을 벗고 하나님께서 씌워주시는 말씀의 안경, 예수 그리스도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우리 믿음의 삶을 보면 자신이 썼던 안경을 벗지 않고 그 위에 말씀의 안경을 덧쓰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두 개의 안경을 끼고 있어 인생의 초점이 두 개로 보여 삶의 포커스가 정확하지 않아 혼란스런 삶을 살게 됩니다. 이런 상태의 삶은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신앙생활을 오래해도 근본적인 생각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생각의 초점이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어 있기에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을 다시 자기생각의 안경을 통해 보게 되니 말씀이 말씀답게 내 안에서 역사할 수가 없습니다. 생각의 근본이 바뀌지 않으니 조금 변화된 삶을 볼 수 있지만 근본적인 변화는 아닌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만 있지 경건의 능력은 전혀 없는 세상 사람과 다를 것이 없는 무늬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 얻는다는 안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말하는 율법은 성경이 말하는 율법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장로들의 유전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장로들의 유전과 하나님의 율법을 동일시합니다. 그러면서 그 기준에 맞는 사람의 모델로 아브라함을 꼽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기준으로 볼 때 아브라함은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모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확신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의 확신이 얼마나 잘못된 안경을 쓰고 성경을 본 것인가를 설명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 또한 유대인들과 같지 않지만 우리 나름대로 안경을 끼고 성경을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선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착한 행실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삶에 감사가 넘치고, 선행을 행하며, 자신만을 위한 삶에서 이웃을 향한 이타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착한 행실에 이행여부가 구원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착한 행실로 삶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대표주자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떻게 비롯된 그것을 오늘 본문이 말씀하려는 핵심입니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롬4:1-2)

아브라함이 의롭다 칭함 받은 것이 행위로 된 것이라면 그 행위를 자랑할 수 있을 터이지만 행위로 된 것이 아니므로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선한 행위가 하나도 없었다든지 아니면 예수 믿는 사람에게 행위가 전혀 필요 없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으므로 그의 행위는 선한 행위를 행합니다. 이런 선한 행위에 대해 아브라함 입장에서 얼마든지 자랑할 수 있겠지만 그 행위를 가능케 한 원동력에 대해 성경은 다른 차원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3절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아브라함이 의로운 행위를 한 것은 그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태어나 자란 곳은 하란이라는 곳이었습니다. 그 하란에 있을 때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무엇으로 드러났느냐 이것을 말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었다는 것이 단순히 믿음의 고백으로 끝나지 않고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는 순종으로 그 행위를 드러낸 것입니다. 당시 하란은 화려한 문명의 도시입니다. 살기가 너무 편한 도시이며 경제적으로 부요한 도시입니다. 그러나 가나안은 황무지와 다를 바 없는 도시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그 동안 영위해 온 안전하고 편안한 삶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황무지로 떠났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 믿음이 어떻게 주어진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도 행위도 인간 차원에선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정말 주님을 믿는다면 세상이 씌어준 안경을 벗어버리고 이젠 복음의 안경을 써야 합니다. 이젠 하란에서 가나안을 향해 말씀을 따라 삶의 방향을 돌려야 합니다. 매일 하나님의 의이신 주님으로 충만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날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는 한 우리의 자아가 역사한 옛사람은 날마다 죽고 또한 날마다 그리스도가 주가 되셔서 주장하시는 삶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그 유업이 나의 유업이 되는 그 영광스런 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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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書は何と言っているのか (16)

 

人はこの世に生まれる瞬間から、自分の意図とは関係なく、世を見る眼鏡を掛けるようになります。親から、幼稚園や学校から、友人から、様々な本などから、いくつかの経路を通して世を見る眼鏡を掛けるわけです。そのように掛けられた眼鏡をなかなか外せられないのが人間です。

神を信じるというのは、今まで掛けられた眼鏡を外し神様が掛けてくださるみ言葉の眼鏡、イエス・キリストの眼鏡を掛けて世を見て生きていくことを意味します。ところが、意外と私たちの信仰の生活を見ると、自分が掛けた眼鏡を外さず、その上にみ言葉の眼鏡を重ねて生きていく人が多いです。このような人々は、二つの眼鏡を掛けており、人生の焦点が二つになり人生のフォーカスが正確ではなく、混乱の生活を送るようになるでしょう。

このような状態の人は、いくら聖書をたくさん読み信仰生活を長くしても、根本的な考えを変えることができません。考えの焦点が自分から始まっているのでみ言葉を聞いても、そのみ言葉を再び自分の考えの眼鏡を通して見るので、み言葉がみ言葉らしく自分の中で作用することができません。考えの根本が変わらないので、ある程度変わった姿は見られるが、根本的な変化はないのです。見えるところは敬虔であってもその実を否定する、敬虔の力は全くない世の人と異なることのない、形だけのクリスチャンに生きるのです。

ユダヤ人たちは、律法を守って救いを得るという眼鏡を掛けていました。もちろん、彼らが言う律法は、聖書が言っている律法ではありません。人々が作った長老たちの遺伝です。それにも関らず彼らは長老たちの遺伝と神の律法を同様にしています。それなのに、その基準に合うモデルとして、アブラハムを挙げていたのです。つまり彼らの基準で見ると、アブラハムは、律法を守って義と認められたモデルとなったわけです。このような彼らの確信は大したものでした。それで使徒パウロは、彼らの確信がいかに誤った眼鏡を掛けて聖書を見ていたのか、説明したがっていたのです。私たちはユダヤ人とは異なりますが、自分なりに眼鏡を掛けて聖書を見られるという点では同じであることを知るべきです。

 

私たちが、善行を行うことは、神のみ恵みによって救われ神の子とみなされたからです。それで、生活の中で感謝が満ち、善行を行い、自己中心の生活から隣人に向けた利他的な生活を送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このような善行の行いが救いを決定する可否ではありません。善き神の子となったので、生活の中で善行の実を結ぶのです。

アブラハムは信仰の代表的な者です。アブラハムの信仰がどのように始まったのか、それが今日のみ言葉の核心です。

 

 

「それでは、肉による私たちの父祖アブラハムの場合は、どうでしょうか。もしアブラハムが行い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のなら、彼は誇ることができます。しかし、神の御前では、そうではありません。」(ローマ4:1-2

 

アブラハムが義と認められたのが行いによったものであれば、その行いを誇ることができるはずですが、行いによったものではないので、誇ること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この部分で、私たちが注意すべき点があります。アブラハムに善い行いが一つもなかったとか、または、イエスを信じる人に善い行いは全く必要ないと誤解してはならないところです。アブラハムは神を信じたので、彼は善い行いをしたのです。このような善い行いについて、アブラハムの立場からいくらでも自慢できると思いますが、その行いを可能にした原動力に対して聖書は、別の視点から語っています。 3節です。

「聖書は何と言っていますか。「それでアブラハムは神を信じた。それが彼の義とみなされた」とあります。」

 

アブラハムが義のみなされたのは、彼が神を信じていたからだと言っています。アブラハムが生まれ育った所はハランという所でした。そのハランにいるとき、アブラハムに神のみ恵みが臨みました。その時、アブラハムは神を信じました。ところが、その信仰が何で明らかになったのか、それを言いたいのです。アブラハムの信仰は、単純に、信仰の告白で終わらずハランを去ってカナンに行く従順で、その行為を表わしたのです。

当時ハランは、華麗な文明の都市でした。とても暮らしやすい都市であり、経済的に豊かな都市でした。しかし、カナンは荒れ地と変わらない街でした。アブラハムは、自分がその街で営んできた安全で快適な生活を捨てて、神が命じられた荒地にたちました。どうすればそのように出来るのでしょうか。アブラハムは神を信じていたからです。アブラハムにこのような信仰がどのように与えられたのでしょうか。のみみによってえられたものです。ですので、信仰も行いも人間の立場では何も誇ることが出来ないものなのです。

 

私たちが本当に主を信じるならば、世から掛けられた眼鏡を外して、福音の眼鏡を掛けるべきです。もうハランからカナンにい、み言葉沿って生活方向変えるべきです。毎日神の義である主に満ちた生活を送ることです。そのように、日々主と共に生きる限り、私たちの自我が基準になる古い人は日々死なれ、キリストが主となられ導かれる生活により、アブラハムの相続が自分の相続になる、栄光の日を迎えることになるでしょう。

 

 

 

言葉(ことば)生(い)きる」ロゴスライフ教会

   

 

[2018.07.08] 율법을 굳게 세워야 합니다 [15] (로마서3:27-31) 장원규목사, 로고스라이프교회

율법을 굳게 세워야 합니다 (15)

하나님 말씀의 중요한 역할이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깨닫게 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혼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우리가 볼 수 없는 은밀한 마음 깊은 곳까지 비춰 우리 안에 감추어진 모든 죄들을 다 들춰 보여줍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의 원인은 다 죄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인간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참된 행복을 찾을 수 없는 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죄인임을 깨닫는 데부터 시작됩니다. 죄인임을 깨달았다는 것은 죄로 인해 저지른 추악함과 참담함을 느끼며 자신 안에 그 어떤 선함도 없는 찾을 수 없는 무가치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의’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바르게 세울 수 있는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3장27절에서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에 있어서 우리에게 자랑할 것이 있느냐고 반문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원받은 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 은혜로 ‘믿음의 법’을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우리가 더더욱 자랑할게 없다는 그 이유 한 가지를 더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3장29절입니다.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우리는 본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을 없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그 자리로 무조건적으로 초청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은혜로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으로 의로운 자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 보시기 바르고 의로웠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인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만 자랑하는 삶을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만을 자랑으로 삼는 삶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본문 31절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하나님만을 자랑으로 삼는 삶은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은혜의 시대로 율법은 폐하였는데 왜 ‘율법을 굳게 세우리라’라는 말씀에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율법에 대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5:18)예수님은 율법의 실체이시기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으므로 이제는 율법은 폐하여야 한다고 말씀을 하시지 않고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룬다.’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을 굳게 세운다는 것은 곧 주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며 주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씀하는 것일까요? 주님께서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지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의 증명은 계명을 지킴으로서 들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사랑해 주신 그 사랑을 본받아 삶 속에서 그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해 주셨습니까?

첫째는 하나님은 우리를 값없이 은혜를 베풀어 주심으로 사랑해 주셨습니다.(롬3:24)

둘째는 하나님은 독생자를 제물로 삼으시면서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롬3:25)

셋째는 하나님은 길이 참으심으로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롬3:25중반)

넷째는 하나님은 우리가 과거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사랑해 주셨습니다.(롬3:25후반)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준 사랑의 네 가지의 모습을 따라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삶의 과녁으로 삼아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신 그 사랑을 본받아, 우리도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심을 넘어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희생의 제물이 되는 삶 즉 율법을 굳게 세우는 삶을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말씀과 삶이 어우러지는 로고스라이프 교회   

 

律法を確立すべきです (15)

 

主の御言葉の重要な役割は我々の罪が何かを確実に悟らせる事です。我らの魂の奥まで見る事が出来ない心の深い底まで照らして我らの中で隠された全ての罪を表せます。人の全ての不幸の原因は罪から始まります。罪の問題を解決しないと真の幸せを得る事が出来ない理由がこれです。人が罪の問題を解決する道は罪人であることを悟ってから始まります。罪人である事を悟ったと言うことは罪を犯した自分の汚しい事を感じ自分の中で善なる事が何も無い無価値な存在であることを悟ることです。その瞬間我らは‘主の義’に注目すべきです。その‘主の義’は何でしょうか。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信仰です。イエスが十字架で流した血が主と我らの関係を健やかに建たせる主の義になります。それでパウロはローマ人への手紙3章27節でこう語ります。

“それでは、私たちの誇りはどこにあるのでしょうか。それはすでに取り除かれました。どういう原理によってでしょうか。行いの原理によってでしょうか。そうではなく、信仰の原理によってです。”

救われて主の子孫になった事に対して我らが自慢することが無いことを語っています。我らが救われたのが主に善で在ってからではなく主が我らを善にするために恵みとして‘信仰の原理’を下さったからです。その上にパウロは自慢してはいけないもう一つの理由を言っています。ローマ人への手紙3章29節です。

“それとも、神はユダヤ人だけの神でしょうか。異邦人にとっても神ではないのでしょうか。確かに神は、異邦人にとっても、神です。”

我らは本来主を父と呼ぶ資格がない異邦人でした。しかし、主の恵みで我らも救われることが出来ました。その場に招待して下さいました。そして、我らにも信仰をくださり、その信仰によって義人になることを許して下さいました。その理由は我らの人生が主の目に正しく義で在ったからではありません。ただ主の恵みでした。だから我らは主だけを自慢する人生を生きるべきです。

それなら主だけを自慢する人生とは何でしょう。本文の31節です。

“それでは、私たちは信仰によって律法を無にすることになるのでしょうか。絶に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かえって、律法を確立することになるのです。

主だけを自慢する人生は律法を確立することであると言っています。我らは主の恵みで救われた恵みの時代で律法は無くなったはずだがなぜ律法を確立することになると言っているのかと疑問を持たせます。

 

 

しかし、イエスは律法に対してこう語った事があります。

 “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告げます。天地が滅びうせない限り、律法の中の一点一でも決してすたれることはありません。全部が成就されます。(マタイの福音書5:18)イエスは律法の実体だからイエスがこの世に臨在したからこれから律法を廃止にすると言わずに‘天地が滅びうせない限り、律法の中の一点一でも決してすたれることはありません。全部が成就されます。とおっしゃいました。

それでは律法を確立する事がつまり、主の命令を守る事であると言うことですが、主の命令を守るとは具体的にどういう事でしょう。命令を守ることに対して聖書にはこう語っています。 わたしの戒めを保ち、それを守る人は、わたしを愛する人です。わたしを愛する人はわたしの父に愛され、わたしもその人を愛し、わたし自身を彼に現します。(ヨハネの福音書14:21)

我らがイエスを信じるとは主を愛する事を意味するし、主を愛する事の証は主の命令を守る事で現れます。

主が我らを救って下さって愛して下さったその愛に従い人生の中で具体的に実践することです。主は我々をどのように愛して下さいましたか。

一つ、主は我々に代価なしでみをえて下さいました。

(ローマ人への手紙3:24)

二つ、主は一人子を生贄にしてから我々を愛して下さいました。

(ローマ人への手紙3:25)

三つ、主は長く忍耐して我々を愛して下さいました。

(ローマ人への手紙3:25中半)

四つ、主は我々の過去に犯した罪を見逃して下さって愛して下さいました。

(ローマ人への手紙3:25後半)

 

主が我々に与えて下さった愛の四つの姿に従って我々の隣人を愛する事が律法を確立する事であり、主を愛する事であります。それなら我々はただイエスキリストだけを人生の印として主が一人子を下さったその愛を見本にし、自分自身だけを思わず、我々が生きる現場で生贄になる生き方をすることで律法を確立させる人生を過ごしましょ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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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1] 모세의 축복이 주는 영적인 교훈 (신명기33:1-11) 장원규목사,동경성결교회, ロゴスライフ教会

모세의 축복이 주는 영적인 교훈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성도 안에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생명을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그 생명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자라가야 합니다. 1년 전보다, 2년 전보다 해가 가면 갈수록 성장과 성숙해야 합니다. 성장, 성숙은 곧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며 변화에는 반드시 생명의 가득한 세상으로 바꿔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2018년을 시작하고 6개월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 시점에 하나님은 왜 맥추 절기를 지키도록 하시는 것일까요? 이번 주간 신명기33장을 묵상하다가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가 걸어온 인생이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신명기33장은 모세가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의 12지파들을 축복하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무엇을 축복하고 있습니까? 신명기 33장은 모세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대상으로 축복하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르우벤 지파와 레위지파의 축복을 통해 맥추절을 맞아 지난 6개월의 삶을 돌아보며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첫째는 르우벤 지파에 대한 모세의 축복입니다. .

“르우벤은 죽지 아니하고 살기를 원하며, 그 사람 수가 적지 아니하기를 원하나이다.”(신33:6)

지금 모세는 죽기 직전에 각 지파들을 축복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르우벤에게 하고 있는 이 축복은 참 이상합니다. 세상에 “죽지 않고 살기를 원하고, 그래서 수가 적어지지 않기를”원하는 것은 축복이라고 생각하기가 힘듭니다. 그런데 모세는 르우벤을 위해서 죽지 않고 살아만 있기만을 빌고 있습니다. 무슨 이유로 이런 이상한 축복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원인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창세기49장3~4절의 말씀과 연결해 생각해야 합니다.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여기서 우리가 염두 해 두어야 할 것은 모세의 축복은 지금 500년 전에 있었던 야곱의 축복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500년이 지나 르우벤 지파를 축복하는데 축복의 내용이 “르우벤은 죽지 아니하고 살기를 원하며, 그 사람 수가 적지 아니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축복 할 수밖에 없는 그의 자손들의 모습입니다. 르우벤의 자손은 그의 선조처럼 생존 자체가 위협을 받고 있는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선조인 르우벤에게 야곱이 축복한 그 이후 자손들은 전혀 변화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레위 지파에 대한 모세의 축복입니다.

“레위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 주의 법도를 야곱에게, 주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며 주 앞에 분향하고 온전한 번제를 주의 제단 위에 드리리로다.”(신33:8,10)

레위는 르우벤처럼 성적인 범죄는 아니지만 커다란 실수를 했던 사람입니다. 창세기49장5절에 보면 야곱이 레위를 축복하는 장면인데 이때 야곱은 축복인지 저주인지 모를 축복을 하고 있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레위는 칼은 폭력의 도구라는 축복이 아닌 저주를 받은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자손들은500년이 지나 모세가 레위지파를 축복하는데 ‘주의 경건한 자’가 되었고, 주의 율법을 가르치며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감당하는 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창세기를 기록한 사람도 모세요, 신명기를 기록한 사람도 모세라는 것입니다. 창세기와 신명기의 저자인 모세가 레위의 이 변화에 대해서 감격적으로 기록하고 축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주가 변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하는 이 변화입니다. 변화된 운명이요 변화된 인생입니다. 모세도 레위 지파요, 아론도 레위 지파 사람입니다. 야곱은 레위에게 ‘레위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라 하여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 노여움이 혹독하고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지만 500년 지나 모세가 유언을 할 때는 변화된 인생으로 제사장 가문이 되어 말씀을 맡은 귀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복음은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운명과 인생과 성품과 윤리를 바꾸는 능력입니다. 그분의 십자가는 우리로 타락한 본성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삶으로 초대합니다. 그 복음, 그 십자가의 복음을 만나고 듣고 경험한 우리는 마땅히 레위처럼 변화된 운명, 변화된 인생,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변화는 그리스도인의 숙명입니다. 변해야 삽니다. 복음 앞에서 변화되어야 합니다.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닮은 성품과 윤리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이것이 맥추절 절기를 지키는 우리를 향해 주시는 깊은 교훈임을 기억하고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사람들로 끝임 없이 변화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축원합니다.

 

말씀과 삶이 어우러지는 로고스라이프 교회     

 

モーセの祝福から得られる霊的な教訓

 

キリスト教は命の宗教です。そのため、神様を信じる聖徒は世界を変えられる生命を抱いています。そのため、聖徒はその生命が世界を変化させていけるように成長してい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1年前より、2年前より、時の流れと共に成長、成熟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成長、成熟はつまり変化を意味することであって、その変化は必ず生命に満ちた世界に変えることができます。

私たちは2018年がスタートしてから6か月という時間を過ごしました。この時点で神様はなぜ刈り入れの祭りの節期を守るようにおっしゃったのでしょうか。今週一週間申命記33章を黙想中に、神様が私たちが歩んできた人生にどのような変化があったかについて焦点を合わせていらっしゃるということに気づきました。申命記33章はモーセが最後にイスラエルの12の部族を祝福する場面を描いています。

ではモーセは何を祝福しているのでしょうか。申命記33章はモーセがイスラエルの12部族に向かって祝福する内容ですが、ルベン族とレビ族への祝福を通じて、刈り入れの節季を迎え、過ぎた6か月の私たちの生活を振り返り、大事な教訓を得ようと思います。

 

一つ目に、ルベン部族に対するモーセの祝福です。

「ルベンは生きて、死なないように。その人数は少なくても。」 (申命記33:6)

今モーセは死を迎える前に各部族を祝福しています。しかしルベンにしているこの祝福は妙な点があります。“死なずに生きて、その数が少なくならないこと”を望むことは祝福とは捉えがたいです。しかしモーセはルベンのために、死なずに生きることを祈っています。どのような理由でこのような祝福をしているのでしょうか。この原因を正確に知るためには創世記49章3-4節の御言葉と繋げて考えなければなりません。

「ルベンよ。あなたはわが長子。わが力、わが力の初めの実。すぐれた威厳とすぐれた力のある者。だが、水のように奔放なので、もはや、あなたは他をしのぐことがない。あなたは父の床に上り、そのとき、あなたは汚したのだ。彼は私の寝床に上った。」 (創世記49:3-4)

 

ここで私たちが念頭に置かなければならないのは、モーセの祝福は今500年前にあったヤコブの祝福を前提にし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しかしモーセが500年後にルベン部族を祝福した内容が“生きて、死なないように。その人数は少なくても”と願ったことは、そう祝福せざるを得なかったルベン部族の姿に理由があります。ルベン部族の子孫はその祖先のように生存する事自体が危ぶまれているのです。祖先であるルベンにヤコブが祝福したその後も、その子孫は全く変化がないことを語っているのです。

 

 

二つ目に、レビ部族に対するモーセの祝福です。

「レビについて言った。「あなたのトンミムとウリムとを、あなたの聖徒のものとしてください。あなたはマサで、彼を試み、メリバの水のほとりで、彼と争われました。彼らは、あなたの定めをヤコブに教え、あなたのみおしえをイスラエルに教えます。彼らはあなたの御前で、かおりの良い香をたき、全焼のささげ物を、あなたの祭壇にささげます。」(申命記33:8,10)

 

レビはルベンのように性的な犯罪ではなかったですが、大きな過ちを犯した人です。創世記49章5節にヤコブがレビを祝福する場面において、彼は祝福か呪いかわからない祝福をしています。「シメオンとレビとは兄弟、彼らの剣は暴虐の道具」であると。レビは剣は暴虐の道具であるという、祝福ではなく呪いを受けた者でした。しかし彼の子孫は500年が過ぎ、モーセがレビ部族を祝福するのに“主の敬虔な者”となり、主の律法を教え、神様捧げる祭祀を全うする者になったのです。

私たちは覚えてお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創世記を記した者もモーセであり、申命記を記したものもモーセ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創世記と申命記の著者であるモーセがレビのこの変化に対して感激的に記録し、祝福しているのです。呪いが変わり神様の御言葉に献身するものへと変化しました。変化した運命であり、人生です。モーセもレビ部族でありアーロンもレビ部族の人です。ヤコブはレビに“レビの剣は暴虐の道具”であるとし、“わがたましいよ。彼らの仲間に加わるな”、“のろわれよ。彼らの激しい怒りと、彼らのはなはだしい憤りとは”としましたが、500年が過ぎモーセが遺言を残す時は、変化した人生で祭司の一家となり御言葉を全うする貴い人となったのです。

 

福音は力です。イエスキリストは私たちの運命と人生と品性と倫理を変える力です。その方の十字架は私たちの堕落した本性を捨てさせ、神様に従う人生へと道行きます。その福音、その十字架の福音に出会い、経験した私たちは当然レビのように変化した運命、変化した人生、変化した生き方を生きなければなりません。

変化はクリスチャンの宿命です。福音の前で変わ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新しくな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神様に似た品性と倫理に変化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れがクリスチャンとして私たちが歩まなければならない道です。これが刈り入れの節期を守る私たちに向けられた大切な教訓であることを記憶し、神様の御心にかなう人々として絶えず変化する私たちになることを心よりお祈り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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