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6.17] 하나님을 경외함이 사람의 본문입니다 [13] (로마서3:10-20) 장원규목사、ロゴスライフ教会

하나님을 경외함이 사람의 본분입니다(13)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바른 자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자세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미래의 방향을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의 복은 자세가 좋은 사람에게 넘쳐흘러 좋은 미래를 열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해 좋은 자세를 갖추면 하나님의 복은 무한히 그리고 풍성하게 임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인생에서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길 원하십니다. 그 이유는 자세를 바꾸면 미래가 바뀌고 좋은 미래를 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복주시기 앞서 백성들에게 먼저 요구하는 것은 우리의 자세를 바르게 세우는데 초점을 맞추십니다.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의 자세를 바르게 세우기 위해 사용하는 좋은 도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후에도 하나님을 향한 자세는 좋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그런 자세로 위대한 민족, 보배로운 성민으로 세울 수 없다는 판단 하에 그들의 자세를 바꾸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더 이상 노예가 아닌 왕의 자세로, 교만이 아닌 겸손한 자세로,원망이 아닌 감사하는 자세로, 의심이 아닌 믿음의 자세로 말입니다.

이렇듯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또한 동일합니다.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바른 믿음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바른 자세를 갖추었는지를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이 “두려움”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흐르는 중요한 하나의 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선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항상 너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믿음으로 광야의 길을 걸어가야 했고,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믿음을 가지고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두려움에 대한 두 가지의 태도를 반드시 갖추어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에 세상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하나님의 자녀의 삶은 오직 믿음으로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믿음이 아닌 눈에 보이는 물질의 힘으로 살아가야 하는 곳입니다. 세상은 물질의 힘을 가져야만 버틸 수 있고,편안하게 살 수 있고, 생존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 자연스럽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 광야생활을 연상하시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광야는 말 그대로 인간으로선 생존 불가한 환경입니다. 그런 곳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내신 것입니다. 광야의 길을 걸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에 자연스럽게 자리한 것도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인생의 그 어떤 문제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를 갖고 살아가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태도입니다.

성경 전체 흐르는 중요한 맥 하나가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지난 인류 역사의 가장 큰 불행은 세상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것이며 그분께 합당한 영광을 올려드리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루어지지만 이미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즉 모든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깊이 인정하고 그의 피조물인 인간은 두려움과 떨림으로 그의 모든 말씀에 온전한 순종의 삶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인생의 결론을 이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12:13)

성도 여러분, 시대를 불문하고 성경의 한결같은 인간을 향한 문제 제기는 이것입니다.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롬3:18)

인간 역사 이레 인생의 모든 불행의 시작이자 인생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게 된 원인도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 문제였습니다. 인간의 본분이 무너질 때 나타나는 현상은 인간은 자신중심이 되고, 자기 뜻대로 살고, 자기만족을 위해 살아갈 뿐입니다.하나님의 말씀은 안중에도 없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소중한 사명은 헌신짝처럼 버리고,하나님의 뜻과 의의를 이루는 삶에 대해 열정은 없고 현실 안주와 안전 그리고 쾌락에 빠진 삶을 살아갑니다. 이 모습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자연스럽게 맺는 열매들입니다.

꼭 기억합시다.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시기에 세상에 대해 담대함으로 살아갑시다.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시기에 하나님을 경외하며 두려움과 떨림으로 모든 말씀을 경청하고 마음과 목숨을 다해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데 힘써야 합니다. 그 길만이 광야 같은 세상 여정에서 거룩한 생존을 이어갈 수 있고, 언제 주님 오셔도 영광스럽게 주님을 공중에서 만날 수 있는 보배로운 성민이 될 것입니다

 

말씀과 삶이 어우러지는 로고스라이프 교회   

 

   

神様を恐れることが人間の本分です(13)

 

聖書における信仰とは、神様に向かう正しい姿勢のことを語っています。私たちの人生で姿勢が大切な理由は、それが未来の方向を決めるためです。つまり、神様の恵みは正しい姿勢の人にのみ溢れ、良い未来を迎えられるようになるのです。神様に向かう正しい姿勢を維持すると神様の祝福は無限に、そして豊かに私たちにのぞむようになります。そのために神様は私たちに人生において姿勢がどれだけ大切かを悟ることを願っておられます。その理由は、私たちの姿勢を変えることで未来が変わり、良い未来を切り開くことができるためです。神様は私たちを祝福される前に、私たち民に、私たちの姿勢を正しく整えることに焦点を置かれています。苦難は神様が私たちの姿勢を正しくさせるために用いられる良い道具です。

イスラエルの民は、出エジプトをした後にも神様に対する姿勢が良くありませんでした。神様は彼らがそのような姿勢で、偉大なる民族、尊い聖民として迎え入れることができないという判断の下、彼らの姿勢を変えることを決意されました。これ以上奴隷ではなく王の姿勢で、傲慢ではなく謙遜の姿勢で、恨みの姿勢ではなく感謝の姿勢としてです

このように今日を生きる私たちクリスチャンに対する神様の御心もまた同じものです。私たちが神様を信じるのであれば、正しい信仰の姿勢を持たなければなりません。神様に対する正しい姿勢を保てているかを測る基準となるのが、“恐れ”です。

聖書には全体を通貫している大きな流れが一つあります。神様は神様の民に向かって、“いつもあなたたちと共にいる”という約束の御言葉をくださいました。イスラエルの民はこの御言葉を信じて荒野の道を歩まなければならず、クリスチャンはまさにこの信仰をもって荒れ野のようなこの世を生きているのです。私たちが“神様がいつも共にしてくださる”という信仰で生きるときに私たちは恐れに対する二つの態度を必ず整えなければなりません。

 

一つは、神様が共にしてくださるために、この世を恐れない態度です。

私たちが生きる世界は神様の御子たちが神様の思い通りに生きることができる、そのような場所ではありません。神様の御子はその人生をただ信仰のみで生きていくのです。しかしこの世は信仰ではなく、目に見えるこの世のものの力で生きていかなければならない場所です。世界は物の影響力を持ってこそ耐えることができ、楽に生きることができ、生存できるところです。そのために私たちの心には自然とこの世に対する“恐れ”が腰を据えるようになります。

イスラエルの民が出エジプトした後の荒野での生活を思い出すとより理解ができるかと思います。荒野は言葉通り、人が生き延びていくことができない環境です。そのようなところに神様はイスラエルの民を導かれたのです。

 

 

荒野の道を歩くイスラエルの民の心に自然と湧き出たのも、“恐れ”です。神様が私たちと共にしてくださることを信じるのであれば、私たちは人生のどんな問題の前でも怖じけない態度で生きなければなりません。

 

二つ目は、神様が私たちと常に共にしてくださるために、私たちが神様を恐れる態度です。

聖書全体の大切な流れの一つの中に、創造主である神様の御前で、すべての被造物は神様を敬畏することです。過ぎた人類の歴史の中の最も大きな不幸は、世界万物を創られた神様を知らないことであり、値する栄光を捧げられず、向かいいれ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ことです。

今私たちに最も必要なものは、神様との正しい関係です。神様を信じない人々に神様との関係の回復はイエスキリストを通して神様を信じる信仰につながりますが、すでに神様を信じる人々にとって神様との正しい関係とは神様を恐れることです。つまりすべての創造主である神様の存在を認め、その被造物である人間は恐れとおののきをもってその御言葉に完全なる従順で神様を敬畏することです。そのためにソロモンは人生の結論を次のように語っているのです。

「結局のところ、もうすべてが聞かされていることだ。神を恐れよ。神の命令を守れ。これが人間にとってすべてである。」伝道者の書12:13

 

聖徒の皆さん、時代を問わず、人間に対する聖書の一貫した指摘は次のようなものです。

「彼らの目の前には、神に対する恐れがない。」ローマの人への手紙3:18

人間の歴史の中で、人生のすべての不幸の始まりであり、神様より審判を受けるようになった原因もまた、神様を恐れないこのような問題でありました。人間の本分が崩れてしまうときに起こる現象は、人間は自己中心的になり、自分の意をもとに生き、自分の満足のために生きるだけです。神様の御言葉は心になく、神様がゆだねられた大切な使命は投げ捨て、神様の意と義を成す人生に対する熱情は冷め、現実に対して安住する、快楽に溺れる人生を生きていきます。この姿が、神様を恐れない時に自然と結ばれる実なのです。

 

皆さん、必ず心に留めておきましょう。神様が常に私たちと共にしてくださることを信じ、世に対して勇ましく生きていきましょう。神様が私たちと共にしてくださるがために、神様を敬畏し、恐れとおののきをもって、御言葉を傾聴し、心と命を捧げて従順に従う人生を生きていくことに努め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の道のみが荒野のようなこの世を歩む過程において聖なる生き方を生きることができ、いつ神様が臨まれても栄光をもって神様を迎えられる尊い聖民となるでしょう。

 

 

言葉(ことば)生(い)きる」ロゴスライフ教会

[2018.06.03] 도덕적인 인간의 세번째 부류 – 율법주의자 (11) 장원규목사、ロゴスライフ教会

도덕적인 인간의 세번째 부류 – 율법주의자 (11)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실 때 모든 만물은 겉과 속이라는 두 형태로 만드셨습니다. 겉을 형식이라고 하며 속은 내용 또는 의미라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겉과 속 어디에 삶의 비중을 두고 사느냐에 따라 삶의 질과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겉모양에 더 치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겉이 아닌 속을 보는 것입니다. 겉을 치장하는 삶이 아닌 속을 단장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하나님을 겉을 보시는 분이 아닌 속을 보시는 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시선을 가진 사람을 일컬어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라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겉만 보는 것입니다. 진리와 진실을 겉으로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겉만 보고 판단하고 행동하게 되면 반드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빠질 수 있는 모습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겉모양에 빠져 사는 자를 가리켜 ‘율법을 의지하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이 도덕적인 인간이 빠질 수 있는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율법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겉모습만 보고 사는 율법주의자가 치중하는 삶의 모습 다섯 가지를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첫째는 “하나님 법을 의지하며” 삽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자랑하며”삽니다. 셋째는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삽니다. 넷째는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삽니다.

다섯째는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아이의 선생”으로 삽니다.

이와 같이 유대인들은 율법을 의지하고, 율법을 받았으며, 율법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완벽한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 어떤 흠도 없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겉모습을 한 꺼풀 벗겨 내고 그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가를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 속에 어떤 것을 담고 있는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롬2:21-24)

바울은 유대인들은 율법을 의지하고, 율법을 받았으며, 말끝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는 사람들인데 겉으로 보기에 완벽한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인데 실상 그 속은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한 자”였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는 자”였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는 자”였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는 자”였다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 자”였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사람처럼 행동하였는데 실제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심지어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는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결론적으로 전해주시는 말씀은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채우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는 사람, 자기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지 않는 사람은 율법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그리스도이라면 육체의 삶에 치중하는 삶만을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 육체를 거룩하게 구별하여 우리의 속사람 즉 하나님의 영을 마음에 온전히 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속과 겉이 점점 더 하나가 되어가야 합니다. 특히 속모양이 겉모양 곧 삶의 모습을 결정하기에 속 사람을 더 강건하게 해야 합니다. 항상 속에 생명이신 주님을 담아 모든 생각과 모든 행위가 주의 영이 역사하여 겉모습은 더 주님을 닮아가고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겉모습은 아무리 화려하고 좋게 보이는 율법주의자가 되어 모든 것은 헛되고, 거짓되어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말씀과 삶이 어우러지는 로고스라이프 교회

 

道徳的な人の特徴―良心(11)

 

神が万物を創造された時、すべての万物は心(内)とうわべ(外)という二つの形で造られました。うわべを形式と呼ばれ、心は内容や意味と言います。重要なのは心とうわべどこに生活の比重を置いて生きるかによって、生活の質と結果が変わるということです。問題は、多くの人が目に見える外観に、より重点を置いて生きる人が多いということです。

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人々の生活の方式は、信仰です。信仰に生きることは、うわべではなく、心を見せることです。うわべを飾る人生ではなく、心を整える人々がまさにクリスチャンと言えるでしょう。それで、神は自らこう言われました。

しかし【主】はサムエルに仰せられた。彼の容貌や、背の高さを見てはならない。わたしは彼を退けている。人が見るようには見ないからだ。人はうわべを見るが、【主】は心を見る。(サムエル記第一 16:7)

神はうわべを見るのではなく、心を見るみ方です。このように、神の視線を持つ人を信仰に生きる人と言います。では、罪とは何でしょう。うわべだけを見ることです。真理と真実はうわべに飾ることではありません。それで表面だけを見て判断し行動すると、結局罪を犯してしまうのです。このような姿が、今日のクリスチャンたちにありうる様子であることを私たちは忘れてはいけません。

使徒パウロは、外見に陥って生きる者を指して「律法に頼って」と言われています。このような姿が道徳的な人間が落ちる第三の部類の人々なのです。今日、一緒に読んだ本文は、律法に頼って生きていく、外見だけ見て生きる律法主義者が重点を置いて生活する様子、5つを私たちに紹介しています。

もし、あなたが自分をユダヤ人ととなえ、律法を持つことに安んじ、神を誇り、みこころを知り、なすべきことが何であるかを律法にえられてわきまえ、また、知識と理の具体的な形として律法を持っているため、盲人の案人、やみの中にいる者の光、愚かな者の導き手、幼子の師だと自任しているのなら 

(ローマ人への手紙 2:17-19)

第一は、「律法を持つことに安んじ」生きます。第二は、「神を誇り」生きます。第三は、「みこころを知り、なすべきことが何であるかを律法にえられて」生きます。第四は、「 極めて善いこと分別し」生きます。第五は、「 盲人の案人、やみの中にいる者の光、愚かな者の導き手、幼子の師だと自任し」生きます。

このように、ユダヤ人たちは、律法を頼りにし、律法を受け、律法を持つ人々です。

うわべで見ると完璧な神の人の姿です。どんな咎もない人のように見えます。しかし、彼らの外見を剥がし、その内面に何が入っているのかを見てみました。その内面にはどのようなものがあるのか、次のように述べています。

どうして、人をえながら、自分自身をえないのですか。むなときながら、自分はむのですか。姦淫するなと言いながら、自分は姦淫するのですか。偶像を忌みきらいながら、自分は神殿の物をかすめるのですか。律法を誇りとしているあなたが、どうして律法に違反して、神を侮るのですか。これは、「神の名は、あなたがたのゆえに、異邦人の中でけがされている」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

(ローマ人への手紙2:21-24)

 パウロは、ユダヤ人たちは、律法を頼り、律法を受けており、常に神のみ言葉を語る人たちなのに、うわべには完璧な神の人の姿なのに、実際その内面はどうなのか説明しています。

第一は、「人をえながら、自分自身をえない者」であること。第二は、「むなときながら、自分は者」であること。第三には、「姦淫するなと言いながら、自分は姦淫する者」であること。第四は、「偶像を忌みきらいながら、自分は神殿の物をかすめる者」であること。第五は、「律法を誇りとしていながら律法に違反して、神を侮異邦人の中でけがされている者」であったことです。

表面上は、神の人のように行動していましたが、実際には、神の栄光を覆って、神を冒涜している生活をしていたということです。パウロが私たちクリスチャンに結論として伝えている言葉は心に、イエス・キリストの真理を満たす人だけが真に神に仕える人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それで自分の中に、イエス・キリストがおられない人、自分の中に聖霊が宿っていない人は、律法主義者になれるしかないのです。

私たちが救われたキリスト者ならば肉体の生活に重点を置く生活だけで生きてはなりません。その肉体を聖く区別して、私たちの内なる人、つまり神の御霊を心に完全にうけとめる者にな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れで心とうわべが一つになって行くのでしょう。特に心がうわべ、すなわち生活の様子を決定するので、心をより丈夫にする必要があります。常に心に命である主をうけとめ、すべての考えと行いに主の御霊を働かせ、より主に似て、主に栄光を捧げ、主の御心が成し遂げられる人生になるべきでしょう。そうでなければうわべの華やかな律法主義者になって、すべてのものはむなしく、偽りの者になり、神の裁きのみ前に立つのでしょう。

 言葉1ことば 1いきる」ロゴスライフ教会

[2018.05.28] 도덕적인 인간의 두 번째 부류-양심(10)(로마서 2:12-16) 장원규목사

도덕적인 인간의 두 번째 부류-양심(10)

 

오늘 본문인 로마서2장12-16절 말씀은 도덕적 인간 중 두 번째 부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로 양심주의자입니다. 인간의 양심으로 모든 의와 선을 완벽하게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 전서를 통해 “선한 양심”, “착한 양심”, “깨끗한 양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왜 양심 앞에 수식어로 ‘선한’, ‘착한’, ‘깨끗한’을 붙인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인간이 죄를 지은 이후 인간의 양심 자체가 오염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인간 스스로 양심을 정화하고 회복시키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웅덩이에 고여 있는 썩은 물은 스스로는 정화할 수 없듯이 죄에 의해 타락한 인간의 양심도 이와 같습니다. 스스로 완전하게 회복될 수 없기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양심에 대한 성경의 인식입니다. 이 인식을 바탕으로 성경은 양심주의자를 두 부류로 나누어 말씀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법을 모르거나 무시하는 양심주의자입니다.

그런 부류의 양심주의자들에 대해 로마서2장12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하나님의 법이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든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법 없이 자기 양심만으로 의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법이 없으면 죄가 없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법이 없는 곳에 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인식이 없을 뿐입니다. 즉 죄에 대해 인식하지 못할 뿐이지, 죄는 죄로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잣대 없이 우리의 양심대로 살면 반드시 망하는 것 즉 죽은 것임을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법을 가진 양심주의자입니다.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롬2:12후)

양심주의자의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 자기 양심만으로 하나님의 법을 구현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즉 자기 힘, 자기 공로로 하나님의 말씀을 다 지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과연 그럴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하나님의 법을 ‘상대적으로’ 지킬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명령을 10%밖에 못 지키고 있는데 자신은 잘 지킨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만족, 자기 착각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드러내는 의는 상대적인 것인데도 그것이 절대적이 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의인이라 착각하고 있다가 결국 심판을 당하고 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행함이 상대적인 것이 아닌 절대적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3:28)

인간은 죽었다 깨어나도 율법을 다 지켜 온전해 질 수가 없습니다. 그럼 우리는 의로운 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의로운 자가 될 수 없다면 의로우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인생이 되고 그런 인생은 다 심판 아래 놓이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는 죄인인데 영생의 삶을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도저히 그 어떤 가능성을 찾을 수 없는 멸망자 인생일 뿐입니다. 그런데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의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의롭다’라고 여겨주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약속은 너무나 감격적인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부족한 의를 주님께서 다 채워 주신다는 사실을 정말 깨닫는다면 이 사실을 정말 믿는다면 지금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 주님께 감사하면 기쁨과 순종의 삶 외에는 다른 삶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성도 여러분 마음속에 기쁨이 있으십니까? 감사가 있으십니까? 기쁨과 감사는 사라진지 오래고 혹시 답답하고 무미건조하며 무거운 부담만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항상 기뻐하고 늘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라시는데 과연 여러분들은 요즘 행복하십니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세상이 점점 살기가 힘들어지고 어려워지기 때문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만 정말 세상이 점점 살기 힘들고 어려워져서 우리가 기쁨과 감사를 잃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세상이 좀 나아지면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 수 있게 될까요? 행복해 질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이 바뀌어야만 기뻐하며,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이 바뀌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뀌어야만 합니다. 세상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를 계수해 보도록 합시다. 그리고 넘치는 감사를 가지고 한 주간 힘 있게 사시고 다음주 하나님 전으로 나아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과 삶이 어우러지는 로고스라이프 교회

 

道徳的な人の特徴―良心(10) 

本日の本文、ローマ人への手紙2章12-16節のみ言葉は、道徳的な人の二つ目の特徴について話しています。所謂良心主義者のことです。人の良心ですべての義と善に完璧に至ることができるのだと信じている人たちです。

使徒パウロはテモテへの手紙を通して、“正しい良心”、“善い良心”、“きよい良心”と強調しています。パウロは何故、良心の前に修飾語として‘正しい’、‘善い’、‘きよい’をつけたのでしょうか。その理由は人が罪を犯してからは人間の良心そのものが汚染されてしまったからです。主の助けがなくては人間自ら良心を浄化して回復させるのは不可能だからです。水溜りの腐った水が自然に浄化されないように罪によって堕落した人間の良心もそうです。自ら完全に回復できないため、主の助けが必要なのです。これが、良心に対する聖書の認識です。この認識のもとに聖書は良心主義者を二つに分けて言います。

一つ目は、主の法を知らない若しくは無視する良心主義者です。

このような良心主義者に対してローマ人への手紙2章12節はこう言われています。“律法なしに罪を犯した者はすべて、律法なしに滅び、”

主の法が伝わらなかったがために知らない場合であれ、意図的に主の法を無視してしまう場合であれ、主の法なしに自分の良心をもって正しく生きぬけると思っている人たちです。法のないところに、人に罪をあてがう術はありません。正確に言えば、法が無い所には罪がないというより、罪に対する認識がないといえます。すなわち、罪を認識できないだけで、罪はそのまま残っ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ですから、主の法、主の基準なしに良心のままに生きると必ず滅びる、つまりは死ぬのだと聖書では明らかに言われています。

二つ目は、主の法を持っている良心主義者です。

“律法の下にあって罪を犯した者はすべて、律法によってさばかれます。”(ローマ人への手紙2:12後)

良心主義者の二つ目の部類の人は、主の法を持っています。ところが、問題はこのような部類の人の特徴は主の恵みなしに自分の良心だけで主の法を成し遂げることができるのだと信じている人です。即ち、自分の力、自分の働きで主のみ言葉をすべて守れるのだと信じている人です。本当にそうなのでしょうか。それは、ありえません。主の助けがないと、主の法は‘相対的に’守るようになるからです。このような人は主の命令を実際は10%従っているのに自分はよく従っているのだと思ってしまうのです。自己満足、錯覚に陥っているのです。自分が現す義は相対的にすぎないのに、それが絶対的な義だと思うことです。そして、自分自身を義人だと勘違いしてしまい、結局は裁かれます。主がおっしゃる行いは相対的ではなく絶対的なことであることを知るのが大切です。

では、私たちは何をすればいいのでしょうか。

“人が義と認められるのは、律法の行いによるのではなく、信仰によるというのが、私たちの考えです。”(ローマ人への手紙3:28)

人間は決して律法を完全に守って義に至ることはできません。では、私たちは義になる者になれないのでしょうか。義になる者になれないと義である主の御前に行けないし、主と共に歩めなくなりますし、そのような人生は裁きに至ってしまいます。律法を完全に守れない罪人で永遠なるいのちを得るのは不可能です。  私たちは到底どのような可能性も生み出せない滅亡者の人生なのです。ところが、義である主が主に認められる義の道を開いて下さったのです。それが、主の義である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れば誰でも“義である”と認めて下さるというみ言葉です。この約束は真に感極まりないみことばではないでしょうか。ですから、私たちの至らぬ義を主が全て満たして下さるということを本当に悟って本当に信じるなら、今どのように生きるのでしょうか。ただ主に感謝し、喜んで聞き従う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だからこそ、使徒パウロはこのように言ったのです。

   “いつも喜んでいなさい。絶えず祈りなさい。すべての事について、感謝しなさい。これが、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あなたがたに望んでおられることです。”(Ⅰテサロニケ人への手紙5:16-18)

皆様、この時分、喜びはございますか。感謝はおありですか。喜びと感謝はなくなり、ともすると、苦しくて枯れてしまってただ重荷だけが残ってい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主はいつも喜んで、すべての事に感謝し、幸せであるようにおっしゃるのですが、皆様はいかがでしょうか。幸せでしょうか。

もしそうではないなら、どうしてだと思われますか。世で生きるのが段々厳しくなっているからでしょうか。多くの人たちがそう言いますが、本当に世の中が厳しくて喜びと感謝をなくしてしまったのでしょうか。世の中の状況がすこし生きやすくなったら喜んで感謝しながら生きることができるのでしょうか。幸せになるのでしょうか。そうではありません。世が変わらないと喜び、感謝し、幸せに生きることはできないと思いがちですが、そうではありません。世か変わるのはなく、私が変わるのです。世に問題があるのではなく、自分に問題があるのです。

本日、み言葉を聞きながら、主に与えられたすべての恵みを数えてみましょう。そして、溢れんばかりの喜びをもって一週間力ある生活を営み、来週主の宮に来て、主が最も喜ばれる感謝をもって礼拝を捧げる私自身と皆様となりますようにお祈りいたします。

み 言葉1ことばに 1いきる」ロゴスライフ教会

 

[2018.05.20] 경건의 능력으로 살고 있습니까?(디모데후서 3:1-5) 장원규목사

경건의 능력으로 살고 있습니까?

말세의 특징을 설명하면서 등장하는 단어가‘고통’입니다. 왜 말세가 고통으로 설명 되어질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의 확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어떠한가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경건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사도바울이 지적하는 경건의 모양만 있는 삶은 어떤 삶일까요?  자기 사랑입니다. 자기 사랑이란 자신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자기를 위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는 좋은 뜻으로 사용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자기 사랑의 대표적인 행위가 우상숭배였습니다.

“내가 본즉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여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어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도를 빨리 떠났기로”(신명기 9:16)

“또 그들이 자기들을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이르기를 이는 곧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한 신이라 하여 하나님을 크게 모독하였사오나”(느헤미야 9:18)

분명 하나님은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밑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신명기 5:8)

그런데 자기를 사랑하면 자기에게 집중하게 되고 자기를 위해서 무엇을 하면 좋을까 하면서 하는 첫 번째가 우상을 만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요구하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말세에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자랑하며 교만합니다. 이기적인 이 모습은 자기 사랑으로 함축됩니다. 자기 사랑은 공동체를 손상시키는 죄들로 이어지는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존재가 자기를 사랑하면 결국 하나님이 사랑하라고 주신 이웃들과도 사랑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쾌락을 하나님보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사랑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경고하신 말씀이 말라기 1장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더러운 떡을 드리면서, 눈 먼 희생 제물을 바치면서 그것이 악하다고 생각하지 아니하는 백성을 향하여 헛된 제사를 하지 못하게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며 그 제사를 받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참 무서운 말씀입니다. 이것이 단지 이스라엘 백성만의 모습일까요? 지금 이 말씀을 읽고 있는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능력은 부인하는 자는 복음에 대한 바른 믿음이 없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없는 자입니다. 내가 이렇게 살고 있다면 그런 삶에서 떠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입으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하나님보다 자기를 사랑하여 결국 경건의 모양만으로 살고 있다면 우리는 이제 경건의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떠십니까? 경건의 모양과 함께 경건의 능력이 드러나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경건의 능력을 얻을 수 있을까요?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디모데후서 3:16).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敬虔の力で生きていますか 

世の終わりの時の特徴を説明する際出てくる単語が「苦痛」です。なぜ、世の終わりが苦痛で説明されるでしょうか。結論から言うと敬虔の形はあるが、敬虔の能力が無いからです。主は我々を愛されました。その愛の印がまさにイエスキリストです。しかし、主を信じる我々はどうでしょうか。私たちが主を信じるならば敬虔の能力があるはずです。今日の御言葉の使徒パウロが指摘している敬虔の形だけある人生はどんな人生でしょうか。

自己愛です。自己愛とは自分が自分の主人になることです。聖書に‘自分の為’と記載された内容で良い意味で使われた事はほとんどありません。自己愛の代表的な行為が偶像崇拝です。

“私が見ると、見よ、あなたがたはあなたがたの神、【主】に罪を犯して、自分たちのために鋳物の子牛を造り、【主】があなたがたに命じられた道から早くもそれてしまっていた。”(申命記9:16)

“彼らが自分たちのために、一つの鋳物の子牛を造り、『これがあなたをエジプトから導き上ったあなたの神だ』と言って、ひどい侮辱を加えたときでさえ、”(ネヘミヤ記9:18)

  確実的に主は自分のため偶像を作らないよう言いました。

“あなたは、自分のために、偶像を造ってはならない。上の天にあるものでも、下の地にあるものでも、地の下の水の中にあるものでも、どんな形をも造ってはならない。”(申命記5:8)

しかし、自分を愛すると自分に集中することになり、自分のために何をすれば良いかを考える初めの事が偶像を作ることです。主が主の民に命じたのは主を愛することです。主に対する愛は心を尽くして、まことを尽くして主におのれを捧げる事だと記載されています。しかし、世の終わりの時の人たちは自分を愛し、お金を愛し、自慢し、傲慢に陥ります。利己的なこの姿は自己愛で現れます。自己愛は共同体を崩す罪人になりますが“不遜な者、神をけがす者、両親に従わない者、感謝することを知らない者、汚れた者になり、情け知らずの者、和解しない者、そしる者、節制のない者、粗暴な者、善を好まない者になり、裏切る者、向こう見ずな者、慢心する者”等です。

主を愛すべき存在が自分を愛すると結局主が愛し合いなさいと言われた隣人とも愛する事が出来ない姿を見せます。これで終わらず“快楽を主より愛する事”になります。つまり、自己愛は主より他をもっと愛する事です。

この全てが敬虔の姿はあるが、敬虔の能力を認めない者たちの姿です。敬虔の姿だけあり、能力が無かったイスラエルの民に対して警告した御言葉がマラキ書1章に記載されています。主は汚れたパンを捧げながら、盲目の獣をいけにえにささげながらそれが悪いと思わない民に対して、“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祭壇に、いたずらに火を点ずることがないように、戸を閉じる人は、だれかいないのか。わたしは、あなたがたを喜ばない”とおっしゃいました。恐ろしい御言葉です。これがただイスラエルの民だけの姿でしょうか。

今、この御言葉の前にいる私たちにおっしゃいます。敬虔の姿はあるが、能力を認めない者は福音に対して正しい信仰を持っていない者です。キリストの救いの能力を信じない者です。私が、貴方がこの姿をしているのであればその姿から離れるべきです。主と信じながら、言葉ではキリスト者だと言いながら主より自分を愛し、結局敬虔の姿だけで生きているのであれば、私たちは今、敬虔の能力を回復すべきです。皆さまの人生はどうでしょうか。敬虔の姿と共に能力がありますか。私たちはどうすれば敬虔の能力を得る事が出来ますでしょうか。

一つ目、主の御言葉から得る事が出来ます。

 “聖書はすべて、神の霊感によるもので、教えと戒めと矯正と義の訓練とのために有益です。それは、神の人が、すべての良い働きのためにふさわしい十分に整えられた者となるためです。(テモテ第二3:16)  主の御言葉が私たちに力を下さいます。

二つ目、祈りです。

敬虔の姿はあるが能力が無かった人々のたとえ話をイエスがマルコの福音書を通して教えて下しました。マルコの福音書9章は霊に取りつかれた息子をイエスが治した事が記載されています。霊に取りつかれた息子を父親が連れて来た時、弟子たちは治せませんでした。結局イエスに連れて来て治されました。その後、弟子たちが聞きます。“どうしてでしょう。私たちには追い出せなかったのですが。”主が答えます。“この種のものは、祈りによらなければ、何によっても追い出せ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하主を信じながら、しかし祈らないのであれば敬虔の姿があるが能力が無い人生を生きるしかありません。

  海に住んでいる魚が生きているうちにはしょっぱくありませんが、不思議に死んだ魚に塩をかけるとしょっぱくなります。これを私たちの霊的状態に適応して見ると姿を持っていれば能力もただで着くものでは無いことを分かります。たまには敬虔の姿で私たちは間違って思う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主は確実的におっしゃっています。“こういうわけで、あなたがたは、実によって彼らを見分け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わたしに向かって、『主よ、主よ』と言う者がみな天の御国に入るのではなく、天におられるわたしの父のみこころを行う者が入るのです。”(マタイの福音書7:20-21)

   実で分かると言います。私たちは今、敬虔の姿でここに座っています。これで満足するのではなく敬虔の能力がある人生に向かって歩みましょう。御言葉と祈り無しでは主に歩むことは出来ません。主の能力を得ることも出来ません。

“神の国はことばにはなく、力にあるのです。”(コリント第一4:20)

み 言葉1ことばに 1いきる」ロゴスライフ教会

 

[2018.05.13] 도덕적인 사람의 특징-판단(9) (로마서2:1-5) 장원규목사

도덕적인 사람의 특징-판단(9)

인간을 분류할 때 크게 두 종류의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형이하학적인 인간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할 수 있습니다. 정욕을 따라 살고, 감정에 충실하게 반응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 말씀을 드렸던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한 종류의 사람은 형이상학적인 인간입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철학적인 사고가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도덕적인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로마서2장은 바로 도덕적인 인간에 초점을 맞추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도덕적인 인간에 속한 사람들은 크게 세 가지의 특징들을 들어내고 있습니다. 로마서 2장은 이 부분을 중심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세 번의 걸쳐 이 부분에 대해 자세히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 세 번에 걸쳐 말씀을 전하려고 하는 이유는 사람은 나름 도덕적인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그 기준이 온전한 신앙을 형성하는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문제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로마서는 이 부분을 통해 우리 각자의 신앙의 현실이 어떠한지를 볼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신앙의 실상을 잘 모르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마지막 순간까지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결과에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도덕적인 사람들에게 들어 나는 첫 번째 특징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2:1)

도덕적인 사람의 첫 번째 특징은 ‘남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1절에서 말하고 있는 ‘판단’은 간단한 판단을 말하는 것이 아닌 남을 정죄 혹은 심판을 의미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바른 믿음에 서 있지 않으면 이와 같이 타락한 도덕주의자가 되기 십상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적 지식으로만 무장하면 그 말씀이 살아서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지식의 말씀을 도덕적 잣대로 삼아 남을 판단하여 정죄하고 심판하기가 쉽습니다. 만약 우리도 이중적인 잣대를 가진 타락한 도덕주의자가 된다면 어떤 결과에 이루게 되는지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2:1)

무슨 말씀입니까? 자신도 여러 문제들을 들어내면서 자신은 접어 두고 남만 정죄하고 판단한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을 정죄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성경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롬2:2)

여기에서 “심판”은 헬라어로 ‘크리마’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취소불가’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내가 남을 험담하고 판단하는 것은 언제든지 취소할 수 있지만 남을 판단하는 너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취소불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점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또 “진리대로”라는 말은 하나님의 심판이 “반드시”임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판단과 정죄하는 일을 대단히 싫어하실 뿐만 아니라 판단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절대로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은 하나님 앞에서 월권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판단하고 정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다 똑같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판단과 정죄와 심판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어느 곳에도 인간에게 다른 사람을 심판할 권한을 주신 일이 없습니다. 즉 인간이 판단하고 정죄한다면 그 행위는 곧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의 시작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다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이 결코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 바로 창조주와 피조물의 경계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길 원하시는 것일까요? 주님 앞에서 자신을 깊이 성찰해 보라는 것입니다. 나 역시 잘못을 범하고 있음에도 나와 똑같은 잘못을 행하는 사람을 정죄하고 심판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 시간, 남의 눈의 티는 보면서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그런 사실이 있다면 지금 나의 들보를 뺀 다음에는 티끌이 있는 형제를 긍휼히 여기며 사랑으로 권면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5월을 가정의 달로 지킵니다. 우리의 모든 가정이 행복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부부관계와 부모와 자녀관계가 바른 관계 속에 있어야 합니다. 혹시 가정이 평안이 없고 기쁨이 없다면 가정에 안에 이루어져야 할 부부와 부모와 자식 간에 사랑의 관계 깨어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랑의 관계를 깨고 있는 것 중 하나 서로를 판단하고 정죄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라는 미명아래 혹시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을 향해 판단과 정죄를 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부모는 부모의 기준을 가지고 자식에게 일방적으로 판단과 정죄의 말을 쏟아 붓고 있는 것은 아닌 꼭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런 관계에 있었다면 우리 마음을 겸손히 낮추고 서로에게 용서를 구합시다. 그리고 이렇게 한 마디의 말을 합시다. “그 동안 당신을 내 기준으로 판단했네. 미안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넘치는 가정이 되어 행복한 에덴동산이 되길 축원합니다.

 

말씀과 삶이 어우러지는 로고스라이프 교회      

 

道徳的な人の特徴―裁き(9) 

人々を分類するときに大きく二つに分けることができると思います。一つは形而下学的な人々です。このような人々の特徴は本能的に生きていく人々、ということができます。情欲に従い、感情に忠実に反応し生きていく人々です。ローマ人への手紙一章でお話しした部類の人々です。もう片方は形而上学的な人々です。この類型の人々は哲学的な思考を中心に生きていきます。聖書はこのような人々を道徳的な人々と呼びます。

ローマ人への手紙第二章はまさにこの道徳的な人々に焦点を当てた話をしています。道徳的な人間に属している人々は大きく三つの特徴を持っています。ローマ人への手紙第二章はこの部分を中心に語っています。私は三回にわたってこの点について詳細にメッセージをお伝えしようと思います。この部分について三回にもわたってお話を差し上げようとするわけは、人々は自分なりの道徳的基準を持って生きていますが、その基準が健全な信仰の形成に否定的な影響を及ぼすためです。クリスチャンは皆この問題から離れることができません。ローマ人への手紙はこの部分を通じて私たち各自の信仰の現実がどのようであるか映してくれています。多くのクリスチャンが自らの信仰の実状をよく知らずに生きていることがあります。そのように生きていると最期の時にまで覆せない深刻な結果をもたらすかもしれません。

今日の本文の御言葉は道徳的な人々に対してその特徴を語っています。

「ですから、すべて他人をさばく人よ。あなたに弁解の余地はありません。あなたは、他人をさばくことによって、自分自身を罪に定めています。さばくあなたが、それと同じことを行っているからです。」(ローマ人への手紙2:1)

道徳的な人の一つ目の特徴は‘人を裁く’ことです。 1節で話している“裁き”は簡単な判断ではなく、他人の罪を定めること、もしくは審判を意味するときに使う言葉です。クリスチャンは正しい信仰の上に立っていないと、このように容易く堕落した道徳主義者になり得るということを忘れてはいけません。聖書の知識だけで武装するとその御言葉が生きて私たちを統べることができないのです。むしろ知識による御言葉を道徳的基準として振りかざし、他人を裁き、罪ある者とし、審判することになります。もし私たちが二重の基準を持つ堕落した道徳主義者になるのなら、どのような結果にたどり着くか、聖書はこのように語っています。

「ですから、すべて他人をさばく人よ。あなたに弁解の余地はありません。あなたは、他人をさばくことによって、自分自身を罪に定めています。さばくあなたが、それと同じことを行っているからです。」 (ローマ人への手紙2:1)

これはどのような意味なのでしょうか。自分も様々な問題を抱えながらも、自分のことは差し置き、他人ばかりを非難し、罪ある者と定めるならば、それはまさに自分に対する罪の定めであるという意味です。このようなことを行う者に聖書は続いて次のように語っています。

「私たちは、そのようなことを行っている人々に下る神のさばきが正しいことを知っています。」(ローマ人への手紙2:2)

ここにおける“裁き”とはヘブライ語で“クリマ”といいますが、その意味は“取り消し不可”という意味です。どのような意味かといいますと、‘私が他人を非難し判断するのはいつでも取り消すことができるが、他人を裁こうとするあなたに対する神様の裁きは取り消すことができない’という意味です。私たちをこの点を常に覚えておく必要があります。また“正しい”ということは、神様の審判が“必ず”下されるという意味です。

神様はこのように他人に対する裁きと罪の定めをとても嫌うだけでなく、その行いをする人々は、神様の裁きを免れることができないということを命じ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の理由は何でしょうか。他人を裁き、罪を定めることが神様の御前において越権行為であるためです。被造物である人間が他の人々を判断し、罪を定めることはできません。なぜなら私たち人間は皆等しく罪びとであるためです。裁きと罪の定めと審判はただ創造主である神様お一人の領域であるためです。聖書どの個所にも人間に対して他人を裁く権利を下さったことはありません。つまり人間が判断し罪を定めようとするならば、その行為はすなわち自らが神となることです。人間の罪の始まりがここからであったことを私たちはよく知っています。人間が決して超えてはいけない線がまさに創造主と被造物の境界線です。

それでは今神様は私たちに何をお話されようとしているのでしょうか。主の御前で自分自身を深く省察してみなさいということです。ここで自分のことを省み、問いかけてみましょう。自分自身もまた罪を犯しているにも関わらず、自身と同じ過ちを犯している人々を裁き、審判してはいないか。今、他人のあら探しをしながらも自身にある欠点は見つけることができていないのではないか。そのような事実があるのなら、あらためて、今、自分自身にある梁を取り除き、ちりのある兄弟姉妹を憐れみ、愛をもって勧める道があるのです。

教会は5月を家庭の月として定めています。私たちすべての家庭が幸せで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のためには夫婦関係、そして親と子供の関係が正しい関係になければなりません。もし家庭に平安がなく、喜びがないのなら、家庭で成されるべき夫婦間、親と子供間の愛の関係が壊れているせいであるかもしれません。愛の関係を壊すものの中の一つがお互いを裁き、罪を定めることです。愛という名目の下、夫は妻に、妻は夫に対して裁きと罪の定め行為を行っていないか改めてみてください。親は親の基準を持って子供たちに一方的に判断と裁きの言葉を発していないか、ぜひ一度注意してみ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のような関係にあったならば、おのれをへりくだらせ、心を低くしお互いに許しを求めましょう。そしてこのような言葉をかけてみましょう。“今まであなたを私の基準で裁いてしまってごめんなさい!”キリストの愛で満たされる家庭となり、幸せなエデンの園になることを心よりお祈りします。

「み言葉に生きる」ロゴスライフ教会

 

[2018.05.06] 십자가와 전인적 회복(이사야 53:5) 장원규목사

십자가와 전인적 회복

구약 성경에서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설명하는 구절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구절이 이사야 53장입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약 700년 전에 활동하던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나중에 오실 예수께서 어떻게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인가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선포케 하신 것입니다. 특별히 이사야 53장의 5절은 비록 한절이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가장 임팩트 있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세 가지 표현이 대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찔림’과 ‘상함’ 당하심으로 우리는 ‘허물’과 ‘죄악’에서 회복된다. 둘째, 예수님께서 ‘징계’ 받으심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린다. 셋째,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다. 이를 간단하고 도표화 하면 이렇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왜 이렇게 십자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그로 말미암는 회복 역시 다각도로 표현했을까?”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깊게 고민하던 중에, 너무 중요한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죄로 타락한 인간을 회복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로 타락하게 되었을 때, 영적으로뿐만 아니라, 전적인 타락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의 영적인 회복뿐만 아니라 전인적인 회복을 주셔야 하며, 이사야 선지자는 이러한 전인적인 십자가의 회복을 표현하기 위해 다각도로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전인적인 회복이란 쉽게 말해서, 영적이고, 혼(마음)적이고, 육적으로 회복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주전 약 700년 전의 사람이었던 이사야의 예언을 십자가 안에서 완벽하게 성취하셨습니다. 예언대로 예수님께서 완전하게 죽으셨지만, 역시 예언대로 우리는 완전하게, 전인적으로 회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라기는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 미리 약속하신 말씀, 예수님을 통해 성취된 말씀을 믿고 날마다 십자가 앞에 나오는 여러분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삶의 전부가 회복되고, 매일 매일을 천국의 기쁨으로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전인적인 회복, 구원은 오직 십자가에서만 가능함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회복하실 수 있는 방법으로 주신 유일한 길은 십자가 이외에 없습니다. 다른 은혜를 구하지 마십시오! 다른 어떠한 것으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마십시오. 십자가가 안에 인간의 전인적인 구원의 방법이 담겨져 있습니다! 십자가에 관한 이사야의 예언은 오늘도 그 말씀을 믿고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인적인 구원을 경험케 하시는 귀한 근거가 됩니다. 할렐루야! 십자가의 소망이 필요한 여러분께 주님의 평안을 전합니다.

 

十字架と全人的回復 

 

旧約聖書で十字架を通した救いを説明する句節の中で最もよく知られているのがイザヤ53章です。イザヤは、イエス様がこの地に来られる約700年前に活動していた預言者でした。神は、イエス様がこの地に来られる700年前に、このイザヤを通して、後に来られるイエス様がどのように十字架を負われ、私たちを救えるかについて具体的に宣言させたのです。特にイザヤ53章5節は、たった一節ですが、イエス様の十字架に対して最もインパクトある形で表現しています。

この句節には、三つの対句があります。まず第一、イエス様の「 刺し通し」と「砕き」によって、私たちは「罪」と「咎」から回復されます。第二、イエス様の「懲らしめ」により、我々は「平安」を受けられます。第三、イエス様の「打ち傷」によって、我々は「癒し」を受けられます。これを簡単に表にすると次のとおりです。

霊的

魂(心)的

肉的

十字架の描写

刺し通し, 砕き

懲らしめ

打ち傷

我々の回復

罪と咎から解放

平安

癒し

私はこの部分で、「預言者イザヤは、なぜこのように十字架について具体的に描写し、それによる回復も多角的に表現したのか」という疑問を持って深く悩んでいた時に、あまりにも重要なことを発見しました。

罪で堕落した人間を回復させるため、神の唯一の方法は、イエス様の十字架でした。ところで、人間が罪で堕落したとき、霊的だけでなく、全面的な堕落がありました。そのため、イエス様の十字架は、人間の霊的な回復だけでなく、全面的な回復が必要であり、預言者イザヤは、これらの完全なる十字架の回復を表現するために多角的に表現したということです。完全なる回復とは、簡単に言えば、霊的に、魂(心)的に、肉的に回復されることを意味します。

神は、紀元前約700年前の人であったイザヤの預言を十字架の中で完全に成し遂げられました。預言どおり、イエス様は完全に死なれましたが、やはり預言通り、私たちは完全に、全面的に回復され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りました。

どうか、皆さまが、神が今日の本文を通してあらかじめ約束されたみ言葉、イエス様を通して成し遂げられたみ言葉を信じて、日々十字架の前に出られる皆様になることを願います。それにより、人生のすべてが回復され、毎日が天国の喜びで生きる皆様になることを願います。

最後に、私たちの完全なる回復、救いはただ十字架だけで可能であることを肝に銘じてください。神が堕落した人間を回復させる方法で与えられた唯一の道は十字架以外にありません。他の恵みを求めないでください!他のどのようなもので、私たちの問題を解決しようとしないでください。十字架の中に人間の完全なる救いの方法が込められています!十字架に関するイザヤの預言は、今日もその言葉を信じて頼るすべての人々に完全なる救いを経験させられる貴重な根拠となります。ハレルヤ!十字架の望みが必要な皆様に主の平安を伝えます。

み 言葉1ことばに 1いきる」ロゴスライフ教会

[2017.1231] 우리가 본 받아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닌 오직 예수입니다 見(み)つめ倣(なら)う方(かた)は主(しゅ)です

우리가 본 받아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닌 오직 예수입니다

인생에는 길이 있습니다. 인생에도 길이 있다는 것은 곧 인생이 반드시 도달해야만 하는 목적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생이 도달해야 할 목적지를 찾고 그 목적지에 이르기 위한 길을 찾으려고 많은 수고와 노력을 기울이며 삽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건 수고를 하지만 인생의 목적지와 그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마침내 허무한 인생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목적지와 길을 찾기 위해 목숨을 건 수고가 있지만 찾지 못하는 이유는 인생의 목적지와 그 목적지에 이르는 길은 피조물인 인간이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만드신 분이 인생의 목적지와 그 목적지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알려주어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이 인생의 길이라고 외치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누구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요14:6)

예수님은 자신이 모든 인생의 길이 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길인 자신을 통해 모든 인간들이 도달해야 하는 그 목적지가 어디인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인생의 길 되신 예수님은 자신을 통해 모든 인간들이 도달해야만 하는 그 목적지가 바로 창조주 하나님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이유는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구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떠나 불행하게 살던 인간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인간을 지으신 분임을 믿고 오직 하나님 의 뜻과 목적을 이루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인생의 길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것은 곧 인생의 목적지인 하나님께 갈 수 있는 약도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개 그 길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길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세상을 더 신뢰하여 세상이 말하는 그 길을 따라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만 예수님과 하나님은 그 세상 길을 통해 세상이 말하는 그 목적지에 남보다 더 빨리 도달하는데 수단 정도로 이용하는 것뿐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불행의 악순환은 눈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보단 눈에 보이는 물질의 소유가 더 매력적이고 더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착각에 빠지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대부분을 더 많이 소유하려는 온 힘을 다 쏟고 삽니다. 부자가 되고, 성공하고, 출세하는 것에 모든 힘을 집중하다 보니 정작 중요한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로 연결시켜 주는 기도와 말씀묵상 그리고 예배에 시간을 드리는 것에는 인색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로마서12장2절의 핵심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뜻은 세상 따라 살지 말고, 세상에 끌려 다니지 말고, 세상으로 목적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과 세대를 본받으면 정말 불행하게 됩니다. 절대로 잘 살 수 없고, 구원 얻을 수 없고, 천국에 갈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2017년 한 해를 살았습니다. 어떠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그 길과 방법을 따라 사셨습니까? 아니면 이 세대를 본받아 욕심과 세상의 방식으로 사셨습니까? 오늘 로마서12장2절에 핵심 키워드는 ‘변화’입니다. 우리는 생각을 바꾸고 사는 방식을 과감하게 바꾸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라고 하시는 것은 ‘이제까지 목적으로 삼고 살던 것을 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산 제물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세상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입니다. 돈이 아니고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뜻과 욕심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의입니다. 그 동안 우리가 목적으로 삼고 살았던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위한 도구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목적으로 삼았던 세상의 모든 것도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 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은 2017년 마지막 주일예배이자 마지막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지나면 우리는 새해를 맞아 한 해를 살게 될 것입니다. 살아온 지난 인생에는 항상 후회가 남길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 해 이렇게 매듭을 짓게 하시는 중요한 이유는 지난 과거를 돌아보고 왜 후회만 남는 삶이었는지 돌이켜 회개하며 결단하고 새 출발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인생의 목적이자 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을힘을 다해 한 해 달려가야 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인생의 길 되신 예수님을 따라 사는 길만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며,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만을 삶의 길과 방식을 삼겠다는 결단이 있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이제는 내 안에 사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목적도 그 목적지까지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만을 인생의 목적과 인생의 길로 삼고, 예수가 삶의 모든 방식이 되는 삶이 될 때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영적 예배를 드리는 인생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이렇게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예배자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을 따라 사는 참 행복한 인생이 되고 가치 있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말씀과 삶이 어우러지는 로고스라이프 교회

 

見(み)つめ倣(なら)う方(かた)は主(しゅ)です

人生を道にたとえた時、そこには目的地があります。その目的地を定め、その目的地に至るために力と思いとが注がれます。いのちをかけてまで定め求めた先が何もないところであり、探しあぐねて終わってしまった先人の例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その理由を私たちは、人が探し出せる類のものではなく、その人をお造りになった方に尋ねてこそ見出すと告白します。イエスは言いました。イエス は彼に言われた.

「わたしが道であり…」(ヨハネによる福音書14章6節)

ご自身こそ人の道とされたイエスさまは、その道の目的地もまたご自身であるとおっしゃいました。

「わたしを通してでなければ, だれひとり父のみもとに来ることはありません」(ヨハネによる福音書14章6節)

イエスは人としてこられました。あらゆる人を救うためです。救いとは何かと問うならば、それは主より離れた人が主に立ち返ることです。主こそ人をお造りになった方、ただ主の心と目的にあって生きる道が本来であったのです。人の道の地図そのものがイエスなのです。そこには目的地も道も記されています。

しかし、得てして私たちはその道を知れど歩もうとしない悲しい性(さが)をもまた持っています。この世とは比類(ひるい)なき方イエスを告白しつつも、この世と比べてしまい、より信頼しようかしまいか迷うのです。イエスという道が、ある目的を達成するためのあるひとつの有用な何かとしてしますのです。この悪循環は、ある錯覚に起因しています。主との関係から、主と所有できる何かとを同じ線上においてしまうことです。そうしてどちらがより魅力的か、より幸福をもたらすかを見出そうとします。どちらが、より我を富ませ、成功をもたらし、出世街道を驀進させしめるかを問うのです。ここには祈りの不在とみことばにある黙想との不在がおのずと伴ってきます。人は、そのようにして実に吝嗇極まりない存在に陥ってしまいます。

 

 

ローマ人への手紙12章2節の中心には、「この世と調子を合わせてはいけません」があります。世にあわせて生きることなかれ、引きずられることなかれ、この世のどこかに目的地を定めるなかれ、です。そこには救いも天の御国もないのですから。

2017年一年間を振り返ります。主を見つめ歩まれたでしょうか。主とこの世とを比べ、そのものさしに己の何らかの方式や欲望が見えていたでしょうか。革新(かくしん)をキーワードとして捉えましょう。思考方式の革新です。後者の己の方式や思いを、主に捧ぐいけにえとしてしまえ、です。私たちが見つめる先には主の御国があります。銭ではなく主です。己の方式や思いにあって築いてきたものがあるのならば、それはむしろ主に捧ぐ道具と化し得ます。その実現の暁には実に美しいものが待っています。

信徒の皆さん、2017年最後の礼拝の時、新年を迎えますが、過ぎし道を思えば後ろ髪引かれることしばしの人生、しかれど前を向き新たに出発を切るときです。イエスキリストにある幸いなことよ. そのそむきを 赦され, 罪をおおわれた 人は信仰です。このスタート地点であり、道であり、目的地であるこの方にあって、死力を尽くして、ふたたび漕ぎ出します。私たちのすべてはキリスト共に十字架につけられたのですから。そして、その目的地を目指すもだたキリスト故なのです。その唯一無二の道をくださった父なる神の独り子をくださったのは、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ている故です。主へのこの霊的礼拝をささげ始める時、即ち、その道に価値が生まれるのです。

「み言葉(ことば)に生(い)きる」ロゴスライフ教会

 

 

 

[2017.1224] 하나님 아들의 오심은 세상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主なる御子は世を救うために来られました

하나님 아들의 오심은 세상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전쟁은 인류를 죽음으로 몰아간 살상의 역사입니다.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죽음의 세력은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끝임 없이 전쟁과 굶주림과 질병 등으로 생명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본래 죽음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지만 요사이 인간의 죽음은 자연사보다 인간들의 탐욕에서 비롯된 전쟁, 테러, 살인 등으로 죽는 죽음이 온 세상을 덮고 있습니다. 인간의 탐욕에 의한 죽음이 난무하는 이런 세상에 생명의 번성을 소망하는 길은 없는 것일까요? 그 길은 생명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우리가 간절히 소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주님의 오심은 죽이고 멸망시키는 죄의 세력을 멸하고 세상을 살리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통하여 죽음으로 치닫는 세상을 생명으로 풍성케 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세상을 살리셨습니다. 죽음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 어떻게 생명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그 생명의 번성이 누구에 의해 확산되고 성취되는지 알려주셨습니다.

2017년 특새 기간 동안 묵상한 말씀이 갈라디아서2장20절입니다. 이 한 절은 성경 전체를 요약한 복음 중에 복음입니다. 오늘 성탄을 맞아 전하려는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14장6절을 통해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이 말씀은 오직 생명은 예수님께만 있고 그 생명을 몸에 담아 예수만 사시는 자만이 생명을 잉태하고 생명을 풍성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자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탄절은 이 생명의 주가 오셔서 죽음의 고통 속에 신음하는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날을 기념하면서 생명의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생명의 역사를 어떻게 일으키셨는지, 그리고 그 생명의 역사가 세상 가운데 어떻게 풍성하게 역사할 수 있는지 되새기는 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성탄예배를 드리는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한 사람이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변방에 작은 마을에 사는 아주 평범한 한 여인입니다. 그런데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마리아의 몸을 통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마리아의 몸을 통해 잉태한 예수님이 세상을 살리는 출발점이 될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메시아 오심을 기다리는 여인이었고 그 메시아가 오시면 어떤 일들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그녀는 이런 믿음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눅1:51)

예수의 오심은 분명 마리아가 이해한 것처럼, 가난하고 곤고한 백성들, 버림받아 소외되었던 사람들을 들어 올려 존귀하게 하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성탄은 교만하여 세상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그 모든 자들을 부서 버리고 죽음의 고통 속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소망의 날이 되었기에 온 인류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날입니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상을 예수의 생명으로 풍성하게 만드는 그 시발점이 비천한 여인 마리아였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리아가 자신의 몸에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기 위해서는 율법에 따라 죽음을 당할 수 있는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자신의 몸을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지는 도구로 하나님께 드립니다. 마리아는 하나님께 자신의 몸을 주기 위해서는 자기죽음이라는 희생을 대가로 지불해야만 했습니다.

그 선택은 마리아로 하여금 이 세상에 생명의 주가 오시는 통로가 되었고 그의 몸을 통해 잉태된 예수생명은 온 세상으로 확산되었고 더 풍성하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이 세상 모든 그리스도인을 상징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마리아의 태에 잉태하셨다는 것은 곧 이 세상 온 인류 가운데 잉태하셨다는 뜻입니다. 마리아 한 사람만이 아니다. 모든 인류가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온 인류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오신 사람의 아들입니다. 은혜를 입은 마리아의 태는 온 인류의 태입니다. 하나님이 온 인류와 함께 하시는 것이요, 성령이 온 인류에게 임하신 것이며,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세상을 덮으신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이제는 내 안에 예수가 사셨다는 것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잉태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몸은 마리아처럼 예수의 생명이 역사할 수 있는 자궁이 된 것입니다. 마리아처럼 우리도 어떤 환경 앞에서도, 죽음 앞에서도 그 어떤 희생을 감수하며 생명의 주를 모시는 거룩한 몸으로 산다면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 내 삶과 일본과 열방으로 확산되어 더 풍성케 될 것입니다.

 

말씀과 삶이 어우러지는 로고스라이프 교회

 

主なる御子は世を救うために来られました

人類の歴史は戦争の歴史だと言っても過言ではありません。その戦争は人類を死に追い込んだ殺戮(さつりく)の歴史です。人を死に追い込む死の勢力は、たった一度も休むことなく絶えず戦争ばかりか飢えと病いなどもあり、つねに人のいのちを脅かしています。

本来、死とは人間が避けられない運命なのですが、最近人間の死は自然死より人間の貪欲から始まった戦争、テロ、殺人などで死ぬ死の方が上回り、世を覆っています。では、人間の貪欲による死が溢れているこの世において、果たしていのちの繁栄を望める道はないのでしょうか。その道はいのちの主であるイエス・キリストがこの世に来られることです。イエスの臨在を私たちが切に望む理由は何でしょうか。

 “わたしが来たのは、羊がいのちを得、またそれを豊かに持つためです。”(ヨハネによる福音書10:10)

主が来られたのは死なせて滅亡させる罪の勢力を絶ち、世を救うためです。そして、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ている人たちを通して死に走っていく世をいのちで満たすためです。主はこの世に来られ、十字架で死なれ、世を救われました。死に支配されているこの世にどのようにいのちの働きを起こすことが出来るか、そして、これからいのちの繁栄がだれによって広がって成し遂げられるかを示してくださいました。

2017年特別早天祈祷会の期間中、黙想したみ言葉がガラテヤ人への手紙2章20節でした。この一節は聖書全体を要約したと言える福音(ふくいん)の精髄(せいずい)です。本日、クリスマスを迎へ、お分かちするみ言葉は“主の御子を信じる信仰”です。イエスはヨハネの福音書14章6節を通してご自身をこのように紹介されます。

“わたしが道であり、真理であり、だれひとり父のみもとに来ることはありません。”

このみ言葉である主に、ただいのちがあり、そのいのちを持って主だけが生きている者のみいのちを授かり、いのちを豊かにす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このように主の御子を信じる信仰で生きる者のみ主に向かって進めることが出来るとおっしゃいました。

クリスマスはこのいのちの主が来られて死の苦痛で嘆く世を救うために来られた日であり。それを記念していのちの主が世に来られていのちの働きをどのように起こられたか、そして、そのいのちの働きが世の中でどのように豊かに働かれたか、それを覚える日です。

そのような意味で本日クリスマス礼拝を捧げる私たちが注目すべき人はマリヤです。マリヤはガリラヤのナザレという地方の小さい町に住んでいた平凡な一人の女性でした。ところが、いのちの根源である主なる御子がマリヤの身を通して世に来られたのです。マリヤの身体に身ごもられたのが、イエスが世を救われる出発点に成れたのです。

 

マリヤはメシヤの臨在を待っていた女性であり、そのメシヤが来られたらどのようなことがこの世に行われるか彼女はこのように信仰の告白をしました。

“主(しゅ)は、御腕(みうで)をもって力強い(ちからづよ)わざをなし、心(こころ)の思い(おも)の高ぶって(たか)いる者(もの)を追い散らし、権力(けんりょく)ある者(もの)を王位(おうい)から引き降ろされます。低い(ひく)者(もの)を高く(たか)引き上げ、飢えた(う)者(もの)を良い(よ)もので満ち足らせ、富む(と)者(もの)を何(なに)も持たせないで(も)追い返されました。”(ルカの福音書1:51-53)

イエスの降臨は確かにマリヤが理解したように、乏しくて困り苦しむ民たち、捨てられてのけ者にされている人たちを引き上げて尊くしてくださった出来事です。ですから、クリスマスは高ぶって世を死に追い込んだすべての者たちを追い散らして、死の苦痛の中にいるすべての者たちに新しいいのちを与える希望の日になったので、人類が喜んで楽しむ日なのです。

ここで、大切なのは、世をイエスのいのちを通して豊かにするその出発点が卑しい女性であるマリヤだったということです。マリヤが自分の身に主の御子を身ごもるためには、律法による死が待ち構え、それへの恐れがある、決して容易くはない選択が伴っていました。ところが、マリヤは自分の身を主のみ言葉が成し遂げられる道具として主に捧げます。マリヤは主に自分の身を捧げるためには、死という犠牲を代価として払わ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この選択はマリヤによってこの世にいのちの主が来られる管になり、彼女の身を通して身ごもられたイエスのいのちは世に広がって豊かになりました。

マリヤはこの世ですべてのキリスト者を象徴する存在です。主の御子がマリヤの母胎に身ごもられたというのは、即ちこの世のすべての人類の中に身ごもられたということです。マリヤ一人だけではない、すべての人類が恵みを受けたのです。言いかえば、すべての人類が主の恵みの中でイエス・キリストを身ごもったのです。イエス・キリストはすべての人たちのために来られた人の子です。恵みを受けたマリヤの母胎は人類の母胎です。主がすべての人類とともにおられ、聖霊がすべての人類に臨まれ、いと高き方の力が世を覆われたことです。インマヌエルの歴史が始まったのです。

私たちがキリストと共に十字架で死に、もはや私のうちにイエスが生きておられるということは、私たちの内にキリストが身ごもられたということです私たちがキリスト者なら、私たちの身はマリヤのようにイエスのいのちが働く子宮になったのです。マリヤのように私たちもどのような環境にあっても、死の前でも、どのような犠牲があっても、いのちの主を迎える聖なる身で生きているなら、主の御子のいのちが私の人生と日本、そしてあらゆるところに広がってもっと豊かになるでしょう。

 

「み言葉(ことば)に生(い)きる」ロゴスライフ教会

[2017.01.22] 올 한 해 하나님께 승부를 걸어봅시다(요한복음 1:12-13)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몇 년 전 우리나라 최고 재벌의 자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뉴스를 들으면서,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성공한 재벌의 사람을 아버지로 둔 사람이 뭐가 부족해서 스스로 목숨까지 끊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재벌의 딸이 그 엄청난 권세와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데도 삶의 소망과 삶의 의미를 상실한 채 비관하여 스스로 세상을 등지는 일을 감행하는 것을 보면서 세상은 반드시 한계가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그 모든 한계를 넘어서 능력 있는 삶을 살고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보장 받은 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자녀의 권세’가 무엇일까요? 자녀의 권세는 아버지의 것이 자신의 것이 되는 권세입니다. 자녀의 권세는 부모의 모든 것을 상속받을 수 있는 권세입니다. 세상에 권세 중의 최고의 권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입니다. 그런데 이 권세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는 사람에게 주시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믿어 자기를 부인하여 내가 내 삶의 주인 됨을 포기하고 모든 삶의 주권이 예수님께 있음을 인정하고 인생 전부를 예수님의 손에 맡긴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시다.’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핵심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네 지갑 속에 있는 돈에 대한 태도에서 결정됩니다. ‘지갑의 주인이 곧 내 주인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아무리 입으로 주여 라고 외쳐도 내 지갑의 주인이 나라면 내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지갑의 주인이실 때만 하나님은 진정한 나의 주인이 되시는 것입니다.

돈보다 사람이 귀하면 그 사람은 가족입니다. 하나님보다 돈이 더 귀하면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돈보다 하나님이 더 귀하게 여겨질 때 하나님은 진정한 나의 아버지가 됩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어야 나는 그분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돈의 권세로는 절대로 잘 살거나 행복하게 살 수 없습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잘 살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세이고, 그 권세를 받은 자녀가 되는 권세입니다.

재벌의 자녀는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의 자녀는 내 마음대로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순전히 내 맘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해 놓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기만 하면 됩니다. 재벌의 자녀와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누구에게나 공평합니다. 그것은 재벌이라고 기회가 더 많은 것도 아니고, 가난한 사람이라고 기회가 적은 것도 아닙니다. 세상은 차별이 많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나면 세상은 참 공평함을 깨닫게 됩니다. 특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부터 받을 수 없는 아주 특별한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이 특권을 누리게 되면 세상의 힘이 없어도 아주 행복하게 살 수 있고, 영향력 있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신 특권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자녀의 특권은 죄 용서함을 받는 특권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자녀의 특권은 평화를 누리는 특권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자녀의 특권은 인생의 바른 목적을 따라 살게 된 특권입니다.

 

성도 여러분 재벌의 자녀가 되는 것에 욕심을 두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에 욕심을 두고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 권세와 물질에 연연하며 평생을 불행하게 살지 말고, 우리에게 천국의 삶을 살게 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믿음에 욕심을 내시기 바랍니다.

미신을 믿는 사람들이 부적을 사서 붙이고 다니듯, 주일 날 겨우 교회 한번 출석하는 것으로 액땜하듯 신앙생활을 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욕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세히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똑같이 힘들고 어려운 세상을 살면서도 항상 기뻐하고 늘 감사하며 천국을 사시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미신을 믿는 사람들과 다를 것 없이 신앙생활도 중심 없이 늘 흔들리며 불안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 그 자녀의 권세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돈을 로 영접하기 위하여 힘쓰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로 영접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힘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돈의 권세로 이 세상을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로 이 땅에 살면서도 항상 천국의 삶을 누리며 살기를 축원합니다.

 

말씀과 삶이 어우러지는 로고스라이프 교회

私たちは「父なる主」の子です

 

数年前、韓国にてもっとも勢力を誇る財閥の長を親として持つある若い女性が自らいのちを絶つという事件が起きました。このニュースに触れ、韓国ばかりか世界中の人々が、財閥系の親がいるのに、何が不満で自ら不幸を招いたのかと思った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私にはその女性の未来には小さくない力が保証されているにもかかわらず、生きる希望と意味とを見出すことができず、自らこの世に背を向けてしまったのです。この世の力の限界を感じずにはいられなかった事件でした。キリスト者はこの世の限界を知っています。それを超える力ある人の道があることを知っています。この世が提供しえない、喜びと表現されたり、平安と表現される、その幸いを知っています。あらためて、問います。果たして、あなたはこの事実にあずかっていますか。

しかし, この れた , すなわち, その じた には, どもとされる 特権をお与えになっ ヨハネの福音書 1:12)

「神の子ども」とはどんな表現でしょうか。子どもの力とはその子の父の力です。この力とは両親のすべてを受け継ぐことができるという力です。この地上で最上級の力が何かと問いかければ、それは、神の子どもの力でしょう。しかし、この力はイエス・キリストを主と受け入れた人に授かるのです。

では、イエス・キリストを受け入れるという表現は具体的にどういった意味なのでしょうか。イエス・キリストを自分の主と信じ、むしろ自分自身は否み、自分が主たることをあきらめ、すべての力の主がイエスにあることを信頼し、お任せすることです。では、私たちが「主こそがわたしの主です」という事実は何によってあきらかに証明されるのでしょうか。あなたの財布事情に対する態度がそれを明かしするでしょう。「あなたのお財布の主がまさにあなたの主」だからです。いくら、尊い告白をしようとも、それがあなたが主なのか、主が主なのかを指し示すのは、主ではなくあなたなのです。主があなたの財布をつかさどる方であると時、はじめて、主こそがあなたの主であるのです。

そのお金よりもその人がより大切に思われるなら、その人はあなたの家族です。ひるがえって、主よりもお金がもっと大切に思われるのなら、主はあなたの「父なる主」ではないでしょう。お金よりも主がもっと大切に思われるので、主はあなたの「父なる主」なのです。主があなたの「父なる主」であるとき、あなたは「父なる主」の子です。

財閥の長を親に持つ子としては、思いのまま行きません。でも、「父なる主」の子であるとき、思いのまま行くので驚きなのです。

 

 

「父なる主」の子になるのは、ただ一点、あなたの心によります。「父なる主」がまずはじめに主イエス・キリストをお与えになった。その主イエスを通して私たちは救いと表されているものを知った。これは、この主イエス、「父なる主」の独り子を受け入れることを指すのです。財閥の子とは比肩しえない、この力は誰にも普遍的に公平をもって分け与えられています。持っているものの多寡に拠りません。機会は誰にでも開かれている力なのです。この世は差別化、区別をもって、動きますが、「父なる主」の子になるとき、分かります。ああ、この世は実に公平をもって成り立っている、と。特に「父なる主」の子となるとき、特権がこの地上にあります。この特権にあずかるとき、この世の力が少なくとも、幸福を知ります。共に息する人々に、及ぼす力が甚大です。では、「父なる主」の子がもつ、その特権とは果たして何を表しているのでしょうか。

 

第一に「父なる主」の子の特権は罪のゆるしを得る特権です。

第二に、「父なる主」の子の特権は平和にあずかる特権です。

第三に、「父なる主」の子の特権は人の道の目的を知り生きる特権です。

 

信徒の皆さん。財閥の子になれればなぁという気持ちと「父なる主」の子になれればなぁという気持ちを見つめてみましょう。この世の力や財に思いを置くときの幸不幸を天秤に図ることを超えて、「父なる主」の子として生きる、天の御国に生きる気持ちを強くお持ちください。地域信仰が占い用紙を手に合掌して帰ってよしなどで教えるごとく、主日に一度教会になんとか一度顔を見せる信仰生活はたしかにあります。ですが、それを超えてただ「父なる主」を仰ぐ気持ちをただ表し続ける信仰者がたしかにあるのです。イエス・キリストを信頼し共に歩むために甘受するには一筋縄ではいかないこの世に生きるのは同じです。ですが、その中で、いつも喜び、あらゆることに感謝し、天の御国に生きる信仰がある反面、韓国や日本の地域信仰の信者のようにまるで重心のずれたコマのように安定感のない不安でならないキリスト信仰者が実に少なくないのです。

私たちには心すれば、だれでも「父なる主」の子としてあずかる力がゆるされているのです。お金をとして受け入れるために力を尽くすのではなく、イエス・キリストをと受け入れることに誠心誠意、いのちを賭してまで力を尽くせる幸いをお祈りいたします。そうして、お金というこの世の論理に委ねることなく、「父なる主」の子の力をこの地に表す、天の御国人として生きる道を歩み続けられますことをお祈りいたします。

 

「み言葉きる」ロゴスライフ教会